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받은 사랑
페이지 정보
본문
아가 5:1-16
아가서는 엄격하고 고리타분할 것 같은 성경에 대한 이미지를 깨뜨리는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총 8장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전체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사랑이야기인 아가서의 여주인공 술람미의 여인의 본문에 기록된 모습은 우리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1:5
먼저 피부톤으로는 요즘 인기있는 백옥같은 피부가 아니라 까무잡잡한 얼굴이었습니다.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숙련공의 손이 만든 구슬꿰미 같구나.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7:1-2
몸매는 요즘인기있는 갸름하고 호리호리한 스타일이 아닌 오랜 노동으로 인해 굵직굵직한 다리와 허리의 좋게 표현하자면 튼튼한 체형이었습니다.
머리털은 고불고불”(5:11)
요즘 인기있는 긴 생머리가 아닌 자연파마로 젊은 층에게 어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습니다.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1:6
본문을 보니 술람미 여인은 어릴 때부터 타고난 용모로인해 험하고 힘든 포도원지기로 일해왔기에 더더욱 외모를 가꿀 형편도 여건도 안되었습니다.
이러한 여자에게 솔로몬 왕은 홀딱 반하였습니다.
“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6:8
당시 솔로몬 왕에게는 수많은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왕은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6:9전반)” 하고 술람미 여인을 찬미합니다.
솔로몬 왕은 이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하였지만 이 여인은 그러한 솔로몬 왕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못생기고 천한 자기자신을 아는데 어찌 감히 솔로몬 왕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술람미 여인 때문에 솔로몬왕은 잠도 못자고 애간장을 태우며 눈물로 노래를 합니다.
한결같은 솔로몬 왕의 고백에 마침내 술람미 여인은 마음을 열고 솔로몬 왕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함께 사랑 노래를 부릅니다.
이것이 전체적인 아가서의 내용입니다.
이 아가서의 사랑이야기가 과연 구약성경의 한부분을 차지할 정도의 의미가 있을까 질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한편의 사랑이야기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놀라운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사랑의 변질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허락하시고 단 한가지를 허락하지 않으셨지만 결국에는 허락하신 모든 것을 누릴 자유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단한가지 금하신 것을 어기고야 말았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그 즉시 몸과 영혼에 타락이 임하였습니다.
먼저 살중의 살이요 뼈중의 뼈라고 한몸처럼 사랑했던 아담과 하와는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며 자기 혼자 살아보겠다고 이기심을 부리게 되었습니다.
이기심으로 시작된 인간의 죄성은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살인으로 번지고 악한 자들이 번성하여 서로 죽고 죽이는 살아있는 지옥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의 죄는 인간을 넘어 피조세계 전체에 저주를 불러왔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8:22)
인간들과 모든 피조물들은 죄로 인한 저주로 늙어가고 약해가고 불안해지고 포악해지고 이기적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저주들에서 가장 비참한 저주는 "사랑" 이라는 가장 귀한 개념이 변질되버린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4장의 가인의 후손 라멕은 악한 정복자로서 처음으로 일부다처 즉 두 아내를 들인 자였습니다.
그리고 라멕의 딸 나아마는 유난히 아름답다라는 이름의 뜻 답게 여성의 모든 가치가 외모로 판단되어지는 시대를 열었습니다.
한 남자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무기로 여러 남자들에게 동경의 대상으로서의 새로운 여성 정체성이 시작되었습니다.
죄악이 임하기 전에는 남자는 한 여자에게 여자는 한 남자에게 속하였으며 서로 계산하거나 이익을 따지는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죄악이 임하고 영적으로 타락하자 여자는 남자의 정복의 대상이 되었고 소유물로 취급받게 되었습니다.
여자에게 있어서 남자는 이용의 대상이 되었고 이익의 수단이 되어버렸습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의 일체감은 없어지고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주는 신뢰와 확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은 의심이 더해질수록 더욱 공허해지고 공허해진 빈자리를 채우기위해 "쾌락"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쾌락은 인간들을 파괴하고 무너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인공지능 로봇트가 결혼 대신 성적파트너 역할을 대신하여 사람들에게 쾌락을 줄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가슴아프게도 이 쾌락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더욱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3) 사랑의 회복
이러한 인간 지옥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친히 찾아 오셨습니다.
만물의 창조자요 주권자의 만유의 주재이시고 왕중의 왕이신 예수님은 가장 낮은 모습으로 이 땅에 찾아 오셨습니다.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는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노라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겉옷을 벗겨 가졌도다" 5:5-6
마치 그 모습은 잃어버린 사랑을 찾기위해 한 밤중에 문을 두드리는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사람들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솔로몬 왕의 사랑을 처음에는 의심하여 받아들이지 못했던 술람미 여인처럼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채찍을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손과 발에 못이 박혀 물과 피를 다 쏟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기위해 모든 것을 바치신 예수님을 보면서 잃어버렸던 그 무엇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최고의 순간은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시어 사랑은 죽음조차 이길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을 찾아 헤메는 솔로몬 왕에게 사람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여자들 가운데에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분명 술람미 여인은 남들보다 나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솔로몬왕은 미친 사람처럼 술람미 여인을 찾아 헤메었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뭔가 남들보다 나은 것이 있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보혈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사는 권리만 얻는데 그쳐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우리의 변질되었던 사랑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켜주셨습니다.
더이상 사랑에는 비교가 없습니다.
외모나 재력이나 직업이나 장래가 더 나아야 사랑하는 변질된 사랑은 이제 없어져야 합니다.
존재 그 자체가 사랑이요, 사랑 받을 완전한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못생기고 뚱뚱해도 내사람이니까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의 사랑은 구원받은 자가 보여주는 변질로부터 회복된 완전한 사랑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먼저 구원받은 사랑에는 꾸밈이나 허영이 없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 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에서 내가 내 사랑을 네게 주리라" 7:11-12
솔로몬 왕이 가진 호화스러운 궁궐이나 강남 한복판의 아파트가 필요없이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들판에서 유숙하는 것조차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인생전반에 대한 존중과 인정을 뜻합니다.
솔로몬왕에겐 아름다운 옷과 장신구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흔하디 흔한 포도나무 꽃과 석류 꽃이지만 거기엔 포도나무와 석류나무를 키우기 위해 흘린 술람미여인의 땀과 눈물이 베인 것들입니다.
솔로몬 왕에게는 그 어떤 보석과 명품들보다 더 아름다운 술람미 여인의 주름살과 굳은 살들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치장도 없고 가림도 없습니다.
한 눈에 반하는 것이 사랑이라지만 그런 사랑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나한테 와서 궂은 일 억한 일 다 겪어도 내 곁을 지켜준 내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늘 솔로몬 왕의 애끓는 사랑처럼 사랑의 불길이 활활 타오른다면 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사랑, 진짜 사랑입니다.
또한 구원받은 사랑은 진정한 쾌락을 가져다 줍니다.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이 포도주는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내려서 자는 자의 입을 움직이게 하느니라" 7:8-9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서로를 가리웠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구원받은 사랑에는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적나라하지만 조금도 저속하지 않고 순수하며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쾌락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쾌락을 얻기 위해 당당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되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당당하게 누릴 수 있는 쾌락이라면 누려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당당하지 못한 쾌락은 인간을 파괴하지만 구원받은 사랑이 주는 쾌락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남편과 아내로서의 쾌락은 그 자체로서 최고로 아름답고 최고로 행복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가서를 읽고 성령님의 감동을 받았다면 이제 자신의 남편과 아내를 서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남들보다 나은 것 없지만 내 눈에는 최고로 멋지고 예쁘다면 여러분의 사랑은 구원받은 사랑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회복되면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사랑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은 결코 구원받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소중히 여기기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무엇보다도 사랑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사랑에 실패한 사람은 모든 것에 실패한 사람입니다.
사랑에 실패해놓고 구원받았다고 덮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내 남편 사랑하기를 내 아내 사랑하기에 모든 것을 바치는 모습이 없다면 나는 과연 구원받은 사람인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우리에게 딱 한가지 질문을 하실 것 같습니다.
"너는 너의 사랑에 최선을 다 했느냐?"
이 질문에 조금이라도 당당해 질 수 있도록 사랑에 최선을 다 하는 우리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