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의 임재
페이지 정보
본문
사도행전 1:4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요엘서등 선지서들의 공통적인 주제는 이스라엘의 타락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회복하는데 이러한 변화는 이스라엘 스스로가 한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새로운 영을 그들에게 주심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내영을 그들에게 부어주리니,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내 영을 쏟았, 내 영을 줄터이니, 등등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영이 이스라엘에게 임하시는 역사적인 사건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50일 째 되는 날 사도행전 2장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1-13 을 교독하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성령을 성도들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임하시면서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변화" 였습니다.
갈릴리 어부들이 대부분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비겁하고 이기적이고 저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성령님을 받자 변화를 받았습니다.
먼저 지성의 변화입니다.
그들은 갈릴리 시골출신들로 전혀 외국어 교육을 받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시자마자 유창한 외국어를 구사하게되었습니다.
그날은 칠칠절 규례를 지키기위해 타국에 거주하던 이스라엘 교포들이 예루살렘에 왔다가 이 일을 보고 입이 벌어지도록 놀랐습니다.
12절에 그들이 다 놀라며 의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너무나 정확한 발음으로 온전한 외국어를 구사하는데 특히 갈릴리 시골출신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 그 놀라움은 더욱 컸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앙과 지성을 반대되는 개념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니 초등학교도 못가셨던 할머니 권사님이 글을 깨우치는 놀라운 역사를 많이 보았습니다.
세계 최고의 시험과 경쟁 속에 고통받는 우리나라 학생들과 취업준비생들이 성령님을 의지하는 놀라운 비결을 알지 못함이 너무나 아쉽습니다.
본문의 각국 외국어를 구사했던 제자들의 능력이 잠시 왔다가 사라진 것으로 짐작해서는 안됩니다.
이 후 그들은 유창한 외국어로 각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였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이들 중에서 가장 단순 무식한 자였으나 어려운 그리스어로 베드로 후서를 직접 쓰는 말하기 능력을 넘어 작문 실력까지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수한 사람을 좋아하시지만 그렇다고 무식한 사람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무식한 자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유식하게 변화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의 지식이 풍부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님을 구하십시오.
내 생각 내 능력만 믿고 아무리 노력해봐야 한계가 있습니다.
성령님의 놀라운 능력을 의지합시다.
두번째 성령님이 임하시자 나타난 변화는 세계관의 변화입니다.
다같이 14-21절을 교독하겠습니다.
베드로사도는 요엘서 2장을 예언을 언급하여 이의 성취를 선포하였습니다.
성령님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남녀노소의 차별이 없으며 주인과 종의 계급도 없고 나라와 나라의 국경이 없는 완전한 모든 육체입니다.
편협하고 지엽적인 시각이 세계를 넘어 우주적인 세계관으로 넓어진 것입니다.
성령님을 받으니 갈릴리 시골뜨기가 하늘과 땅을 논하며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진취적 기상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일생 땅만 보고 사는 사람과 하늘과 땅을 둘러보는 사람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이왕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큰 사람, 넓은 사람이 됩시다.
성령님을 구하십시오. 성령님이 임하시면 세계를 아니 우주를 얻게 됩니다.
세번째로 성령님이 임하시자 나타난 변화는 담대함입니다.
다같이 22-40절을 교독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시편 16장의 다윗의 예언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사망에 매이지 아니하시고 부활하심을 증거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 것이 죽음인데 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겁을 줄래야 줄 수도 없고 위협과 협박이 통하지도 않으니 해볼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믿는 사람들은 이미 한번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거듭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한낱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영으로 다시 태어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영화로운 육신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썩어질 육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죽을 수 밖에 없는 영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 육신의 죽음따위에 두려워하지 맙시다.
더욱 성령님께 의지함으로 담대하게 멋지게 남은 생명을 하나님을 위해 살아갑시다.
마지막으로 성령님이 임하시자 나타난 변화는 나눔 입니다.
다같이 42-47절을 교독하겠습니다.
갈릴리 시골뜨기들은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왔습니다.
하루하루가 아니라 한끼한끼가 당장의 고비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남에게 양보하고 내것을 내어준다는 것은 상상의 영역 그 밖에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남의 것을 탐하고 취하려고 호시탐탐 노렸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시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나누고 공유하고 양보하는 모습들이 마치 천국을 미리 본 듯하였습니다.
이에 믿지 않는 백성들조차 그들을 칭송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칭송은 커녕 비난의 중심이 되어버렸습니다.
당장 내 돈을 내놓고 손해보고 양보하는 것은 내 삶을 포기할 정도의 치명적인 도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임재를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는 변화받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성령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성령님의 충만한 임재를 구합시다. 아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