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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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서 6:6-8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별한 세대였습니다.
앗수르 제국의 침공으로인해 극한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열왕기하, 역대하서를 보면 앗수르 제국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성안의 백성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프고 목이 말랐으면 자신의 대소변을 먹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왕이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시어 18만오천명의 앗수르제국의 군대를 하나님의 한 천사로 일거에 죽이셨습니다.
이들은 승전을 통해 더욱더 영적각성과 신앙의 순수성 회복에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우상들은 철거되었고 율법은 회복되고 성전은 복구되고 예배는 정상적으로 드려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가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밝고 긍정적인 미래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철천지 원수 앗수르 제국이 조만간 멸망한다든지 남유다 왕국이 정치 경제적으로 부강해지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미가 선지자의 예언은 너무나 혹독한 꾸지람과 뼈아픈 매였습니다.
성전이 복구되고 예배가 회복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오히려 더욱 악해지고 불의해졌다는 통렬한 질타였습니다.
미가 선지자가 특히 중점적으로 다룬 것은 남유다에 허다한 사회악이었습니다.
강한 자, 많은 자들이 약한 자, 소외된 자들을 이용해먹고 착취하고 군림하는 부유층과 지도층들의 부패와 부정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본문을 통해 자기반성을 모르는 교만한 유대백성들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1-2절을 읽겠습니다.
:1-2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는 일어나서 산을 향하여 변론하여 작은 산들이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변론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
왕과 신하, 주인과 노예 이러한 관계를 수직적 관계라고 합니다.
여기엔 변론이나 논쟁이 없습니다. 그저 명령하면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어떤 관계입니까?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살려주신 하나님께서 변론하자고 하십니다.
가장 일방적인 은혜의 수혜자들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따질 건 따져보자고 하십니다.
보통 성경에서 재판장이라하면 당연히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재판장석에서 내려오시고 친히 원고가 되어 유대백성들의 잘못을 입증하십니다.
그런데 본문은 재판장을 대신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할 배심원들이 나옵니다.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죽 답답하시면 말도 못하는 산과 땅을 붙잡고 탄원을 하실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산들과 땅들이 무슨 판단을 하며 무슨 결론을 내겠습니까?
그러나 산들과 땅들은 태초의 시작부터 지어져 인류의 흥망성쇄를 보고 겪은 가장 변치않고 흔들리지 않는 기준을 가진 자로 비유된 것입니다.
당시 유대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이유없이 벌주시고 괴롭게 하셨다고 불평하였습니다.
분명 그 당시 유대백성들은 선대 조상들보다, 이웃의 북이스라엘보다 더 신앙적이고 신실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사는 형편은 나아지질 않았고 앗수르의 침공때는 죽도록 고생만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받고 형통해야 하거늘 오히려 이방신을 섬겼던 자신의 조상들과 북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더 형편이 나쁘다는 것을 당시 유대백성들은 불평하며 원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3절의 질문을 통해 유대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이 지극히 잘못된 것임을 주장하십니다.
:3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
하나님께서 불평 불만이 가득한 유대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지난 행적을 돌아보라고 질문하십니다.
그리고 4-5절을 통해 과거를 재조명하심으로 일관되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로우심을 변론하십니다.
:4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 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
이집트의 종노릇하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구하시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유에 따라오는 책임을 불평하며 다시 옛날로 돌아가려는 버리지 못한 노예근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참으시고 백성들을 광야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5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공의롭게 행한 일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
발람의 계교에 빠져 성적으로 문란한 모압 족속과 섞여 난장판을 벌렸던 이스라엘과 그러한 이스라엘을 벌하시되 멸하지 아니하시고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다면 제발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다시 기억하라는 호소입니다.
그간 얼마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공의를 행하셨는가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애시당초 이 재판은 말도 안되는 재판이었습니다.
감히 하나님과 재판장에서 원고와 피고의 입장으로 서로 시시비비를 가릴 처지가 안되는 우리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기준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재판장에서 변론은 커녕 감히 고개도 들수 없는 죄와 허물뿐인 존재들입니다.
마땅히 받을 벌로 따지자면 재판은 커녕 즉결심판으로 진작에 사형당해야 할 우리 인간입니다.
교회다닌다고, 남보다 조금 더 믿는다고 조금 더 깨끗하다고 조금 더 양심적이다고 하면서 마음으로, 또는 드러나지 않게 죄를 짓고 짓고 또 짓기는 마찬가지인 어설픈 신앙인들의 모습, 그러면서도 감히 하나님께 따지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대책없는 교만한 모습, 이러한 우리의 교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재판장석에서 내려오시고 친히 우리와 얼굴을 맞대고 변론하시는 모습에서 대조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헌법 제27조에 보장된 재판을 받을 권리 때문에 오늘 본문의 재판정에 불려진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재판정에 불려졌습니다.
우리가 내세울 것은 일류급 변호사도 아니요, 우리의 의는 더욱도 아닙니다.
재판정에 설 자격도 없는 우리가 구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죄 사하심입니다.
이 말도 안되는 재판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벌받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벌받기를 원하셨다면 재판 자체가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재판을 통해 무엇을 원하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교만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6-7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본절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요,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우리 기준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모습입니다.
당시 만연했던 이방종교들의 공통된 사상을 보여줍니다.
부와 물질의 신 바알을 통해 복받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이제 대상을 바꿔 하나님께 더욱 많은 헌금과 예물을 바쳐 똑같은 결과를 얻기 원했습니다.
히스기야왕의 아버지 아하스는 나라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맏아들을 몰락신에게 산채로 불태워 내주었습니다.
특히 7절의 죄를 씻기위해 자신의 몸을 칼과 못으로 자해하던 바알 숭배자들을 보게됩니다.
단지 많은 돈과 건강을 위한 일차적인 목적 뿐만 아니라 죄를 씻는 숭고한 목적이든 무슨 목적이건간에 자기 자신이 목적인 이방종교의 근본정신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자신이 최종 목적이기에 결국엔 남을 죽이고 남을 짓밣고 남을 빼앗는 것은 불가피한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 재판의 결론이요 궁극적인 목적은 이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
바로 이 둘 중 하나가 우리 인생 재판의 결과입니다.
평생 내가 원하는 것만 찾다가 허무하게 죽는 인생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을 찾다가 열매맺고 승리하는 인생이 있습니다.
이 시간, 내 건강, 내 행복, 내 명예, 내 자녀들의 형통함, 내 안전, 내 팔자 개선을 위해 이 자리에 오셨다면 이젠 그 모든 목표를 내려놔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을 새로운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땅에 오셔서 십자가을 지심으로 우리는 선한 것이 무엇인지 보게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선을 우리가 따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정의를 행한다는 능동적인 의지보다 불의와 불법이 만연한 현대사회에서 불의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수동적인 의지가 더 피부로 와닿는 시대입니다.
악한 조직의 일원이 되어 양심의 도전없이 악행에 가담하기 쉬운 시대입니다.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자기가 속한 조직, 공동체, 계층, 집단을 하나님의 기준으로 돌아보며 평가 진단하기를 항상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무조건적인 사랑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을 줄 이미 아시고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너무나 위험하고 무모한 행동입니다.
이웃사랑은 자기고향 우르를 떠나 목적지조차 없이 길을 나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순종과 같은 엄청난 도전입니다.
사랑의 댓가로 여러분도 예수님처럼 죽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으로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죽지않으려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결국엔 다 죽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사랑한 사람들은 죽어도 다시 살아납니다.
살려면 사랑하시고 죽으려면 사랑하지 마십시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겸손하게는 신중하게로 해석됩니다.
나의 인생이라고 내 마음대로 말하고 표현하고 행동하고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신중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존재를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여기 계신다라는 의식을 가지면 매사에 신중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말도 안되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면 우리는 한 번더 참을 수 있고 한 번 더 지혜로울 수 있습니다.
이렇게 8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기 원한다면 헌금이나 봉사가 아닌 우리의 삶을 바치시기 원합니다.
정의를 행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삶, 진정한 예배가 되는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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