제대로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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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3:1-12
제대로 살고 있는가?
갈수록 빈부의 격차와 도농과의 격차가 커지고 있습니다.
갈수록 빈부의 격차와 도농과의 격차가 커지고 있습니다.
가장 가슴아픈 것은 교육의 격차로서 수도권 특히 강남 출신들이 주요 명문대학입학에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방의 젊은이들은 계속 지방에 머물다가는 경쟁에 끼어보지도 못하고 도태되고 말 것이라는 불안감에 다들 수도권으로 직장을 찾아 미래를 찾아 떠나고 있습니다.
뉴스에 의하면 이미 전라도는 인구 감소지역으로 앞으로 젊은 층의 인구 절벽에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합니다.
과연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제대로 살고 있는가?
하는 불안한 질문이 자꾸만 머리에 맴도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가 말씀하시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절로 8절입니다.
100억원의 수임료를 받은 전직 대법관 변호사의 행태가 큰 뉴스가 되었습니다.
요즘에서야 뉴스가 되었지만 전관예우는 법조계의 오랜 관행이었습니다.
이런 뉴스를 접하면 금액이 워낙 크다보니 같은 나라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 별로 분노조차 일어나지 않습니다.
50억받아서 구속된 전직 부장판사 변호사의 경우는 좀 억울하겠다고도 느껴질 정도입니다.
원래 이런 전직 대법관들이나 부장판사들이 처음부터 악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처음에는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약한자를 돕기위해 법공부를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이라는 것은 혼자일때보다 여럿이 있을 때 행하기 쉬운 것입니다.
거대화된 법률법인 시스템에서 자기도 모르게 사람들의 관행에 물들어 버린 것입니다.
요즘 메피아라는 말이 유명합니다.
메트로와 마피아라는 말의 합성어로 서울 메트로 출신들이 하청업체에 말도 안되는 특혜를 받고 취업하여 그 불이익을 계약직 직원들이 떠않게 되는 구조를 뜻합니다.
19세 밖에 되지 않은 꽃다운 청년이 말로만 2인1조이지 고된 나홀로 근무로 인해 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어쩌다 생긴 일이 아니라 한 개인의 안전 불감증 때문이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의 악으로 인해 벌어진 썩을 대로 썩은 고름이 터진 것이라는데 전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습니다.
개인의 윤리는 명예와 위신 사회적 이목이 관련되어 있기에 쉽게 동기부여가 됩니다.
그러나 다수의 악을 저항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악의 정체를 깨닫기도 어렵고
내가 속한 집단으로부터 핍박받기도 무섭고
남들이 문제삼지도 않는데 지금 누리는 특혜를 포기하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따라 산다는 것은 이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전장에서 하나님처럼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고 명하셨습니다.
우리가 악으로 부터 멀어지고 선해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개인의 양심의 문제로만 볼 수 없습니다.
내가 속한 사회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찰하고 진단해야 합니다.
이러한 노력이 없다면 우리는 다수가 저지르는 악에 빠질 수 밖에 없으며 또한 그에 따른 양심의 가책마저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9절로 12절까지 읽겠습니다.
우리는 항상 경쟁에서 이겨야한다고 배웠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경쟁은 항상 1등만 살고 나머지는 다 죽습니다.
목포 작은 도시만 예를 들더라도
가장 잘되는 제과점 식당 마트 심지어 교회들을 제외하면 2등부터는 다 하향세에 있습니다.
죽어라 최선을 다해도 안되고 몇번은 죽어야 뭔가 되는 세상입니다.
OECD 국가 중 압도적 자살률 1위, 청소년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달고 있지만
이를 위한 실질적인 조치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우리 자신에게 잔인한 것일까요?
지금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 지금 쉬면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은 불안감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요?
도대체 언제가 되야 좀 한 숨 돌려도 되는 때가 올 까요?
본문에서 하나님은 7년째 안식년과 7일째 안식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6년동안 땅을 경작하고 7년째는 그 땅을 놀려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6일을 열심히 일하고 7일째는 무조건 쉬어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과연 이렇에 살고서 우리는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 남을 수 있을까요?
마른 걸레를 짜서라도 쥐어짜야 겨우 살아남을 것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어려움 사정을 전혀 감안하시지 않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저와 여러분의 사정을 잘 알고 계십니다.
물고 뜯기는 정글에 우리를 던져두고 잊어버리신 분이 아닙니다.
시편 121편에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고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하나님은 우리는 비록 험한 세상에 내보내시지만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에게 붙여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하나님을 버렸지만 세상에서도 뒤쳐지고 하나님과도 멀어지지 않았나 돌아보아야 합니다.
본문은 나그네와 가축과 노예의 처우개선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은 우리의 가치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이 본문안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6일을 일하고 7일째 쉰다고 게으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니 우리는 원초적으로 6일을 일하고 7일째 쉬어야 최대성능을 끌어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안식을 보증하신다는 말입니다.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당당하게 쉬는 것도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이스라엘이 과연 살아남기는 했을까요?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라 세계 최고의 부자국가가 되었습니다.
본문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 방법을 내려놓으라는 말입니다.
내 안의 불안감을 내려놓으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되고 쉴 때 좀 쉬어도 나는 하나님의 보호아래 행복할 자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삶이 무조건 희생과 고통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쉬어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정도로 우리는 하나님과 밀접하게 연결된 존재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열심히 복음전도사역을 하시다가
베다니라는 빈민촌에서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남매의 집에서 쉬셨다고 요한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에서 안식은 믿음의 문제라고 규정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나의 최선을 믿는 것을 오히려 불신앙이라고 규정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을 믿고 푹 쉴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믿음의 최종 단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엄청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시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쉴 때 쉬어야 합니다.
복잡해진 사회구조에서 일요일에 일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최소한 주중 하루를 떼어 쉬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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