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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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2:11-15
2:11-15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시편 119:50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예레미야 15: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로마서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전세계적인 코로나 감염병으로인해 크나큰 고통 중에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말씀의 위로를 전합니다.
경제적으로 사업으로 학업으로 건강으로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어려움들이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우리의 기쁨이요 위로인 하나님의 말씀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수만가지 위로와 격려보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진짜 유일한 기쁨과 위로가 됨을 믿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이 어려움과 위기를 잘 극복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디모데전후서는 바울사도가 말년에 아들과 같은 제자 디모데에게 권면하는 내용의 서신서입니다.
바울사도는 제 1차 전도여행 중 갈라디아 지방 루스드라에서 그리이스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를 둔 청년 디모데를 만나게 됩니다.
그 때부터 디모데는 바울 사도와 함께 일거수 일투족 동행하며 함께 고난당하고 함께 투옥되기도 하는등 바울사도에게 아들보다 더한 영적인 아들이 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성경을 배웠고 온유하고 충성스러운 성품과 인품으로 바울사도에게 사랑하고 진실된 아들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에게도 약점이 있었으니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에 병약하기까지 하여 에베소 교회와 같은 거친 목회현장에서 여러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디모데에게 바울사도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여러가지 권면을하고 위로와 격려를 통해 어려움들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편지를 쓰게됩니다.
그래서 디모데전후서는 복음의 원리와 적용이라는 바울서신의 전형적인 구조를 가지지 않고있습니다.
대신 백여가지에 다르는 각종 권면들이 조목조목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복음의 원리보다는 목회현장에서의 실제적인 조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디모데전후서를 목회서신이라고 부릅니다.
목회서신이라고해서 복음의 원리 중심인 로마서나 에베소서 대비 그 가치가 덜하다거나 열등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디모데전후서는 복음의 원리가 어떻게 목회 현장에서 적용되어지는지 완벽한 해설과 안내서의 역할에 조금의 부족함이 없기에 성경 66권의 대체불가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1) 잘못된 해석의 예1. - 정신적 편의주의
다만 디모데전후서를 해석하고 적용할 때 기계적이고 문자적인 해석을 주의해야 합니다.
특히 논란이 되는 오늘의 본문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시대와 상황을 초월하는 복음의 원리는 당연히 있는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러나 권면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적용의 방식이 달라지기에 권면을 무조건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뚱딴지 같은 결과를 낳게 됩니다.
여러 권면들 속에서 일관되게 담겨있는 복음의 원리를 발견하고 그 복음의 원리를 오늘의 상황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가하는 고민의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몫이며 질문입니다.
목회서신서의 여러 권면들을 최종 결론으로 단정하고 글자 그대로 오늘날에 적용하려는 것은 그안에 담긴 복음의 원리는 방치한 채 깊은 생각과 고민없이 쉬운 길로만 가려는 몰이해적 편의주의적 시도입니다.
이를 정신적 편의주의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남녀의 평등을 부정하고, 여성의 목회활동을 금지하고, 과부의 나이를 60세 이상으로 정의하고, 출산을 해야 구원받는다는 바울사도의 권면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오늘날에도 절대적인 법칙으로 규정하는 것은 복음의 원리를 오히려 훼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 사도의 권면들이 내포하는 남녀노소의 평등과 약한 자의 생존권을 보호하는 복음의 원리를 발견한다면 여성의 목회를 무조건 금지한다거나, 출산은 절대적인 의무이며, 60세 이하의 과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조항들을 오늘날 어떻게 적용시켜야 하는 지 깊게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복음의 원리를 케리그마, 이러한 복음의 적용을 디다케라고 분류하여 구분합니다.
저도 이러한 분류가 올바른 접근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여러가지 법조항들이나 규정들을 눈과 머리로만 접근하고 외우려고하지 그 안에 담긴 정신과 목적에 정작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목회서신과 같은 여러 권면들이 제시되는 구절들을 기계적으로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적용하려하다가 그 근본 정신을 놓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후서를 통해 여러 바울의 권면들을 그냥 이래야 하나보다 막연히 여기고 생각없이 읽어간다면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며 그 진가를 발견하지 못하게 됩니다.
2) 잘못된 해석 2. - 행동적 편의주의
그러나 바울 사도의 권면들은 복음에서 나온 것이니 복음보다 열등하다고 간주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1:11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엄연히 바울 사도의 권면, 즉 교훈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으로 부터 나온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디모데전후서의 바울 사도의 권면들은 철저히 복음의 원리를 기반으로 해석해야 하며 섣불리 옛시대의 낡은 조항들로 치부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문자적인 적용으로인해 오히려 복음의 원리가 심각하게 훼손되는 경우 철저한 고민과 기도와 연구로 오늘날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되 그 변경을 최소화하는 조심성있는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인간의 악한 죄성은 또 얼마든지 바울 사도의 권면들을 복음으로 재해석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다수의 입맛과 기호에 맞춰 이리고치고 저리고칠 가능성이 아주 크기 때문입니다.
이를 정신적 편의주의에 대한 반대의 극단으로 행동적 편의주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본문에 대한 완벽하고도 절대적인 결론을 가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해석에 있어서의 양극단, 정신적 편의주의와 행동적 편의주의 두 측면을 항상 고려하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합니다.
:11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12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의해 여성 목회자를 인정하는 감리교단 장로교단 통합, 또는 반대하는 장로교 합동, 및 고신 등으로 교단의 입장들이 갈리울 정도로 매우 난해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들을 아무 생각없이 그냥 쓰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 아니냐라는 정신적 편의주의방식은 정말 무책임한 것입니다.
특이 이런 주장을 남자가 한다면 정말 악한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남성우월이나 여성열등을 대변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그 당시 여성신을 숭배하던 그리이스 문화와 또한 여성이 대부분이었던 초대교회의 구조, 그리고 여성들끼리의 알력싸움등은 초대교회의 크나큰 어려움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여건 속에서 바울사도의 강경한 권면은 최선의 선택이었으며, 바울사도 또한 그 선택을 놓고 엄청난 기도와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남성우월자가 아닌 결정적인 증거도 있습니다.
똑같은 여성 사역자이지만 로마서 16장의 겐그레아 교회의 뵈뵈는 바울이 인정한 사역자였습니다.
그렇다고 본문을 무조건 부정하여 여성 목회자를 무조건 인정하고 여성의 목소리를 인정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13-14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바울 사도의 여성 목회자 반대는 당시 그리이스의 상황 만이 유일한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하와가 뱀으로 가장한 사단에 속아 선악과를 먹은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바울 사도의 여성 목회자 반대와 남녀 평등 반대에는 이러한 분명한 사실을 근거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냉철함은 목회자로서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입니다.
사람과의 인정이나 관계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중심으로하려면 냉철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선포해야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로 인해 누군가 상처받고 기분 상할 수도 있기에 진리를 선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냉철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목회자의 필수요소입니다.
그런면에서 여성 목회자는 여성으로서의 장점이자 단점인 정에 이끌리는 공감능력, 관계성을 오히려 절제하고 언제나 냉철함을 유지해야하는 책음을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본문은 여성의 출산의 의무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여성은 출산으로 구원을 받는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의 글을 쓴 동일한 사람 바울은 갈라디아서 1:7절을 통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복음은 오직 하나이며 다른 복음은 없다고 단언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서, 고린도전후서를 비롯, 많은 구절들이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고 반복 확인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한 구절만 따로 떼어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완전히 뚱딴지로 빠지게 되는 난해한 구절들이 있습니다.
베드로사도가 바울사도의 서신 중 해석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으니 이것들을 억지로 풀다가 멸망한 자들이 있다고 베드로후서 3장에서 언급했는데 본 절이 그 중에 하나입니다.
성경은 반드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구절만 떼어서 결론지어서는 안되며 성경 전체의 내용과 비교하여 검토되어야 합니다.
본문 15절 출산에 관한 내용은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때 당시 만연했던 영지주의라는 이단은 영혼과 육체를 철저히 구분하여 영혼은 선하고 거룩하며 육체는 악하고 더럽다고 주장하여 일체의 육체적 행위, 성과 출산을 금하였습니다.
이로써 가정이 깨지고 부부가 갈라지는 등 각종 부작용들이 생겼으며 이러한 문제들은 심지어 디모데가 사역하던 에베소교회에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바울사도는 온전한 부부관계와 건강한 가족이 신자의 구원 여정에서 가지는 절대적인 중요성, 특히 출산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비록 출산 자체가 구원의 수단은 아니지만 건강한 가족을 이루는 필수요소이며 건강한 가정은 신자의 구원에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그 어느때보다 본문 15절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하는 시대입니다.
출산과 육아의 어려움은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너무나 큰 고통입니다.
그러나 이를 기피하는 풍조가 너무나 만연하여 사회의 근간이 무너지고 심지어 동성들끼리 결혼한답시고 가정의 혜택을 요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출산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지만 구원에 절대적인 도움이 되며 사회와 가정을 이루는 기초요 근간이기에 구원과 연결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결론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남녀평등과 여성 목회자 안수 및 출산의 의무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며 철저한 검증과 깊은 기도를 요구하는 난해한 문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말씀은 이렇게 쉽지많은 않습니다.
아니 오늘 본문처럼 난해한 구절들도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깊은 생각과 고민없이 단지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정신적 편의주의를 조심해야 하며,
복음의 원리가 아닌 자신의 편의와 다수의 입장을 우선하여 함부로 성경의 내용을 바꾸는 행동적 편의주의 또한 경계해야 합니다.
성경은 비록 어렵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경을 해석하는 권리와 책임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권리와 책임은 결코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으며 오직 자기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처럼 함부로 풀다가 멸망하는 일이 없도록 교회는 가르치는 일에 더욱 매진해야하며 성도들은 더욱 힘써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이만희처럼 수준 낮은 성경해석이 시원간단하다고 추종하는 무리들에게는 멸망이 있을 뿐입니다.
성도 한사람 한사람 신구약 66권 진리의 말씀을 온전히 읽고 배워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의 원리에서 벗어나는 너무 쉽거나 너무 편한 곁길로 빠지지 않게 됩니다.
그런 말씀의 반석위에 깊고 굳게 뿌리내린 성도들이 가득한 준비된 엘림전원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2:11-15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시편 119:50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예레미야 15: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로마서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전세계적인 코로나 감염병으로인해 크나큰 고통 중에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말씀의 위로를 전합니다.
경제적으로 사업으로 학업으로 건강으로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어려움들이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우리의 기쁨이요 위로인 하나님의 말씀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수만가지 위로와 격려보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진짜 유일한 기쁨과 위로가 됨을 믿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이 어려움과 위기를 잘 극복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디모데전후서는 바울사도가 말년에 아들과 같은 제자 디모데에게 권면하는 내용의 서신서입니다.
바울사도는 제 1차 전도여행 중 갈라디아 지방 루스드라에서 그리이스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를 둔 청년 디모데를 만나게 됩니다.
그 때부터 디모데는 바울 사도와 함께 일거수 일투족 동행하며 함께 고난당하고 함께 투옥되기도 하는등 바울사도에게 아들보다 더한 영적인 아들이 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성경을 배웠고 온유하고 충성스러운 성품과 인품으로 바울사도에게 사랑하고 진실된 아들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에게도 약점이 있었으니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에 병약하기까지 하여 에베소 교회와 같은 거친 목회현장에서 여러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디모데에게 바울사도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여러가지 권면을하고 위로와 격려를 통해 어려움들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편지를 쓰게됩니다.
그래서 디모데전후서는 복음의 원리와 적용이라는 바울서신의 전형적인 구조를 가지지 않고있습니다.
대신 백여가지에 다르는 각종 권면들이 조목조목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복음의 원리보다는 목회현장에서의 실제적인 조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디모데전후서를 목회서신이라고 부릅니다.
목회서신이라고해서 복음의 원리 중심인 로마서나 에베소서 대비 그 가치가 덜하다거나 열등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디모데전후서는 복음의 원리가 어떻게 목회 현장에서 적용되어지는지 완벽한 해설과 안내서의 역할에 조금의 부족함이 없기에 성경 66권의 대체불가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1) 잘못된 해석의 예1. - 정신적 편의주의
다만 디모데전후서를 해석하고 적용할 때 기계적이고 문자적인 해석을 주의해야 합니다.
특히 논란이 되는 오늘의 본문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시대와 상황을 초월하는 복음의 원리는 당연히 있는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러나 권면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적용의 방식이 달라지기에 권면을 무조건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뚱딴지 같은 결과를 낳게 됩니다.
여러 권면들 속에서 일관되게 담겨있는 복음의 원리를 발견하고 그 복음의 원리를 오늘의 상황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가하는 고민의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몫이며 질문입니다.
목회서신서의 여러 권면들을 최종 결론으로 단정하고 글자 그대로 오늘날에 적용하려는 것은 그안에 담긴 복음의 원리는 방치한 채 깊은 생각과 고민없이 쉬운 길로만 가려는 몰이해적 편의주의적 시도입니다.
이를 정신적 편의주의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남녀의 평등을 부정하고, 여성의 목회활동을 금지하고, 과부의 나이를 60세 이상으로 정의하고, 출산을 해야 구원받는다는 바울사도의 권면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오늘날에도 절대적인 법칙으로 규정하는 것은 복음의 원리를 오히려 훼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 사도의 권면들이 내포하는 남녀노소의 평등과 약한 자의 생존권을 보호하는 복음의 원리를 발견한다면 여성의 목회를 무조건 금지한다거나, 출산은 절대적인 의무이며, 60세 이하의 과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조항들을 오늘날 어떻게 적용시켜야 하는 지 깊게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복음의 원리를 케리그마, 이러한 복음의 적용을 디다케라고 분류하여 구분합니다.
저도 이러한 분류가 올바른 접근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여러가지 법조항들이나 규정들을 눈과 머리로만 접근하고 외우려고하지 그 안에 담긴 정신과 목적에 정작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목회서신과 같은 여러 권면들이 제시되는 구절들을 기계적으로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적용하려하다가 그 근본 정신을 놓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후서를 통해 여러 바울의 권면들을 그냥 이래야 하나보다 막연히 여기고 생각없이 읽어간다면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며 그 진가를 발견하지 못하게 됩니다.
2) 잘못된 해석 2. - 행동적 편의주의
그러나 바울 사도의 권면들은 복음에서 나온 것이니 복음보다 열등하다고 간주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1:11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엄연히 바울 사도의 권면, 즉 교훈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으로 부터 나온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디모데전후서의 바울 사도의 권면들은 철저히 복음의 원리를 기반으로 해석해야 하며 섣불리 옛시대의 낡은 조항들로 치부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문자적인 적용으로인해 오히려 복음의 원리가 심각하게 훼손되는 경우 철저한 고민과 기도와 연구로 오늘날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되 그 변경을 최소화하는 조심성있는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인간의 악한 죄성은 또 얼마든지 바울 사도의 권면들을 복음으로 재해석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다수의 입맛과 기호에 맞춰 이리고치고 저리고칠 가능성이 아주 크기 때문입니다.
이를 정신적 편의주의에 대한 반대의 극단으로 행동적 편의주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본문에 대한 완벽하고도 절대적인 결론을 가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해석에 있어서의 양극단, 정신적 편의주의와 행동적 편의주의 두 측면을 항상 고려하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합니다.
:11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12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의해 여성 목회자를 인정하는 감리교단 장로교단 통합, 또는 반대하는 장로교 합동, 및 고신 등으로 교단의 입장들이 갈리울 정도로 매우 난해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들을 아무 생각없이 그냥 쓰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 아니냐라는 정신적 편의주의방식은 정말 무책임한 것입니다.
특이 이런 주장을 남자가 한다면 정말 악한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남성우월이나 여성열등을 대변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그 당시 여성신을 숭배하던 그리이스 문화와 또한 여성이 대부분이었던 초대교회의 구조, 그리고 여성들끼리의 알력싸움등은 초대교회의 크나큰 어려움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여건 속에서 바울사도의 강경한 권면은 최선의 선택이었으며, 바울사도 또한 그 선택을 놓고 엄청난 기도와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남성우월자가 아닌 결정적인 증거도 있습니다.
똑같은 여성 사역자이지만 로마서 16장의 겐그레아 교회의 뵈뵈는 바울이 인정한 사역자였습니다.
그렇다고 본문을 무조건 부정하여 여성 목회자를 무조건 인정하고 여성의 목소리를 인정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13-14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바울 사도의 여성 목회자 반대는 당시 그리이스의 상황 만이 유일한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하와가 뱀으로 가장한 사단에 속아 선악과를 먹은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바울 사도의 여성 목회자 반대와 남녀 평등 반대에는 이러한 분명한 사실을 근거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냉철함은 목회자로서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입니다.
사람과의 인정이나 관계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중심으로하려면 냉철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선포해야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로 인해 누군가 상처받고 기분 상할 수도 있기에 진리를 선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냉철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목회자의 필수요소입니다.
그런면에서 여성 목회자는 여성으로서의 장점이자 단점인 정에 이끌리는 공감능력, 관계성을 오히려 절제하고 언제나 냉철함을 유지해야하는 책음을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본문은 여성의 출산의 의무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여성은 출산으로 구원을 받는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의 글을 쓴 동일한 사람 바울은 갈라디아서 1:7절을 통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복음은 오직 하나이며 다른 복음은 없다고 단언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서, 고린도전후서를 비롯, 많은 구절들이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고 반복 확인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한 구절만 따로 떼어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완전히 뚱딴지로 빠지게 되는 난해한 구절들이 있습니다.
베드로사도가 바울사도의 서신 중 해석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으니 이것들을 억지로 풀다가 멸망한 자들이 있다고 베드로후서 3장에서 언급했는데 본 절이 그 중에 하나입니다.
성경은 반드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구절만 떼어서 결론지어서는 안되며 성경 전체의 내용과 비교하여 검토되어야 합니다.
본문 15절 출산에 관한 내용은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때 당시 만연했던 영지주의라는 이단은 영혼과 육체를 철저히 구분하여 영혼은 선하고 거룩하며 육체는 악하고 더럽다고 주장하여 일체의 육체적 행위, 성과 출산을 금하였습니다.
이로써 가정이 깨지고 부부가 갈라지는 등 각종 부작용들이 생겼으며 이러한 문제들은 심지어 디모데가 사역하던 에베소교회에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바울사도는 온전한 부부관계와 건강한 가족이 신자의 구원 여정에서 가지는 절대적인 중요성, 특히 출산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비록 출산 자체가 구원의 수단은 아니지만 건강한 가족을 이루는 필수요소이며 건강한 가정은 신자의 구원에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그 어느때보다 본문 15절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하는 시대입니다.
출산과 육아의 어려움은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너무나 큰 고통입니다.
그러나 이를 기피하는 풍조가 너무나 만연하여 사회의 근간이 무너지고 심지어 동성들끼리 결혼한답시고 가정의 혜택을 요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출산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지만 구원에 절대적인 도움이 되며 사회와 가정을 이루는 기초요 근간이기에 구원과 연결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결론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남녀평등과 여성 목회자 안수 및 출산의 의무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며 철저한 검증과 깊은 기도를 요구하는 난해한 문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말씀은 이렇게 쉽지많은 않습니다.
아니 오늘 본문처럼 난해한 구절들도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깊은 생각과 고민없이 단지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정신적 편의주의를 조심해야 하며,
복음의 원리가 아닌 자신의 편의와 다수의 입장을 우선하여 함부로 성경의 내용을 바꾸는 행동적 편의주의 또한 경계해야 합니다.
성경은 비록 어렵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경을 해석하는 권리와 책임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권리와 책임은 결코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으며 오직 자기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처럼 함부로 풀다가 멸망하는 일이 없도록 교회는 가르치는 일에 더욱 매진해야하며 성도들은 더욱 힘써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이만희처럼 수준 낮은 성경해석이 시원간단하다고 추종하는 무리들에게는 멸망이 있을 뿐입니다.
성도 한사람 한사람 신구약 66권 진리의 말씀을 온전히 읽고 배워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의 원리에서 벗어나는 너무 쉽거나 너무 편한 곁길로 빠지지 않게 됩니다.
그런 말씀의 반석위에 깊고 굳게 뿌리내린 성도들이 가득한 준비된 엘림전원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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