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할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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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7:1-5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99세때에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람에게 있어 오늘 본문의 하나님은 그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환상 중에 나타나시거나 '이르시되' 라는 음성의 차원에서 아브람과 소통하셨습니다.
오늘은 직접 하늘에서 내려오시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시는 장관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들도 말로 했는데 지켜지지 않을 경우 직접 얼굴을 봐야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내 앞에서 행하라는 말은 내 얼굴 앞에서 행동하라는 뜻의 어원을 가집니다.
아브람에게는 말로만 해서는 안되는 것을 아시고 직접 얼굴보고 이야기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본문 17절에 아브람이 엎드려있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압도적인 권위를 간접적으로 알게 됩니다.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전능한 하나님 - 엘 샤다이 - 이라고 아브람에게 선포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명칭은 야훼 또는 여호와로 불립니다.
본문의 하나님 또한 야훼이십니다.
야훼 외에 하나님을 지칭하는 다른 표현들도 많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엘 샤다이 - 전능하신 하나님- 으로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있어 하나님은 야훼 즉 구원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 엘 샤다이로 오시어 아브람을 강하게 압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인자하시며 한없이 은혜로우신 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의 본문처럼 엘 샤다이 압도적인 강함으로 우리을 엎드리게 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강하게 나오시는 이유는 아브람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15장의 횃불언약을 통해 아브람에게 자손과 땅의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기다리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뜨렸습니다.
아내 사래의 몸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는 편법을 쓴 것입니다.
그러고 13년이 지났습니다.
아무일이 없는 것을 보니 이게 맞는 일인가 싶었습니다.
이렇듯 말로는 안되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신 것입니다.
우리의 불신앙을 성경은 목이 곧고 고집이 세다라고 여러번 표현합니다.
전혀 생각을 바꾸려하지않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진지하게 들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집불통들에게 말로 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아브람에게 여러차례 하나님은 약속해주셨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아브람입니다.
이러한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 으로 오셔서 엄하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첫번째 명령은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큰 아버지에서 열국의 아버지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후로 아브람 대신 아브라함으로 지칭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로서의 정체성을 갖도록 이름부터 바꾸는 근본적인 정신적 변화를 요구하셨습니다.
두 번째 명령은 보다 더 행동적입니다.
'할례'입니다.
아브람과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들, 또 앞으로 태어날 남아들에게 반드시 할례를 행하도록 하셨습니다.
오늘날의 포경수술로서 남성성기의 끝부분 표피를 잘라내는 의식입니다.
:11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상징으로서 타인에게 공개되지 않는 자신만의 중심부에 새겨놓는 것입니다.
세 번째 명령은 아내 사래의 이름 또한 사라로 바꾸는 것입니다.
공주에서 열국의 어머니로 놀라운 신분의 상승을 말합니다.
:15-16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하나님께서는 오늘 아브람에게 그간과는 다른 충격요법을 쓰셨습니다.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모습으로 직접 나타나시고 이름을 바꾸고 할례를 행하라는 엄한 명령을 하셨습니다.
우리 주변에 고집 쎄고 남의 말을 안들으려하는 꼴통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엘 샤다이의 하나님이실 것입니다.
말로 해서 안되면 좀 강하게 나가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고집 쎈 시어머니도 엘 샤다이 하나님을 만나면 달라지시겠지요.
남의 말 안듣는 쇠고집 아들도 엘 샤다이 하나님 만나면 훨씬 나아지겠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본문은 전혀 다른 사실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우리 인간은 충격요법 또한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엘 샤다이 하나님 조차 포기한 것이 우리 인간의 고집이요 불신앙이라는 것입니다.
:17-18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우리 생각같으면 엘 샤다이 - 전능하신 하나님 - 의 모습으로 눈 앞에 나타나신다면 웃음이 나오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팥으로 메주쑤신다고해도 '예, 맞습니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강한 하나님, 압도적인 하나님 마저도 우습게 여깁니다.
평소와는 다른 엄한 모습으로 말씀하시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명령은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세번째 구십세 사라가 출산을 하게된다는 대목에서 웃음이 터져나온 것입니다.
천둥 번개만 쳐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겁 많은 우리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감히 웃을 수 있는 대책없이 겁없는 존재가 또한 우리 인간입니다.
17 절에 엎드려 웃으며는 우리 인간의 심리를 잘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모습으로 바로 앞에 마주하고 계실지라도 엎드리면 안보일 것이니 마음껏 웃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얼마든지 하나님을 속일 수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엎드려 웃음을 간파하시고 사라의 아들을 '이삭' 웃음으로 짓게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이삭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몰래 웃던 자신의 속마음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철저히 들킨 아브람은 그 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 행동에 옮겼습니다.
:23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포피를 베었으니"
아브라함이 받은 충격이 컸었기에 바로 '이 날에'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할례는 오늘날 병원에서 흔하게 행해지는 술식이 아니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쇠가 아닌 돌칼로 진통제와 항생제도 없이 행해지던 위험천만한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문명이 발달한 이집트 귀족 층에서 자신들의 특별함을 과시하기 위한 의식이었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통증과 위험천만한 출혈, 그리고 아무는 동안 외적의 침입 앞에 철저히 무력해지는 위기를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야만적이고 공포스러운 의식을 하나님께서 왜 명령하셨을까 생각해 봅시다.
아무리 말로 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변화되지 못하는 아브라함에게 가장 충격적이고도 지속가능한 교육효과는 바로 '할례' 였습니다.
: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백번 천번 말을 해도 듣는 순간 뿐이고 그 후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반면에 '할례'는 한 번만 행하면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표시가 되어 도저히 잊을래야 잊혀질 수 없고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 없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살을 잘라내기 때문입니다.
'할례' 말고도 지속가능한 상징은 '문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할례는 문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구와 환원이 안되는 비가역적 술식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이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할례받지 못한 자'라고 부른 것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할례'는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상징인 것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약속을 항상 기억하게 하고 잊지않게하는 최고의 방법으로 여겨집니다.
문제는 이러한 할례 조차 우리 인간의 고집을 꺾지 못했습니다.
할례를 통해 자신의 고집을 꺾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하는데 오히려 할례를 자신들의 고집의 수단으로 악용하고야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할례를 통해 자신들의 선민의식을 고취하고 타민족을 무시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베푸신 오직 믿음으로 구원얻는 복음의 진리를 무시하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고집부렸습니다.
살에 새긴 상징은 영원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영원하더라도 인간들은 그 의미조차 왜곡하고 말테니까요.
우리에겐 우리의 고집을 꺾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게해주는 상징이 필요합니다.
'할례'보다 더 강력하고 지속가능한 상징말입니다.
손가락, 아니 팔다리를 잘라야 우리는 고집을 꺾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잊지 않게 될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상징을 주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징하는 영원한 표징이며 실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살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새겨져있습니다.
예레미야 31: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할례는 우리의 육신의 껍질을 잘라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의 껍질을 잘라냈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껍질은 너무나 단단하고 딱딱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바치시고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그의 피는 우리의 마음의 껍질을 벗기고 잘라내었습니다.
히브리서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우리는 더 이상 육신의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포피가 잘리고 피흘리는 대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온 몸을 드려 채찍과 칼과 창에 찔리우고 갈리우고 피흘려 주셨습니다.
더 이상 우리의 육신의 할례는 영원한 언약의 상징이 아닙니다.
오직 찢기우고 피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언약의 상징이십니다.,
우리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언약의 상징을 마음에 간직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마음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덮고 있는 낡고 딱딱한 불순종과 고집의 껍질을 벗겨내셨습니다.
우리는 더욱 말씀을 읽고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고 유연하게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변치않는 마음의 할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99세때에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람에게 있어 오늘 본문의 하나님은 그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환상 중에 나타나시거나 '이르시되' 라는 음성의 차원에서 아브람과 소통하셨습니다.
오늘은 직접 하늘에서 내려오시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시는 장관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들도 말로 했는데 지켜지지 않을 경우 직접 얼굴을 봐야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내 앞에서 행하라는 말은 내 얼굴 앞에서 행동하라는 뜻의 어원을 가집니다.
아브람에게는 말로만 해서는 안되는 것을 아시고 직접 얼굴보고 이야기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본문 17절에 아브람이 엎드려있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압도적인 권위를 간접적으로 알게 됩니다.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전능한 하나님 - 엘 샤다이 - 이라고 아브람에게 선포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명칭은 야훼 또는 여호와로 불립니다.
본문의 하나님 또한 야훼이십니다.
야훼 외에 하나님을 지칭하는 다른 표현들도 많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엘 샤다이 - 전능하신 하나님- 으로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있어 하나님은 야훼 즉 구원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 엘 샤다이로 오시어 아브람을 강하게 압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인자하시며 한없이 은혜로우신 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의 본문처럼 엘 샤다이 압도적인 강함으로 우리을 엎드리게 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강하게 나오시는 이유는 아브람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15장의 횃불언약을 통해 아브람에게 자손과 땅의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기다리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뜨렸습니다.
아내 사래의 몸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는 편법을 쓴 것입니다.
그러고 13년이 지났습니다.
아무일이 없는 것을 보니 이게 맞는 일인가 싶었습니다.
이렇듯 말로는 안되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신 것입니다.
우리의 불신앙을 성경은 목이 곧고 고집이 세다라고 여러번 표현합니다.
전혀 생각을 바꾸려하지않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진지하게 들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집불통들에게 말로 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아브람에게 여러차례 하나님은 약속해주셨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아브람입니다.
이러한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 으로 오셔서 엄하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첫번째 명령은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큰 아버지에서 열국의 아버지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후로 아브람 대신 아브라함으로 지칭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로서의 정체성을 갖도록 이름부터 바꾸는 근본적인 정신적 변화를 요구하셨습니다.
두 번째 명령은 보다 더 행동적입니다.
'할례'입니다.
아브람과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들, 또 앞으로 태어날 남아들에게 반드시 할례를 행하도록 하셨습니다.
오늘날의 포경수술로서 남성성기의 끝부분 표피를 잘라내는 의식입니다.
:11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상징으로서 타인에게 공개되지 않는 자신만의 중심부에 새겨놓는 것입니다.
세 번째 명령은 아내 사래의 이름 또한 사라로 바꾸는 것입니다.
공주에서 열국의 어머니로 놀라운 신분의 상승을 말합니다.
:15-16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하나님께서는 오늘 아브람에게 그간과는 다른 충격요법을 쓰셨습니다.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모습으로 직접 나타나시고 이름을 바꾸고 할례를 행하라는 엄한 명령을 하셨습니다.
우리 주변에 고집 쎄고 남의 말을 안들으려하는 꼴통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엘 샤다이의 하나님이실 것입니다.
말로 해서 안되면 좀 강하게 나가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고집 쎈 시어머니도 엘 샤다이 하나님을 만나면 달라지시겠지요.
남의 말 안듣는 쇠고집 아들도 엘 샤다이 하나님 만나면 훨씬 나아지겠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본문은 전혀 다른 사실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우리 인간은 충격요법 또한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엘 샤다이 하나님 조차 포기한 것이 우리 인간의 고집이요 불신앙이라는 것입니다.
:17-18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우리 생각같으면 엘 샤다이 - 전능하신 하나님 - 의 모습으로 눈 앞에 나타나신다면 웃음이 나오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팥으로 메주쑤신다고해도 '예, 맞습니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강한 하나님, 압도적인 하나님 마저도 우습게 여깁니다.
평소와는 다른 엄한 모습으로 말씀하시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명령은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세번째 구십세 사라가 출산을 하게된다는 대목에서 웃음이 터져나온 것입니다.
천둥 번개만 쳐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겁 많은 우리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감히 웃을 수 있는 대책없이 겁없는 존재가 또한 우리 인간입니다.
17 절에 엎드려 웃으며는 우리 인간의 심리를 잘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모습으로 바로 앞에 마주하고 계실지라도 엎드리면 안보일 것이니 마음껏 웃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얼마든지 하나님을 속일 수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엎드려 웃음을 간파하시고 사라의 아들을 '이삭' 웃음으로 짓게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이삭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몰래 웃던 자신의 속마음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철저히 들킨 아브람은 그 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 행동에 옮겼습니다.
:23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포피를 베었으니"
아브라함이 받은 충격이 컸었기에 바로 '이 날에'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할례는 오늘날 병원에서 흔하게 행해지는 술식이 아니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쇠가 아닌 돌칼로 진통제와 항생제도 없이 행해지던 위험천만한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문명이 발달한 이집트 귀족 층에서 자신들의 특별함을 과시하기 위한 의식이었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통증과 위험천만한 출혈, 그리고 아무는 동안 외적의 침입 앞에 철저히 무력해지는 위기를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야만적이고 공포스러운 의식을 하나님께서 왜 명령하셨을까 생각해 봅시다.
아무리 말로 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변화되지 못하는 아브라함에게 가장 충격적이고도 지속가능한 교육효과는 바로 '할례' 였습니다.
: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백번 천번 말을 해도 듣는 순간 뿐이고 그 후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반면에 '할례'는 한 번만 행하면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표시가 되어 도저히 잊을래야 잊혀질 수 없고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 없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살을 잘라내기 때문입니다.
'할례' 말고도 지속가능한 상징은 '문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할례는 문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구와 환원이 안되는 비가역적 술식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이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할례받지 못한 자'라고 부른 것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할례'는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상징인 것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약속을 항상 기억하게 하고 잊지않게하는 최고의 방법으로 여겨집니다.
문제는 이러한 할례 조차 우리 인간의 고집을 꺾지 못했습니다.
할례를 통해 자신의 고집을 꺾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하는데 오히려 할례를 자신들의 고집의 수단으로 악용하고야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할례를 통해 자신들의 선민의식을 고취하고 타민족을 무시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베푸신 오직 믿음으로 구원얻는 복음의 진리를 무시하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고집부렸습니다.
살에 새긴 상징은 영원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영원하더라도 인간들은 그 의미조차 왜곡하고 말테니까요.
우리에겐 우리의 고집을 꺾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게해주는 상징이 필요합니다.
'할례'보다 더 강력하고 지속가능한 상징말입니다.
손가락, 아니 팔다리를 잘라야 우리는 고집을 꺾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잊지 않게 될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상징을 주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징하는 영원한 표징이며 실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살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새겨져있습니다.
예레미야 31: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할례는 우리의 육신의 껍질을 잘라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의 껍질을 잘라냈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껍질은 너무나 단단하고 딱딱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바치시고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그의 피는 우리의 마음의 껍질을 벗기고 잘라내었습니다.
히브리서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우리는 더 이상 육신의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포피가 잘리고 피흘리는 대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온 몸을 드려 채찍과 칼과 창에 찔리우고 갈리우고 피흘려 주셨습니다.
더 이상 우리의 육신의 할례는 영원한 언약의 상징이 아닙니다.
오직 찢기우고 피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언약의 상징이십니다.,
우리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언약의 상징을 마음에 간직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마음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덮고 있는 낡고 딱딱한 불순종과 고집의 껍질을 벗겨내셨습니다.
우리는 더욱 말씀을 읽고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고 유연하게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변치않는 마음의 할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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