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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 프로젝트 4 - 뒤로가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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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922회 작성일 21-02-28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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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4:19-20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 250만명의 대행렬을 이루었습니다.

대행렬이 왔던 길을 돌이킨다는 것은 상상만해도 골치아픈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던 길을 돌이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비하히롯 앞 바알스본 맞은 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지명은 현재 어디를 가리키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한의사 평신도가 아카바 만의 홍해라는 증거들을 제시하며 본문의 바알스본 지역을 추정하지만 아직까지는 추정일 뿐입니다.

성지순례의 코스인 시내산도 출애굽 당시의 시내산이 아닌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재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홍해의 갈라짐 사건이 허구가 될 수 없는 엄연한 역사적 실체인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구름과 불기둥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었던 코스는 당시 사람들에게 일반적이지 않던 외진 곳이었음은 분명합니다.

다만 고대 전승에 의하면 비하히롯은 바위 틈으로 난 좁은 길이라고 합니다.

그 좁은 길을 통과하니 앞에는 넘실대는 홍해바다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전법전략상 가장 피해야 할 조건들로만 갖춘 공격당하기에 가장 완벽한 장소였습니다.

안그래도 익히 아는 편한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이 아닌 이상한 길로 인도하시더니 너무나 상식에서 벗어난 명령을 하시는 통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슬슬 분노지수가 상승하고 있었습니다.

:3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하리라"

요즘 같이 스마트폰도 없는 시대에 이집트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뒤로 꽉 막힌 곳에 갇혀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잠시 궁금해졌습니다.

250만명 중 이집트의 첩자가 몇있었을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집트 바로는 병거 육백 대와 정예부대를 이끌고 추격해왔습니다.

: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이 때 당시 이스라엘의 행렬은 특별한 순서가 없었습니다.

이집트 탈출에 보다 더 적극적인 사람들은 행렬의 앞 쪽이었을 것입니다.

그에 반해 이집트 탈출에 소극적인 사람들, 그리고 이것저것 싸들고 온 것이 많은 사람들은 행렬의 뒤쪽에 있었을 것입니다.

400년 넘게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친이집트파가 없을 리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십분의 일도 안되는 36년 동안 일제 식민지배를 받았지만 친일파로 인해 나라를 잃었고 친일파로 인해 독립을 방해받았으며 심지어 해방 후에도 친일파들에의해 일제 청산의 기회를 놓치고 나라가 분열되었습니다.

친이집트 파가 대부분인 행렬의 뒤 쪽이 언제나 문제였습니다.

그냥 구름기둥 불기둥만 보고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주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추격하던 이집트 군대를 보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그들은 모세에게 우리를 내버려 두었더라면 차라리 이집트의 노예로서 살 수는 있었다고 불명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굳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만나기 전에도 그럭저럭 잘만 살았습니다.

주시라고 말하지도 않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이끌어 내시는 주님이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돈의 노예, 권력의 노예, 쾌락의 노예, 욕망의 노예가 되더라도 잘먹고 잘 사는데 왜 예수님께서 굳이 나 대신 죽으셔야 하냐고 묻습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노역을 시킬 때 그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중간 관리자로 고용했습니다.

마치 일제가 우리나라 사람들을 앞잡이로 고용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프리카 대륙의 물소 떼는 적어도 만마리 이상이 떼지어 산다고 합니다.

그들을 사냥하는 사자의 무리는 고작 스무마리를 넘지 않습니다.

물소 떼들이 마음만 먹으면 협력하여 스무마리의 사자들을 밟아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소들은 도망가거나 소극적으로 방어할 뿐입니다.

사자들에게 몇 마리가 잡히더라도 극히 일부일 뿐이며 사자들이 배부른 동안에는 어느 정도 마음 놓고 있어도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물소들의 단합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습성때문에 도망치는데 불리한 새끼나 노약한 물소들은 사자들에게 희생되고 맙니다.

우리 인간들 모두 예외없이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즉 죽음의 노예인 것입니다.

우리가 힘을 합쳐 이 죽음이란 놈을 발로 밟아놓으면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죽음의 문제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아직은 건강하고 아직은 즐길만 한게 인생이니 그렇습니다.

병약한 노약자들과 다르게 아직 죽음은 별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노예일지라도 사는데 지장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 때문에 인간은 이기적이 되고 비겁하게 되고 쾌락에 집착하게 되고 욕망의 포로가 된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나의 생존과 나의 문제만이 온 우주의 중심이되고 타인의 아픔과 어려운 처지에 대해 공감할 수 없는 무감각한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이런데도 차리리 노예로 남을 터이니 나를 내버려두라니요.

자유케 하시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려해도 말이 먹히지 않은 대부분의 현대인들에게 다가서기는 우리의 자존심이 상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19-20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진영 뒤쪽으로 구름 기둥을 데리고 가셔서 이집트 군대와 이스라엘 진 사이를 막으셨습니다.

친이집트파와 불평분자들이 대부분인 이스라엘 뒤쪽 행렬들을 위해 직접 나서서 이집트 군대를 어둠으로 막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 홍해바닷물을 양쪽 벽처럼 세우사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뒤쫓아온 이집트의 병거와 군대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 앞에서 홍해바다로 수장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 한명의 희생자도 없이 완전하게 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실 때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적으로 구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완전한 집합체를 온전히 구하신 것입니다.

그 중에서 악질적인 친일파 일부를 제거하시거나 달리기가 느린 노약자들을 미처 구하지 못하신 경우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물소 떼들처럼 뒤 쪽 쳐진 몇 마리를 희생시킴으로 다수를 살리시는 불완전한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공동체적 구원에 대해 철저히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때 미리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악한 죄인일지라도 만약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라면 반드시 구원하시고야 말것이기에 절대로 우리가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단 한 명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눈은 가장 연약한 곳, 가장 미천한 곳, 가장 낮은 곳에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공동체적 구원관을 확립한 자만이 참된 구원의 감격과 능력을 누릴 수 있습니다.

구원 받은 성도는 개인적인 차원의 희노애락으로부터 초월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다른 심령의 아픔과 눈물에 항상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공동체의 가장 연약한 자들과 함께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약육강식, 적자생존, 승자독식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정치적 견해가 다르고 출신지가 다르고 계급이 다르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서 하나님 보시기에 모두가 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세상은 강한 자, 부유한 자, 배운 자, 잘난 자를 고를지라도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님과 함께 뒤로 가서 약한 자들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갈수록 각박해지고 살벌해지는 세상에서 약한 자들을위해 싸운다한들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한 마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세상의 권력과 정권자들과 싸우고 대결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공동체의 뒤쪽, 연약한 자들과 함께하는 우리의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면 됩니다.

홍해를 가르시는 하나님께서 길이 보이지 않는 이 나라와 민족에게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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