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구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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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시편 52편 1-9
오늘 본문은 사무엘상 21-22장을 배경으로 다윗이 노래한 교훈곡입니다.
다윗이 사울왕을 피해 도망하다 기진맥진하여 놉이란 곳에 이르러 제사장 아비멜렉에게 먹을 것을 청하였습니다.
다윗을 도우면 사울왕에게 처벌받을 것을 알기에 아무도 다윗을 도우려고 하지 않았지만 제사장 아비멜렉은 용감하게 다윗을 도와주었습니다.
이일을 본 도엑이라는 에돔사람이 사울왕에게 고자질하고 사울왕에게 인정받기위해 아비멜렉을 포함한 85명의 제사장들을 죽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애통해하며 본문의 시를 지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지만 정말 악한 사람들이 있긴합니다.
악한 자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피해를 입습니다.
연쇄살인범이나 테러리스트같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악한 사람들은 바로 다름아닌 나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악한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1.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도엑은 사울왕의 가축을 맡은 자였으나 그는 더 높은 자리를 탐하였습니다.
이런 악한 자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계실 자리가 없습니다.
그가 꾸민 악한 계획들이 마음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악한 계획들을 가지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악한 자들은 교만합니다.
이러한 계획들을 세운 자신이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빈부귀천을 떠나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존중해야하지만 악한 자들은 사람을 자신의 수단으로 보기 때문에 자신에게 별 도움이 않되는 약한자 가난한 자들에게 한없이 잔인하고 무례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이 계셔야 다른 사람도 존종하게되고 겸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악한 자들은 자신들이 직접 남에게 상해를 가하고 피해를 입히지 않으므로 자신은 의롭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는 그들의 손에 든 무기가 아니라 그들의 혀입니다.
본문은 악한 혀는 날카로운 삭도라고 합니다.
무딘 칼은 한번에 잘리기 않지만 날카로운 삭도는 두번 베지 않습니다.
한번만 그어도 깨끗하게 잘립니다.
왕의 수염을 다듬는 이발사가 삭도를 잘못다루어 처형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날카로운 삭도는 조심히 다루어야 합니다.
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단 한번의 악한 말은 사람의 심령을 상하게 합니다.
또한 한 번 상처낸 말은 거두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3.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 (셀라)
악한자 도엑은 제사장 아비멜렉을 사울왕에게 고자질하면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고 부풀리고 왜곡하였습니다.
사흘이상 굶은 다윗에게 인간적인 마음으로 먹을 것을 준 제사장 아비멜렉은 순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엑은 제사장 아비멜렉이 다윗에게 합세하여 사울왕에게 반역하였다고 과장하였습니다.
폭력과 폭행을 일삼는 자만 악한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말에 간사함과 속임과 거짓된 의도가 있는 자가 더욱 악한 자입니다.
마태복음 15:10~20. “10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11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도 사람의 말로 그 사람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거짓과 허영의 말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키고 오직 덕과 선을 세우는 말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간사한 혀여 너는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
한동안 미투운동, 그리고 금융감독원장, 드루킹 댓글 사건등으로 세간이 시끄러웠습니다.
단 한번의 잘못으로 권력의 꼭대기에 다달렀던 사람들이 형편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국민들이 부여한 엄중한 권력을 잘못이용한 그들의 과를 용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마음이 허전한 것은 누군가의 약점이 드러나면 거기에 벌떼처럼 달려드는 하이에나 떼들처럼 물고 뜯는 행태였습니다.
치열한 경쟁사회인 우리나라에서 내가 올라서려면 다른 누군가를 끌어내려야하는 서글픈 현실탓을 할 수도 있겠지만 꼭 저래야만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하는 안타까운 의문이 들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 꼭 남이 죽어야만 하는가 조금 덜 먹고 덜 누려도 같이 살 수는 없는 것인가 우리는 묻고 싶습니다.
어찌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얻은 다윗왕도 자신의 가장 충직한 부하를 죽인 살인자요 그 부하의 아내를 탐한 간음자였습니다.
하나님도 이런 과거가 있는 사람을 용납하시고 사랑하셨것만 우리는 하나님처럼은 아니어도 조금만 더 용서하고 용납할 수는 없을까요?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결백하고 깨끗해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티를 보지 말고 네눈의 들보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남의 잘못을 드러내기보다 덮어주고 남을 깍아내리기 보다 세워주는 말을 하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 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셀라)
6.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7.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많은 사람들의 꿈과 소망을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하나님 없이도 잘먹고 잘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보다는 남은 평생을 보장해주는 직장과 연금을 목표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는 수많은 대한민국의 청년 구직자들이 있습니다.
매일매일 수고로이 일하여 양식을 얻기보다는 단 한번의 투자로 평생먹을 돈을 벌고자 이리저리 헤메며,
대통령이나 판사가 아닌 건물주가 꿈인 초등학생들을 대하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수많은 경쟁을 뚫고 이들이 꿈을 이루었을 때 대다수의 경쟁에서 진 사람들을 이들은 어떻게 볼른지 의문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라고 이러한 진흙탕싸움에서 자유롭진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에서는 거룩하고 선하지만 세상에서는 그만큼 더 간사하고 악해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치가 두개로 갈라지면 이중적인 사람이 됩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이라는 선한 가치를 구하고 교회 밖에서는 돈을 구한다면 그 마음의 갈래는 더욱더 깊어져서 양심에 화인 맞은 이중적인 사람이 되고 맙니다.
세상의 어떤 권력도 명예도 부도 쾌락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악한 자들의 권력과 부는 그들이 떵떵거릴 때 하늘 끝까지 날아오르다가 한순간에 땅바닦에 곤두박치고 맙니다.
8.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9.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두가지 가치 중에서 이제 하나만을 골라야 합니다.
하나님과 돈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잎사귀만 화려하고 뿌리가 부실한 단년생 화초처럼 지금 당장의 것만을 구하기보다
잎은 거칠고 보잘것 없지만 뿌리깊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17:8)
하나님 때문에 지금 당장 손해보더라도 하나님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하나님은 가만히 앉아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9절의 말씀처럼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할 부분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또한 반드시 하나님의 행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비록 덜 먹고 덜 누릴지라도 하나님을 구하는 자는 영원한 승리가 있음을 선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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