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오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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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1-3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1) 속도냐 방향이냐?
바램과 소망이 없는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저마다 무엇인가를 바라고 소망하기에 인생은 원동력을 얻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각자가 원하는 것을 얻기위해 동분서주하며 이리뛰고 저리뛰고 있습니다.
뛰면 뛸 수록 달리면 달릴 수록 내가 원하는 것이 더 멀어지는 것 같고 나이는 점점 들어 몸이 무거워질수록 마음은 더 조급해집니다.
더구나 옆 사람들은 나보다 더 빨리 달리자 뒤쳐지기시작하니 더욱 불안합니다.
일단 일등은 둘째치고 꼴등이라도 면하자고 열심히 달리긴 달렸는데 가만보니 제자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 9:26 에서 달음질하기를 향방없는 것 같이 아니하라고 교훈하였습니다.
달리는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달리는 방향입니다.
방향이 명확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달리든지 아니면 포기하고 주저앉을 수 밖에 없습니다.
방향을 모르는데 열심히 달린들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방향을 모르는데 열심히 달릴 의지가 있을리 만무합니다.
인생의 성패는 열심과 최선에 의해서가아니라 방향을 아는가 모르는가에 달려있습니다.
평균수명 80년이라고 가정할 때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는데 8분의 시간조차 투자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입니다.
2) 방향의 자격 - 영원한 것, 선한 것, 실체적인 것
이렇게 중요한 것이 인생의 방향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방향을 찾아야 할까요?
먼저 인생의 방향은 영원해야 합니다.
돈, 명예, 권력, 쾌락, 부귀 영화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영원하지가 않습니다.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신기루와 같은 것에 인생의 방향을 두면 우리의 인생또한 허망하게 사라지고 말게 됩니다.
두 번째 인생의 방향은 선해야 합니다.
인생의 목표는 인생의 질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어디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갈리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인생의 방향은 실체적이어야 합니다.
허상이나 허영은 인생의 방향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무지개를 쫓는 제자리 걸음이 아닙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무에서 유로, 공허에서 충만으로 분명한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정리하자면 인생의 방향은 영원해야하고 선해야하고 실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하고 또한 선하고 실체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사랑, 평화, 희생, 겸손, 진실, 등등 여러 가지 것들이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하나로 싹 정리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남습니다.
하나님만이 영원하시고 선하시고 실체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방향은 오직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3) 믿음 - 인간의 행위 중 유일하게 남는 것
그리고 히브리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인생의 방향을 흔들림없이 고정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본문의 '실상' 이라는 어려운 말이 나오는데 '본질'이라고 번역해도 됩니다.
물론 '본질'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실체' 또는 '실존' 이라고하면 될 듯 하지만 이또한 어렵습니다.
아무튼 최대한 쉽게 표현하자면 만져지고 소멸되지 않고 살아있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생각해봅시다.
놀랍게도 우리 인생의 대부분의 행위들이 아무리 거창하고 대단해보여도 결국은 허무하고 의미없는 것들입니다.
기껏 땀흘리고 일하고 고생했더니 이윤을 남기기는 커녕 본전만 가까스로 보전하는 일은 누구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한마디로 '남는게 없는 장사' 라는 겁니다.
즉 실상이 없는 의미없는 행위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이에반해 우리 인간의 행위 중에서 유일하게 만져지고 소멸되지 않고 살아있고 존재하는 행위가 단 하나있습니다.
오직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만이 영원하시고 선하시고 실체적이시므로 하나님을 믿는 것만이 우리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실체적인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4) 믿음 - 말씀으로 오조준하라!
11:1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사람들은 세상이 만들어진 것을 현상으로 분석하고 설명하려고 합니다.
암석의 지층을 분석하고 대기와 해양을 관찰 측정하고 화석을 발굴하여 연구함으로 세상의 기원과 창조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과학적인 증거 또는 물리적인 증거라고하며 이는 본문의 '나타난 것'을 말합니다.
'나타난 것'이 증거라면 '보이는 것'은 증거를 통해 우리가 얻는 결론, 즉 이해를 말합니다.
과학, 기술, 경험 등이 '보이는 것' 에 해당합니다.
문제는 '나타난 것' 을 통한 '보이는 것' 이 아무리 정확도를 기해도 보는 대상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오염되고 왜곡된 영과 육은 '나타난 것'이 아무리 정확하다해도 결국 틀리게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사격 훈련을 할 때 과녁과 조준경의 오차를 알아낸 후 일부러 과녁에서 벗어나는 오조준을 합니다.
그래야 정확하게 명중시킬 수 있습니다.
잘못된 조준경을 기준으로 아무리 정확하게 방아쇠를 당겨도 조준경이 잘못된 만큼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타난 것' 즉 우리의 현상들을 나의 눈으로 보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나의 눈이 왜곡되고 잘못되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눈 대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난 것' 우리의 현상들을 수정해서 다시 조준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의 상황과 현상들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이해합니다.
이 정도는 그래도 양호합니다.
아예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보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눈에 보이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것의 차이를 인정하고 과감하게 그만큼 오조준하여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5) 믿음의 선진들
본장 4-32절 까지 아벨로부터 시작되는 여러 구약의 신앙의 인물들의 믿음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3절부터 이들의 믿음을 종합적으로 서술합니다.
히브리서 11:33-38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그리고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의 한 가지 공통점을 보여줍니다.
바로 '고난' 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고난'을 통해 나타났음을 보여줍니다.
고난 자체가 우리 인생의 방향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방향이 하나님이 될 때 고난은 당연히 통과해야하는 과정입니다.
당연히 고난은 우리를 힘들게하지만 그 고난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드러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나타난 것을 의지한다면 결코 고난을 선택할 사람은 없습니다.
쉬운 길 편한 길 좋은 길이 눈에 보이는데 뭐하러 어려운 길 좁은 길 눈물의 길을 가겠습니까?
자신의 특권을 포기하고 손해를 감당하며 불이익과 핍박을 선택한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믿었습니다.
자신의 눈을 감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방아쇠를 당기십시오. 아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1) 속도냐 방향이냐?
바램과 소망이 없는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저마다 무엇인가를 바라고 소망하기에 인생은 원동력을 얻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각자가 원하는 것을 얻기위해 동분서주하며 이리뛰고 저리뛰고 있습니다.
뛰면 뛸 수록 달리면 달릴 수록 내가 원하는 것이 더 멀어지는 것 같고 나이는 점점 들어 몸이 무거워질수록 마음은 더 조급해집니다.
더구나 옆 사람들은 나보다 더 빨리 달리자 뒤쳐지기시작하니 더욱 불안합니다.
일단 일등은 둘째치고 꼴등이라도 면하자고 열심히 달리긴 달렸는데 가만보니 제자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 9:26 에서 달음질하기를 향방없는 것 같이 아니하라고 교훈하였습니다.
달리는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달리는 방향입니다.
방향이 명확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달리든지 아니면 포기하고 주저앉을 수 밖에 없습니다.
방향을 모르는데 열심히 달린들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방향을 모르는데 열심히 달릴 의지가 있을리 만무합니다.
인생의 성패는 열심과 최선에 의해서가아니라 방향을 아는가 모르는가에 달려있습니다.
평균수명 80년이라고 가정할 때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는데 8분의 시간조차 투자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입니다.
2) 방향의 자격 - 영원한 것, 선한 것, 실체적인 것
이렇게 중요한 것이 인생의 방향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방향을 찾아야 할까요?
먼저 인생의 방향은 영원해야 합니다.
돈, 명예, 권력, 쾌락, 부귀 영화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영원하지가 않습니다.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신기루와 같은 것에 인생의 방향을 두면 우리의 인생또한 허망하게 사라지고 말게 됩니다.
두 번째 인생의 방향은 선해야 합니다.
인생의 목표는 인생의 질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어디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갈리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인생의 방향은 실체적이어야 합니다.
허상이나 허영은 인생의 방향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무지개를 쫓는 제자리 걸음이 아닙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무에서 유로, 공허에서 충만으로 분명한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정리하자면 인생의 방향은 영원해야하고 선해야하고 실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하고 또한 선하고 실체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사랑, 평화, 희생, 겸손, 진실, 등등 여러 가지 것들이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하나로 싹 정리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남습니다.
하나님만이 영원하시고 선하시고 실체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방향은 오직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3) 믿음 - 인간의 행위 중 유일하게 남는 것
그리고 히브리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인생의 방향을 흔들림없이 고정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본문의 '실상' 이라는 어려운 말이 나오는데 '본질'이라고 번역해도 됩니다.
물론 '본질'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실체' 또는 '실존' 이라고하면 될 듯 하지만 이또한 어렵습니다.
아무튼 최대한 쉽게 표현하자면 만져지고 소멸되지 않고 살아있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생각해봅시다.
놀랍게도 우리 인생의 대부분의 행위들이 아무리 거창하고 대단해보여도 결국은 허무하고 의미없는 것들입니다.
기껏 땀흘리고 일하고 고생했더니 이윤을 남기기는 커녕 본전만 가까스로 보전하는 일은 누구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한마디로 '남는게 없는 장사' 라는 겁니다.
즉 실상이 없는 의미없는 행위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이에반해 우리 인간의 행위 중에서 유일하게 만져지고 소멸되지 않고 살아있고 존재하는 행위가 단 하나있습니다.
오직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만이 영원하시고 선하시고 실체적이시므로 하나님을 믿는 것만이 우리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실체적인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4) 믿음 - 말씀으로 오조준하라!
11:1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사람들은 세상이 만들어진 것을 현상으로 분석하고 설명하려고 합니다.
암석의 지층을 분석하고 대기와 해양을 관찰 측정하고 화석을 발굴하여 연구함으로 세상의 기원과 창조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과학적인 증거 또는 물리적인 증거라고하며 이는 본문의 '나타난 것'을 말합니다.
'나타난 것'이 증거라면 '보이는 것'은 증거를 통해 우리가 얻는 결론, 즉 이해를 말합니다.
과학, 기술, 경험 등이 '보이는 것' 에 해당합니다.
문제는 '나타난 것' 을 통한 '보이는 것' 이 아무리 정확도를 기해도 보는 대상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오염되고 왜곡된 영과 육은 '나타난 것'이 아무리 정확하다해도 결국 틀리게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사격 훈련을 할 때 과녁과 조준경의 오차를 알아낸 후 일부러 과녁에서 벗어나는 오조준을 합니다.
그래야 정확하게 명중시킬 수 있습니다.
잘못된 조준경을 기준으로 아무리 정확하게 방아쇠를 당겨도 조준경이 잘못된 만큼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타난 것' 즉 우리의 현상들을 나의 눈으로 보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나의 눈이 왜곡되고 잘못되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눈 대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난 것' 우리의 현상들을 수정해서 다시 조준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의 상황과 현상들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이해합니다.
이 정도는 그래도 양호합니다.
아예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보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눈에 보이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것의 차이를 인정하고 과감하게 그만큼 오조준하여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5) 믿음의 선진들
본장 4-32절 까지 아벨로부터 시작되는 여러 구약의 신앙의 인물들의 믿음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3절부터 이들의 믿음을 종합적으로 서술합니다.
히브리서 11:33-38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그리고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의 한 가지 공통점을 보여줍니다.
바로 '고난' 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고난'을 통해 나타났음을 보여줍니다.
고난 자체가 우리 인생의 방향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방향이 하나님이 될 때 고난은 당연히 통과해야하는 과정입니다.
당연히 고난은 우리를 힘들게하지만 그 고난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드러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나타난 것을 의지한다면 결코 고난을 선택할 사람은 없습니다.
쉬운 길 편한 길 좋은 길이 눈에 보이는데 뭐하러 어려운 길 좁은 길 눈물의 길을 가겠습니까?
자신의 특권을 포기하고 손해를 감당하며 불이익과 핍박을 선택한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믿었습니다.
자신의 눈을 감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방아쇠를 당기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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