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환도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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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2 장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로 드라마틱하게 외삼촌 라반에게서 벗어나게됩니다. 그런데 큰 산을 넘으니 더 큰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바로 20년 헤묵은 형 에서와의 문제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와의 문제를 세가지 방법으로 풀려고 했습니다.
1) 자기 눈을 의지 :1
이런 야곱에게 하나님은 그의 군대를 보여주십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가 두 진영이라고 표현하고 그 땅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짓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야곱의 반응이 너무나 담담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군대를 보았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성령체험임은 분명합니다.
아마 보통 사람들이 두 진영이나 되는 하나님의 군대를 보았다면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무슨이유인지 야곱은 그저 담담하게 아 하나님의 군대가 두 진영이구나 라고 말하고 그게 끝입니다.
2절에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를 보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보다라는 동사는 단순 능동인 콸형태라고 하여 겉모습을 본다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성령의 체험을 많이 경험하지만 그러한 성령 체험이 그 인생을 바꾸는 역사로 이어지지 않고 그저 일회적인 좀 놀라운 경험으로만 끝나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령체험은 눈으로만 보고 놀라는데 그쳐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소소한 체험이라도 육신의 눈이 아닌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대게 골치아픈 현실 문제에 직면한 사람들은 성령체험을 봐도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눈으로만 보게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가복음 4장에 씨 뿌리는 비유에서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과 같은 마음밭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이 자기 눈을 의지하는 한 문제해결은 갈수록 더 멀어져 갈 뿐이었습니다.
2) 자기 계산을 의지 :3
두 번째로 야곱은 형 에서와의 문제 해결을 위해 자신의 계산을 의지하였습니다.
먼저 거창한 사절단들을 보내어 자신의 소식을 알리는 것으로 형 에서에게 자신의 힘과 위치를 보여주려는 의도 였습니다.
나름대로 자기 식솔들 중에서 가장 허우대 좋고 잘생긴 인원들로 보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서도 자신을 우습게 보지 못하고 섣불리 공격하지 않으리라 계산을 했겠지요.
그러나 결과는 오히려 에서가 사백명을 거느리고 이 곳으로 오고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장정 사백을 거느릴 수 있는 권력은 흔하지 않았습니다.
에서의 막강한 영향력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야곱은 두려워하던 일이 드디어 터졌구나를 절감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자동적으로 문제해결을 위한 계산을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얼마가 들 것이며, 어떻게 해야 상대방의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내 조건을 관철시킬 것인가 두뇌회전부터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러한 계산들이 맞는 듯 하다 막판에 생각지도 못한 돌발변수가 생겨서 틀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계산보다 기도가 앞서야 할 줄 믿습니다.
생각없이 기도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 해결의 키는 하나님이 쥐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3) 자기 재산을 의지 :5
야곱은 형 에서에게 자신의 재산을 과시함으로 문제 해결을 꾀하려고 합니다.
혹시나 이런 뇌물 작전이 통하지 않을 때 자신의 목축들을 두 떼로 나누어 하나가 공격 당하면 다른 하나를 선택하여 도망치려는 치밀함을 보여줍니다.
1절에 하나님께서 마하나임, 두 진영의 하나님의 군대를 야곱에게 보여주신 것은 이렇게 자신의 가축들을 두 떼로 나누어 도망가도록 아이디어를 주신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재산을 이용해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재산 때문에 자신의 안전이 위협당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11절에 야곱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그가 가진 재산을 잃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공격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재산을 사람의 인생을 윤택하게 해줄 수는 있지만, 사람의 생명을 지켜주지는 못합니다.
전세계에 퍼진 6대 불치병을 비롯하여 궁극적으로 진시황도 김정일도 못 막은 노화라는 질병은 재산이 해결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7절은 현재 야곱의 마음 상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과 재산들을 곁에 두어도 두렵고 답답한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야곱입니다.
이러한 야곱에게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찾아오셨습니다.
4) 혼자되게 하심 :22-24
야곱이 얍복강 즉 요단강을 건너기 전 마지막 갈등을 하게 됩니다.
이 강만 건너면 내 고향 가나안 땅이 시작됩니다.
자신의 목축과 하인들과 자신의 가족들은 먼저 건너가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장 앞장서야할 자신이, 아버지 이삭으로 부터 장자권을 물려받은 족장이 가장 뒤에서 두려움에 떨며 강을 건너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끝까지 찌질한 캐릭터의 끝을 보여주는 야곱입니다.
홀홀단신 야곱에게 큰 가족을 이루게 하셨고, 몸뚱아리 하나였던 그에게 많은 재산으로 채워주셨고, 거기다 남들은 상상도 못할 하나님의 군대를 두번씩이나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고 쩔쩔매는 야곱입니다.
그런 야곱에게 예수님이 갑자기 찾아오시고 씨름을 걸어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힘으로 야곱을 떠밀어 요단강 저편으로 옮기실 수도 있으셨겠지만, 그렇지 아니하셨습니다.
야곱은 끝내 예수님을 씨름으로 이기고 요단강을 건너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과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예수님을 이깁니다.
솔직히 씨름 실력으로야 따지면 상대도 되지 않겠지만,
애시당초 예수님은 이기시려고 씨름을 하신 것이 아니라 지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5) 환도뼈를 치심 :25
예수님은 씨름은 지셨지만 야곱 모르게 한가지 조치를 해두신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야곱의 환도뼈를 덜렁거리게 빼버리셨습니다.
요단강 앞에서 씨름은 이겼지만, 덜렁거리는 허벅다리를 지팡이에 의지한채 야곱은 이제 하나님을 피해서 갈 곳이 더이상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 절름거리며 강을 건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죽는 것보다 더 무서웠던 요단강 도하를 마침내 감행합니다.
힘줄이 끊어져서 덜렁거리는 허벅다리를 지팡이에 의지하고 건너는 야곱을 연상하면 본장 10 절의 야곱의 고백이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20년전 이 강을 건넜을 때의 마음을, 그 느낌이 마치 엇그제 일인냥 생생하기만 합니다.
큰 가족을 이루고 많은 재산을 얻은 줄 알았지만, 생명을 건 싸움 앞에서 철저히 혼자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는 야곱입니다.
그토록 무섭고 두려웠지만 막상 혼자가 된다는 것이 생각보다 비참하지는 않았습니다.
혼자가 되니 이렇게 강을 쉽게 건널 수 있었는데 저으기 놀라는 야곱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씨름을 합니다.
그러나 씨름을 이기고 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씨름을 한다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야곱도 굳이 예수님과 씨름하지 않아도 됐었습니다.
굳이 요단강 건너 가나안 땅이 아니더라도 더 좋은 곳은 많고 세상은 넓다라는 것입니다.
형 에서를 피해서 얼마든지 다른 곳에서 잘 살수 있었을 야곱입니다.
그런 그가 왜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는 형 에서가 사는 가나안 땅으로 가는 요단강앞에 서있을까요?
:9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20년 전 이 곳 요단강을 건널때 창세기 28:15 에서의 하나님과의 약속을 기억하는 야곱입니다.
이 약속만 없었더라면 굳이 고민하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야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을 지키기위해 자신의 생명을 걸고 고민하며 씨름하는 야곱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에서처럼 하나님 모르고 살면 하나님과 씨름할 일도 없고 부딪힐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씨름하는 사람과 사람과 씨름하는 사람의 끝은 너무나 다릅니다.
하나님과의 씨름을 피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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