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양보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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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창세기 13:8-9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으로 왔던 아브람이 계속되는 가뭄으로 인해 믿음이 약해져서 조금씩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결국에 이집트에 도달하였습니다.
이집트 바로에게 아내 사라를 빼앗기고 죽임을 당할것이 두려운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누이 동생이라며 거짓말하는 비겁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런 아브람마저도 하나님께서는 바로로 부터 지켜주시고 오히려 엄청난 가축과 은과 금을 바로로 부터 얻게되고 아내 사래도 무사히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집트를 떠나 다시 가나안 땅에 돌아와서 전에 예배 드렸던 곳에서 다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나약함과 초라한 실체를 발견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철저히 배우고 발견함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한단계 더 도약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람의 두번째 시련이 등장합니다.
첫번째 시련은 가뭄으로 인한 물부족의 문제였는데 오늘 본문의 시련은 너무 많아서 생긴 문제였습니다.
:5-7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롯은 아브람의 조카로서 아브람의 큰 형 하란의 아들입니다.
아브람의 큰 형 하란이 죽고 아브람은 남겨진 조카 롯을 아들처럼 여겼습니다.
롯 또한 삼촌 아브람을 아버지처럼 따랐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데라와 삼촌 나홀과 함께 하란에 머무르지 않고 아브람을 따라 과감하게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이르렀습니다.
가뭄과 기근 뿐만 아니라 이집트에서의 곤경을 함께 겪었는지라 아들이 없는 아브람에게 롯은 아들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물 한방울이라도 서로 양보하고 콩 한쪽이라도 서로 나누던 아브람과 롯에게 위기가 닥쳤습니다.
문제는 너무 많은 게 문제였던 것입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7 : 1)"
지나친 풍족함은 반드시 관계의 위기를 불러옵니다.
아브람은 돈보다 관계를 더욱 중요시 하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람의 종 엘리에셀이 주인의 며느리감을 찾는 헌신을 보면서 아브람과 그의 종 엘리에셀의 관계가 어떠한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문제의 심각성이 한계에 다다르자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다음과 같이 제시를 합니다.
:8-9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우리가 헷갈리지 말아야 할 것은 아브람이 자신의 명의의 땅에서 절반을 갈라 롯에게 주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당시 아브람에게는 자신 소유의 땅을 아직 한 평도 갖지 못한 상태이며 자신이 죽은 후 누일 땅 한 평도 아직 얻지 못한 상태입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을 동과 서로 나누어 서로 겹치지 말자고 경계를 나눈 것입니다.
아브람은 롯에게 먼저 선택할 권리를 양보하였으며 롯은 물이 풍족한 동쪽 요단강 방향을 선택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아브람이 양보한 것은 먼저 선택할 권리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롯에게만 양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양보하였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자신의 조카 롯을 양보하였던 것입니다.
갖은 고생을 함께하며 아들과 같은 조카 롯이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을 가도록 한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에게는 얼마든지 조카 롯을 보내지 않고 자기 곁에 묶어 둘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 31장에 야곱이 자신의 외삼촌 라반으로부터 가족과 양떼를 끌고 도망치고 그런 야곱을 추격하는 라반의 모습이 나옵니다.
아브람도 롯과의 갈등 초기엔 그냥 힘과 권위로 롯을 눌러버리고 본떼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런 자신과의 내적 싸움에서 이기고 롯의 독립을 인정한 것입니다.
후에 아브람은 자신의 아들 이삭마저도 하나님께 드리는 결단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이렇게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친한 친고와의 관계를 희생시키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참으로 쉽지많은 않으며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를 통해 내가 걸었던 기대와 소망,
자식을 통해 기대했던 내가 못이룬 꿈들과 남들에게 증명하고 싶은 마음들,
이렇게 인간관계는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인생의 계획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를 내려놓은다는 것은 자신의 미래의 일정부분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아브람은 하나님께 자신의 소유를 양보하였습니다.
동편 요단강 유역은 물이 풍부하고 기름진 곳입니다.
반면 서편은 황량하고 메마른 산악지역입니다.
아브람은 더 좋은 입지 조건을 조카 롯이 아닌 하나님께 양보한 것입니다.
사람은 내가 가진 것, 이룬 것에 대해 서로 다른 기준과 잣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람 입장에서는 조카 롯은 몸뚱아리 하나 가지고 와서 키워주고 먹여주고 길러줬더니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조카 롯 또한 그간 내 인생 내 젊은 다 바친 것에 대한 결과과 이정도 인가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어떤 회사나 조직이든 노와사, 상과 하의 갈등은 있기 마련이며 이는 서로 자신의 공과 희생에 대한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소유는 그 동안 자신의 수고의 결과이며 자신의 살아온 과거입니다.
그러한 자신의 소유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이마저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했습니다.
내가 번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마음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없으면 다툼은 커지고 미움은 증폭되는 것입니다.
특히 자신이 몸으로 땀흘려 정직하게 번 것이 아닌 뜻밖의 횡재나 상속에 해당하는 경우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다라는 냉철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집트 바로로 부터 받은 가축과 은과 금에 대해 깨끗이 미련을 내려놓았기에 이러한 통큰 결단이 가능했습니다.
결론
이렇듯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양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의 관계와 자신의 소유를 양보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얼마되지도 않는 우리의 전부를 내놓을 때 하나님은 그분의 전부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14-15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동서남북 사방의 땅을 주셨습니다.
아브람이 동을 양보하자 하나님께서 동서남북 사방을 주신 것입니다.
땅은 아브람의 소유를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관계의 축복도 더해주셨습니다.
:16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자손은 아브람의 관계를 뜻합니다.
아브람에게 이삭을 주시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육적인 족보의 시작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무너뜨리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양보하며 삽시다.
사람에게 양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을 달거나 보상을 바라면 안됩니다.
그것은 양보가 아닙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께 양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양보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베풀며 참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전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으로 왔던 아브람이 계속되는 가뭄으로 인해 믿음이 약해져서 조금씩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결국에 이집트에 도달하였습니다.
이집트 바로에게 아내 사라를 빼앗기고 죽임을 당할것이 두려운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누이 동생이라며 거짓말하는 비겁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런 아브람마저도 하나님께서는 바로로 부터 지켜주시고 오히려 엄청난 가축과 은과 금을 바로로 부터 얻게되고 아내 사래도 무사히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집트를 떠나 다시 가나안 땅에 돌아와서 전에 예배 드렸던 곳에서 다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나약함과 초라한 실체를 발견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철저히 배우고 발견함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한단계 더 도약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람의 두번째 시련이 등장합니다.
첫번째 시련은 가뭄으로 인한 물부족의 문제였는데 오늘 본문의 시련은 너무 많아서 생긴 문제였습니다.
:5-7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롯은 아브람의 조카로서 아브람의 큰 형 하란의 아들입니다.
아브람의 큰 형 하란이 죽고 아브람은 남겨진 조카 롯을 아들처럼 여겼습니다.
롯 또한 삼촌 아브람을 아버지처럼 따랐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데라와 삼촌 나홀과 함께 하란에 머무르지 않고 아브람을 따라 과감하게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이르렀습니다.
가뭄과 기근 뿐만 아니라 이집트에서의 곤경을 함께 겪었는지라 아들이 없는 아브람에게 롯은 아들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물 한방울이라도 서로 양보하고 콩 한쪽이라도 서로 나누던 아브람과 롯에게 위기가 닥쳤습니다.
문제는 너무 많은 게 문제였던 것입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7 : 1)"
지나친 풍족함은 반드시 관계의 위기를 불러옵니다.
아브람은 돈보다 관계를 더욱 중요시 하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람의 종 엘리에셀이 주인의 며느리감을 찾는 헌신을 보면서 아브람과 그의 종 엘리에셀의 관계가 어떠한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문제의 심각성이 한계에 다다르자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다음과 같이 제시를 합니다.
:8-9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우리가 헷갈리지 말아야 할 것은 아브람이 자신의 명의의 땅에서 절반을 갈라 롯에게 주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당시 아브람에게는 자신 소유의 땅을 아직 한 평도 갖지 못한 상태이며 자신이 죽은 후 누일 땅 한 평도 아직 얻지 못한 상태입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을 동과 서로 나누어 서로 겹치지 말자고 경계를 나눈 것입니다.
아브람은 롯에게 먼저 선택할 권리를 양보하였으며 롯은 물이 풍족한 동쪽 요단강 방향을 선택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아브람이 양보한 것은 먼저 선택할 권리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롯에게만 양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양보하였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자신의 조카 롯을 양보하였던 것입니다.
갖은 고생을 함께하며 아들과 같은 조카 롯이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을 가도록 한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에게는 얼마든지 조카 롯을 보내지 않고 자기 곁에 묶어 둘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 31장에 야곱이 자신의 외삼촌 라반으로부터 가족과 양떼를 끌고 도망치고 그런 야곱을 추격하는 라반의 모습이 나옵니다.
아브람도 롯과의 갈등 초기엔 그냥 힘과 권위로 롯을 눌러버리고 본떼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런 자신과의 내적 싸움에서 이기고 롯의 독립을 인정한 것입니다.
후에 아브람은 자신의 아들 이삭마저도 하나님께 드리는 결단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이렇게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친한 친고와의 관계를 희생시키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참으로 쉽지많은 않으며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를 통해 내가 걸었던 기대와 소망,
자식을 통해 기대했던 내가 못이룬 꿈들과 남들에게 증명하고 싶은 마음들,
이렇게 인간관계는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인생의 계획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를 내려놓은다는 것은 자신의 미래의 일정부분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아브람은 하나님께 자신의 소유를 양보하였습니다.
동편 요단강 유역은 물이 풍부하고 기름진 곳입니다.
반면 서편은 황량하고 메마른 산악지역입니다.
아브람은 더 좋은 입지 조건을 조카 롯이 아닌 하나님께 양보한 것입니다.
사람은 내가 가진 것, 이룬 것에 대해 서로 다른 기준과 잣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람 입장에서는 조카 롯은 몸뚱아리 하나 가지고 와서 키워주고 먹여주고 길러줬더니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조카 롯 또한 그간 내 인생 내 젊은 다 바친 것에 대한 결과과 이정도 인가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어떤 회사나 조직이든 노와사, 상과 하의 갈등은 있기 마련이며 이는 서로 자신의 공과 희생에 대한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소유는 그 동안 자신의 수고의 결과이며 자신의 살아온 과거입니다.
그러한 자신의 소유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이마저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했습니다.
내가 번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마음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없으면 다툼은 커지고 미움은 증폭되는 것입니다.
특히 자신이 몸으로 땀흘려 정직하게 번 것이 아닌 뜻밖의 횡재나 상속에 해당하는 경우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다라는 냉철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집트 바로로 부터 받은 가축과 은과 금에 대해 깨끗이 미련을 내려놓았기에 이러한 통큰 결단이 가능했습니다.
결론
이렇듯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양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의 관계와 자신의 소유를 양보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얼마되지도 않는 우리의 전부를 내놓을 때 하나님은 그분의 전부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14-15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동서남북 사방의 땅을 주셨습니다.
아브람이 동을 양보하자 하나님께서 동서남북 사방을 주신 것입니다.
땅은 아브람의 소유를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관계의 축복도 더해주셨습니다.
:16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자손은 아브람의 관계를 뜻합니다.
아브람에게 이삭을 주시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육적인 족보의 시작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무너뜨리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양보하며 삽시다.
사람에게 양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을 달거나 보상을 바라면 안됩니다.
그것은 양보가 아닙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께 양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양보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베풀며 참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전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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