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와 상징을 사용하시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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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4: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하나님께서 기왕 우리의 미래를 알려주시기 원하신다면 요한계시록을 비유와 상징 대신 구체적인 사실로 기록하셨다면 어땠을까요?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외에 비유와 상징을 사용하신 적은 여러번 있습니다.
사무엘하 12장에 밧세바와 간음을하고 밧세바의 남편인 충직한 신하 우리아의 살해를 교사한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나단 선지자에게 다윗의 죄를 바로 지적하게 하지않으시고 그 대신 부자와 가난한 자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수많은 양을 거느린 부자가 자신의 손님을 대접하기위해 가난한 자가 가족처럼 여기는 단 한마리의 양을 강탈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비유를 통해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되고 그 즉시 회개하였습니다.
또한 마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은 오직 비유로만 말씀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에 걸쳐 드라크마의 비유, 열 처녀의 비유, 탕자의 비유 등등 여러 비유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비유와 상징을 사용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신구약의 모든 비유와 상징들을 돌아보면 그 들이 전하고자하는 메세지는 너무나 단순한 진리, 즉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이다라는 복음 그 하나였습니다.
문제는 복음이라는 그 단순한 진리를 사람들은 모르면서도 알려고도 듣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에는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복음을 알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까요?
복음이 어렵고 복잡한가요?
너무나 짧고도 쉽습니다.
복잡한 이해나 계산이 필요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구원이시다라는 사실 하나 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복음을 한쪽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보냅니다.
물론 한 번만 들어도 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정보'라고 합니다.
오늘의 날씨를 듣고 한달 내내 기억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의 날씨는 오늘이 지나면 끝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복음은 '정보'가 아닙니다.
복음을 한 번 듣기만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 복음은 우리의 고정관념의 붕괴를 수반합니다.
앞서 언급한 다윗왕의 케이스로 돌아가 봅시다.
다윗왕은 나단 선지자의 비유를 통해 한마디로 허를 찔렸습니다.
그 비유를 듣기 전엔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하나님께서 이미 다 보고 계셨다는 사실을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들통나지 않은 죄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착각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의 비유를 통해 다윗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다윗을 어떻게 보실 것인가 말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는 대표적인 역발상의 한 사례입니다.
비유는 이렇게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거꾸로 뒤집는 역할을 합니다.
고정관념은 예외없이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으며 이는 객관적인 진리를 인식하는 최대의 장애물입니다.
혹시 내가 틀렸을 수 있겠구나,
내가 잘못한 거였구나,
내가 교만했구나,
내가 나만 생각했구나,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구나,
이러한 사실들을 인식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스스로의 힘으로 고정관념을 깨뜨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거대하고도 단단한 고정관념이라는 벽은 남이 쌓아올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세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생각해본적없는 '내가 죄인이구나' 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고정관념의 붕괴가 있어야 합니다.
아니, 한 발 더 나아가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었구나' 라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자체가 하나의 역발상입니다.
마태복음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살려고하면 죽고 오히려 죽으면 살게된다는 발상은 인간 스스로의 영역에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죽음과 삶에 대한 자신의 정의가 완전히 바꾸어져야함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비유와 상징을 통해 우리의 고정관념을 거꾸로 뒤집어 놓으시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는데 비유와 상징들을 동원하신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복음의 걸림돌이 되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리시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에서 비유와 상징을 쏙 빼고 구체적인 사실들만 기록하셨다면 사람들은 그대로 믿을까요?
하나님께서 몇년도 몇일 몇시에 이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시면 사람들이 정신차리고 제대로 하나님을 믿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던 많은 종말론 이단들로 인해 가정과 사회가 많은 혼란과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사람들은 회개하고 반성하기는 커녕 더욱 막나가고 더욱 이기적이 되었음은 그간의 역사가 증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시고자하는 메세지는 딱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시요 구원이시다라는 것입니다.
22:1-5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요한계시록의 결말인 본문이 말하고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생명수가 무엇이묘, 생명나무가 무엇을 뜻하는지, 왜 열두 가지인지 알아야만 하는 걸까요?
굳이 이런 것들을 알지 못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생명이시요, 생명이 예수님이신 것을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그 단순한 진리를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므로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집으시기 위해 비유와 상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 우리의 바윗돌같은 고정관념이 깨지기를 기도합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왕이시며 생명의 구원자이심을 머리로는 알고 귀로는 들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이래 최강 로마제국의 위세에 짖눌려 복음의 진리는 잊어버린 채 세상 사람들과 구별됨없이 치고받고 속고 속이며 믿음과 삶이 동떨어진 초대교회 성도들의 고정관념은 여전히 우리의 모습에서 너무나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돈이 하나님이고 돈이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절대적인 고정관념 속에 파묻혀 있으면서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돈이뭐라고 갑 앞에서 고양이 앞의 쥐처럼 벌벌 떨다가 어느새 갑질의 당사자가 되는 집단성 인격장애의 전형적인 사례가 되어버립니다.
반푼도 안되는 자존심이 뭐가 대단하다고 성내고 싸우고 미워하는 초라한 패배자가 되었습니다.
차지도 덥지도 않으면서 적당히 신앙생활하면서 적당히 천국가겠지라는 고정관념을 구원의 확신이라고 부르며 아무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매달 빚갚느라 아이들 학원비 대느라, 부모님 병원비 내느라 허덕이는 삶에 갇힌 인생의 소망과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체념들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말세적 고정관념들을 통째로 뒤집는 비유와 상징들로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단을 결박하시고 미천한 나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시고 세상을 다스리는 권능을 주셨음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인생의 의미와 소망을 잊어버린 사람들에게 요한계시록은 비유와 상징을 통해 이 땅과 하나님의 나라의 실체를 깨닫게 합니다.
결론)
1) 상징의 의도와 주제는 하나다.
22:18-19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성경의 로마서, 에베소서, 히브리서를 비롯한 교리서들은 비유와 상징이 극히 적으며 어느 정도 복음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깊고 심층적인 메세지를 전달합니다.
이에반해 성경의 예언서나 선지서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많은 비유와 상징을 동원하며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에 동조적인 사람들보다는 복음에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단단한 고정관념에 대응하고자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언서와 선지서를 기록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많은 핍박을 당하며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오늘날 자신이 예언자다 선지자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호화롭게 사는지 말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은 왕이시요 구원자시다'라는 성경말씀을 이리 꼬고 저리 꿰어 별의 별 황당한 교리를 만들어내어 많은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 놓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언서로서 많은 비유나 상징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를 해석할 때 반드시 본문이 전하고자하는 전체 주제를 염두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왕이시요 생명의 구원자이십니다.
이것만이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전하고자하는 바입니다.
2) 상징을 통해 또 다른 주제를 확장 파생하지 말라!
요한계시록은 하나의 주제 즉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시다' 라는 단순한 진리를 드라마틱한 상징을 통해 나타냅니다.
비유와 상징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는 역발상의 수단이지만 동시에 귀에 붇이면 귀걸이 코에 붙이면 코걸이 식의 남오용의 위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이단들이 요한계시록의 상징들의 의도는 무시한 채 이러한 상징들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억측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신천지 이만희는 요한계시록의 상징들을 이용하여 자기가 요한계시록 2장의
'이기는 자' 라고 억지로 꿰어 맞춥니다.
제칠일 안식교는 요한계시록 13장의 짐승이 일요일을 주일로 하는 정통교회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토요일 예배가 하나님의 인치심을 상징한다는 억측을 내세웁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통해 또 다른 추가적인 주제를 파생해서는 안됩니다.
비유와 상징의 의도를 반드시 파악하고 거기에서 멈추어야 합니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주장을 상징에 끼워 맞추는 행위를 경계해야합니다.
3) 읽는 목적도 하나
요한계시록은 추리소설이나 실용서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다른 사람들의 흥미와 관심을 유발하는 특별한 비밀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환난을 피할 비결이나, 천국에 편히가는 방법을 푸는 비결따위는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이익이나 도움이 되는 특별한 비밀을 바라는 것 또한 고정관념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가장 단순하면서 익히 알고 있는 주제, 예수 그리스도라는 비밀을 말할 뿐입니다.
유일한 그리고 가장 큰 비밀은 세상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는 복음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읽음으로 무슨 특별한 비밀을 발견하고자하는 의도는 내려놓아야 합니다.
어차피 최고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시요, 최고의 기적은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단순한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상징을 통해 세상의 거대한 권력 앞에 굴복해가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부수고자 하십니다.
상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시다' 라는 가장 큰 비밀을 말씀하십니다.
고정관념을 깨뜨리시고 이 진리를 온전히 믿고 삶 속에서 온전히 이 진리를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하나님께서 기왕 우리의 미래를 알려주시기 원하신다면 요한계시록을 비유와 상징 대신 구체적인 사실로 기록하셨다면 어땠을까요?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외에 비유와 상징을 사용하신 적은 여러번 있습니다.
사무엘하 12장에 밧세바와 간음을하고 밧세바의 남편인 충직한 신하 우리아의 살해를 교사한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나단 선지자에게 다윗의 죄를 바로 지적하게 하지않으시고 그 대신 부자와 가난한 자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수많은 양을 거느린 부자가 자신의 손님을 대접하기위해 가난한 자가 가족처럼 여기는 단 한마리의 양을 강탈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비유를 통해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되고 그 즉시 회개하였습니다.
또한 마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은 오직 비유로만 말씀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에 걸쳐 드라크마의 비유, 열 처녀의 비유, 탕자의 비유 등등 여러 비유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비유와 상징을 사용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신구약의 모든 비유와 상징들을 돌아보면 그 들이 전하고자하는 메세지는 너무나 단순한 진리, 즉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이다라는 복음 그 하나였습니다.
문제는 복음이라는 그 단순한 진리를 사람들은 모르면서도 알려고도 듣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에는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복음을 알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까요?
복음이 어렵고 복잡한가요?
너무나 짧고도 쉽습니다.
복잡한 이해나 계산이 필요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구원이시다라는 사실 하나 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복음을 한쪽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보냅니다.
물론 한 번만 들어도 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정보'라고 합니다.
오늘의 날씨를 듣고 한달 내내 기억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의 날씨는 오늘이 지나면 끝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복음은 '정보'가 아닙니다.
복음을 한 번 듣기만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 복음은 우리의 고정관념의 붕괴를 수반합니다.
앞서 언급한 다윗왕의 케이스로 돌아가 봅시다.
다윗왕은 나단 선지자의 비유를 통해 한마디로 허를 찔렸습니다.
그 비유를 듣기 전엔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하나님께서 이미 다 보고 계셨다는 사실을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들통나지 않은 죄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착각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의 비유를 통해 다윗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다윗을 어떻게 보실 것인가 말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는 대표적인 역발상의 한 사례입니다.
비유는 이렇게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거꾸로 뒤집는 역할을 합니다.
고정관념은 예외없이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으며 이는 객관적인 진리를 인식하는 최대의 장애물입니다.
혹시 내가 틀렸을 수 있겠구나,
내가 잘못한 거였구나,
내가 교만했구나,
내가 나만 생각했구나,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구나,
이러한 사실들을 인식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스스로의 힘으로 고정관념을 깨뜨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거대하고도 단단한 고정관념이라는 벽은 남이 쌓아올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세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생각해본적없는 '내가 죄인이구나' 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고정관념의 붕괴가 있어야 합니다.
아니, 한 발 더 나아가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었구나' 라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자체가 하나의 역발상입니다.
마태복음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살려고하면 죽고 오히려 죽으면 살게된다는 발상은 인간 스스로의 영역에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죽음과 삶에 대한 자신의 정의가 완전히 바꾸어져야함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비유와 상징을 통해 우리의 고정관념을 거꾸로 뒤집어 놓으시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는데 비유와 상징들을 동원하신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복음의 걸림돌이 되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리시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에서 비유와 상징을 쏙 빼고 구체적인 사실들만 기록하셨다면 사람들은 그대로 믿을까요?
하나님께서 몇년도 몇일 몇시에 이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시면 사람들이 정신차리고 제대로 하나님을 믿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던 많은 종말론 이단들로 인해 가정과 사회가 많은 혼란과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사람들은 회개하고 반성하기는 커녕 더욱 막나가고 더욱 이기적이 되었음은 그간의 역사가 증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시고자하는 메세지는 딱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시요 구원이시다라는 것입니다.
22:1-5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요한계시록의 결말인 본문이 말하고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생명수가 무엇이묘, 생명나무가 무엇을 뜻하는지, 왜 열두 가지인지 알아야만 하는 걸까요?
굳이 이런 것들을 알지 못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생명이시요, 생명이 예수님이신 것을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그 단순한 진리를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므로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집으시기 위해 비유와 상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 우리의 바윗돌같은 고정관념이 깨지기를 기도합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왕이시며 생명의 구원자이심을 머리로는 알고 귀로는 들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이래 최강 로마제국의 위세에 짖눌려 복음의 진리는 잊어버린 채 세상 사람들과 구별됨없이 치고받고 속고 속이며 믿음과 삶이 동떨어진 초대교회 성도들의 고정관념은 여전히 우리의 모습에서 너무나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돈이 하나님이고 돈이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절대적인 고정관념 속에 파묻혀 있으면서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돈이뭐라고 갑 앞에서 고양이 앞의 쥐처럼 벌벌 떨다가 어느새 갑질의 당사자가 되는 집단성 인격장애의 전형적인 사례가 되어버립니다.
반푼도 안되는 자존심이 뭐가 대단하다고 성내고 싸우고 미워하는 초라한 패배자가 되었습니다.
차지도 덥지도 않으면서 적당히 신앙생활하면서 적당히 천국가겠지라는 고정관념을 구원의 확신이라고 부르며 아무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매달 빚갚느라 아이들 학원비 대느라, 부모님 병원비 내느라 허덕이는 삶에 갇힌 인생의 소망과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체념들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말세적 고정관념들을 통째로 뒤집는 비유와 상징들로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단을 결박하시고 미천한 나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시고 세상을 다스리는 권능을 주셨음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인생의 의미와 소망을 잊어버린 사람들에게 요한계시록은 비유와 상징을 통해 이 땅과 하나님의 나라의 실체를 깨닫게 합니다.
결론)
1) 상징의 의도와 주제는 하나다.
22:18-19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성경의 로마서, 에베소서, 히브리서를 비롯한 교리서들은 비유와 상징이 극히 적으며 어느 정도 복음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깊고 심층적인 메세지를 전달합니다.
이에반해 성경의 예언서나 선지서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많은 비유와 상징을 동원하며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에 동조적인 사람들보다는 복음에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단단한 고정관념에 대응하고자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언서와 선지서를 기록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많은 핍박을 당하며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오늘날 자신이 예언자다 선지자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호화롭게 사는지 말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은 왕이시요 구원자시다'라는 성경말씀을 이리 꼬고 저리 꿰어 별의 별 황당한 교리를 만들어내어 많은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 놓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언서로서 많은 비유나 상징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를 해석할 때 반드시 본문이 전하고자하는 전체 주제를 염두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왕이시요 생명의 구원자이십니다.
이것만이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전하고자하는 바입니다.
2) 상징을 통해 또 다른 주제를 확장 파생하지 말라!
요한계시록은 하나의 주제 즉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시다' 라는 단순한 진리를 드라마틱한 상징을 통해 나타냅니다.
비유와 상징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는 역발상의 수단이지만 동시에 귀에 붇이면 귀걸이 코에 붙이면 코걸이 식의 남오용의 위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이단들이 요한계시록의 상징들의 의도는 무시한 채 이러한 상징들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억측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신천지 이만희는 요한계시록의 상징들을 이용하여 자기가 요한계시록 2장의
'이기는 자' 라고 억지로 꿰어 맞춥니다.
제칠일 안식교는 요한계시록 13장의 짐승이 일요일을 주일로 하는 정통교회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토요일 예배가 하나님의 인치심을 상징한다는 억측을 내세웁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통해 또 다른 추가적인 주제를 파생해서는 안됩니다.
비유와 상징의 의도를 반드시 파악하고 거기에서 멈추어야 합니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주장을 상징에 끼워 맞추는 행위를 경계해야합니다.
3) 읽는 목적도 하나
요한계시록은 추리소설이나 실용서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다른 사람들의 흥미와 관심을 유발하는 특별한 비밀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환난을 피할 비결이나, 천국에 편히가는 방법을 푸는 비결따위는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이익이나 도움이 되는 특별한 비밀을 바라는 것 또한 고정관념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가장 단순하면서 익히 알고 있는 주제, 예수 그리스도라는 비밀을 말할 뿐입니다.
유일한 그리고 가장 큰 비밀은 세상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는 복음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읽음으로 무슨 특별한 비밀을 발견하고자하는 의도는 내려놓아야 합니다.
어차피 최고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시요, 최고의 기적은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단순한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상징을 통해 세상의 거대한 권력 앞에 굴복해가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부수고자 하십니다.
상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시다' 라는 가장 큰 비밀을 말씀하십니다.
고정관념을 깨뜨리시고 이 진리를 온전히 믿고 삶 속에서 온전히 이 진리를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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