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미련의 차이 - 잠언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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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서에는 지혜를 가지라고 하며 동시에 지혜롭기 위해서는 미련하지 말라고 합니다.
즉 지혜로우면 미련하지 않고 미련하면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혜로우려면 무엇보다도 미련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언이 경계하는 미련함은 5개의 단어로 표현됩니다.
첫째는, ‘에윌’(אויל)입니다.
이는 ‘자기 고집대로 하는 완고한 자’, ‘이해력이 무딘 자’를, 헬라어에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세가 전혀 없는 자’(ἀσεβεις)라는 의미로 앞뒤가 꽉 막혀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 없어서 항상 실수와 실패의 결과를 가져오는 사람을 가리킵니다(잠1:7).
둘째는, ‘케실’(כסיל)입니다.
이는 고집이 세고 완고한 자로서 이성적으로 우둔하여 다른 사람의 말이나 의견을 들어보려는 자세는 없고 오직 자기의 눈에 보이는 대로,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는 사람입니다(잠1:22).
본문의 미련한 자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고집스러움입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남자는 고집이 있어야 주관이 있는 사람이라고 여겨집니다.
문제는 이게 교회까지 들어와 버린 것입니다.
죽어도 복음은 지킨다는 신앙적인 신념이 자칫 그 영역을 넘어 고집의 단계로 확장되면 문제가 아주 커집니다.
신앙은 결코 고집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변화를 시도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지혜로우면 미련하지 않고 미련하면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혜로우려면 무엇보다도 미련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언이 경계하는 미련함은 5개의 단어로 표현됩니다.
첫째는, ‘에윌’(אויל)입니다.
이는 ‘자기 고집대로 하는 완고한 자’, ‘이해력이 무딘 자’를, 헬라어에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세가 전혀 없는 자’(ἀσεβεις)라는 의미로 앞뒤가 꽉 막혀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 없어서 항상 실수와 실패의 결과를 가져오는 사람을 가리킵니다(잠1:7).
둘째는, ‘케실’(כסיל)입니다.
이는 고집이 세고 완고한 자로서 이성적으로 우둔하여 다른 사람의 말이나 의견을 들어보려는 자세는 없고 오직 자기의 눈에 보이는 대로,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는 사람입니다(잠1:22).
본문의 미련한 자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고집스러움입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남자는 고집이 있어야 주관이 있는 사람이라고 여겨집니다.
문제는 이게 교회까지 들어와 버린 것입니다.
죽어도 복음은 지킨다는 신앙적인 신념이 자칫 그 영역을 넘어 고집의 단계로 확장되면 문제가 아주 커집니다.
신앙은 결코 고집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변화를 시도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의 로마 백부장 고넬료에게 임하신 하나님을 통해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유대인들은 유대인들의 하나님이라는 틀에서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변화였습니다.
우리는 미련한 자이 고집에서 벗어나려면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특히 내가 고집하는 전통이나 문화가 나의 개인적인 이익에 도움이 되고 새로운 변화가 내게 손해가 된다면 더더욱 적극적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 크리스챤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변화였습니다.
우리는 미련한 자이 고집에서 벗어나려면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특히 내가 고집하는 전통이나 문화가 나의 개인적인 이익에 도움이 되고 새로운 변화가 내게 손해가 된다면 더더욱 적극적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 크리스챤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절대적인 신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인 신념이 없으면 아이러니하게도 비본질적인 것에 집착하고 고집하게 됩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신념이 있으면 모든 것에 유연하고 여유가 넘치며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 절대적인 신념은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은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신념이 없으면 아이러니하게도 비본질적인 것에 집착하고 고집하게 됩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신념이 있으면 모든 것에 유연하고 여유가 넘치며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 절대적인 신념은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은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2:37-39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복음을 요약하면 이렇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이 내게 절대적인 신념이 되면 모든 변화가 두렵지 않습니다.
이러한 복음이 내게 절대적인 신념이 되면 모든 변화가 두렵지 않습니다.
흔한 오해가 크리스챤은 절대주의자이며 불신자들이 상대주의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반대입니다.
진정한 크리스챤은 복음 하나에만 절대적이며 그외 다른 모든 것들에는 상대적입니다.
그러나 정반대입니다.
진정한 크리스챤은 복음 하나에만 절대적이며 그외 다른 모든 것들에는 상대적입니다.
[고린도전서 9:20-22 KRV]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바울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신념은 영혼구원이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들의 문화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들의 문화를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매일 매일 변화되어야 합니다.
내 안에 복음이 절대적인 신념이 되어갈수록 나머지 것들은 부수적이고 이차적인 것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내 안에 복음이 절대적인 신념이 되어갈수록 나머지 것들은 부수적이고 이차적인 것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세번째로 잠언이 가리키는 미련한 자는 ‘파타’(פתה)입니다.
이는 ‘단순한 사람들’, 즉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분별력이 없어 아무 것이나 마구 받아들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잠1:4).
먼저 우리는 복음이 우리의 절대적인 신념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복음이 아닌 복음을 가장한 거짓을 절대적인 신념으로 삼아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미련한 자 "파타" 에 해당합니다.
성경은 고집을 경계하지만 동시에 분별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집과 분별력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고집에는 그 안에 객관적인 기준이 없지만 분별력에는 명확한 기준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않고 모르면서 나는 믿는 사람이다라고 착각하는 것은 고집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말씀이라는 기준으로 확신에 이르는데 이것이 바로 고집이 아니라 분별력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으로 분별력 있는 지혜로운 신자들이 됩시다.
이는 ‘단순한 사람들’, 즉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분별력이 없어 아무 것이나 마구 받아들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잠1:4).
먼저 우리는 복음이 우리의 절대적인 신념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복음이 아닌 복음을 가장한 거짓을 절대적인 신념으로 삼아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미련한 자 "파타" 에 해당합니다.
성경은 고집을 경계하지만 동시에 분별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집과 분별력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고집에는 그 안에 객관적인 기준이 없지만 분별력에는 명확한 기준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않고 모르면서 나는 믿는 사람이다라고 착각하는 것은 고집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말씀이라는 기준으로 확신에 이르는데 이것이 바로 고집이 아니라 분별력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으로 분별력 있는 지혜로운 신자들이 됩시다.
넷째는, ‘나발’(נבל)입니다.
이는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무감각한 사람으로 저질스럽고 수치스러울 정도로 천박한 사람입니다(잠17:7).
이는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무감각한 사람으로 저질스럽고 수치스러울 정도로 천박한 사람입니다(잠17:7).
현대인들은 고통을 느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경을 차단하거나 통증을 무조건 없애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 만큼은 우리는 고통을 느껴야하고 통증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사단의 속임수와 궤계는 너무나 정교하게 발달해왔습니다.
갈수록 하나님의 자리는 없어지고 거기에 인간의 교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와 국가의 권력과 문화를 통해 교묘하게 하나님의 자리를 없애려는 사단의 공작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저번 주에 언급한 모르고 죄를 짓는 자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살피고 점검해야 합니다.
나의 모르고 짓는 죄와 내가 속한 집단이 저지르는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항상 하나님 앞에 깨닫는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넷째는, ‘하세르 레브’(חסר־לב)입니다.
문자적 의미는 ‘마음이 없는 자’라는 뜻으로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혀 이성적 판단력이 마비된 상태, 즉 이해력과 통찰력이 없는 멍청한 인간이라는 말입니다(잠15:22).
사람들은 갈수록 쾌락의 노예가 되어 갑니다.
수치스러운 감정이 무슨 죄인냥 없어야 할 것으로 취급받습니다.
성경은 남자와 여자 모두 상체와 하체를 비롯한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것은 수치로 말합니다.
인간이 인간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수치를 느끼는 것입니다.
"역겨움" 이라는 느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내 아내가 아닌 다른 여인을 탐하고 보는 것이 "역겹게" 느껴지는 것이 원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수치와 역겨움조차 쾌락의도구로 삼아버렸습니다.
젊은 소녀들은 자신들의 노출이 이익이 되고 심지어 큰 돈을 벌 수 있는 도구가 된다는 이유로 "수치와 역겨움"을 포기합니다.
무슬림처럼 눈만 빼고 온 몸을 가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할 자기 몸을 가리고자하는 건강한 본능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티비와 인터넷 스마트폰등으로 사람들은 쾌락의 노예가 되어 "수치와 역겨움"이라는 정상적인 감각반응이 마비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풍조에 휩쓸리지말고 정상적인 판단력과 건강한 수치와 역겨움을 잃지 않는 지혜를 구합시다.
그래서 신경을 차단하거나 통증을 무조건 없애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 만큼은 우리는 고통을 느껴야하고 통증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사단의 속임수와 궤계는 너무나 정교하게 발달해왔습니다.
갈수록 하나님의 자리는 없어지고 거기에 인간의 교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와 국가의 권력과 문화를 통해 교묘하게 하나님의 자리를 없애려는 사단의 공작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저번 주에 언급한 모르고 죄를 짓는 자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살피고 점검해야 합니다.
나의 모르고 짓는 죄와 내가 속한 집단이 저지르는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항상 하나님 앞에 깨닫는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넷째는, ‘하세르 레브’(חסר־לב)입니다.
문자적 의미는 ‘마음이 없는 자’라는 뜻으로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혀 이성적 판단력이 마비된 상태, 즉 이해력과 통찰력이 없는 멍청한 인간이라는 말입니다(잠15:22).
사람들은 갈수록 쾌락의 노예가 되어 갑니다.
수치스러운 감정이 무슨 죄인냥 없어야 할 것으로 취급받습니다.
성경은 남자와 여자 모두 상체와 하체를 비롯한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것은 수치로 말합니다.
인간이 인간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수치를 느끼는 것입니다.
"역겨움" 이라는 느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내 아내가 아닌 다른 여인을 탐하고 보는 것이 "역겹게" 느껴지는 것이 원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수치와 역겨움조차 쾌락의도구로 삼아버렸습니다.
젊은 소녀들은 자신들의 노출이 이익이 되고 심지어 큰 돈을 벌 수 있는 도구가 된다는 이유로 "수치와 역겨움"을 포기합니다.
무슬림처럼 눈만 빼고 온 몸을 가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할 자기 몸을 가리고자하는 건강한 본능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티비와 인터넷 스마트폰등으로 사람들은 쾌락의 노예가 되어 "수치와 역겨움"이라는 정상적인 감각반응이 마비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풍조에 휩쓸리지말고 정상적인 판단력과 건강한 수치와 역겨움을 잃지 않는 지혜를 구합시다.
1)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입니다.
잠언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막연히 하나님을 공포의 대상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알아가면서 하나님의 진면목을 발견하고 체험하면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먹는 사람입니다.
잠언 9:10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성경말씀을 읽을 때 이성을 초월하는 성령님의 영적인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경말씀을 읽어야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부터 신약까지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우리는 말씀을 읽으므로 깨닫게 됩니다.
3) 선택과 판단의 순간에 내가 아닌 하나님을 기준으로 삼는 자입니다.
28:26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
우리는 끝없는 자기부정이 필요합니다.
이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나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내가 가진 상식, 내가 가진 고정관념, 내가 가진 가치등을 모두 다 내려 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마음을 열고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3) 인생의 목적이 달라져야 합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마태복음 6:33)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일하십니다.
내가 원해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더 차고 넘치게 채워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 사는 인생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 우리는 더이상 걱정근심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살것인가 고민하지 마십시오.
이는 이방인들이 하는 고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혜로운 자는 나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깨닫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삽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일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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