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 프로젝트 1 - 믿음과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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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출애굽기 12:1-2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첫달을 선포하십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달력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를 민간력 또는 애굽력이라고 합니다.
티쉬리(1월), 헤쉬반(2월), 키슬루(3월), 테벳(4월), 스밧(5월), 아달(6월), 니산(7월), 이야르(8월), 시완(9월), 탐무즈(10월), 아브(11월), 엘룰(12월)
그런데 하나님께서 본문에 이 달을 해의 첫 달이 되게하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본문의 이 달은 니산 즉 일곱번째 달입니다.
일곱번째이던 니산이 1월이 되고 기존의 1월이었던 티쉬리가 7월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종교력, 또는 성서력이라고 부릅니다.
종교력과 민간력은 첫달의 기준만 다르지 실제는 동일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공식적으로 종교력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유대력이란 종교력 또는 성서력을 말하며, 민간력은 여기에다 6개월만 더하면 됩니다.
유대력 = 성서력, 종교력 = 민간력, 애굽력 + 6
그리고 유대력은 19년마다 6개월의 윤달을 가짐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태양력과 대략 2개월 또는 3개월 차이가 납니다.
태양력 = 유대력 + 2,3
달력하나 보는데 이렇게 복잡해서 어떻게 성경공부하겠느냐 싶지만 서양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음력 구정설을 대하는 입장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유대력에 따라 절기를 지키지 않으므로 실제 믿음 생활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습니다.
우리는 부활절, 성령강림절, 맥추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을 해마다 기독교계의 협의하에 태양력을 기준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더욱 쉽게 말해 교회에서 나눠드린 달력을 보시면 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임박한 상황에서 본문의 새 달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의중은 도대체 무엇인지 알아봐야합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역사적으로 새해 첫 달은 새로운 왕의 즉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왕이 즉위하는 날을 새해 첫달로 삼는 경우가 역사를 통해 빈번히 있었습니다.
바로 새로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신다는 메세지입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압제에서 해방시키시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새로운 나라로 세우시는 출발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궁극적 의미를 뜻합니다.
죄의 노예였던 우리를 죽음의 형벌에서 구해주심과 함께 우리와 함께 새로운 나라를 세우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본문 41절에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에서 여호와의 군대는 이스라엘 백성을 말하는 것으로 한 국가의 필수요소인 군대라는 명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소속을 구체화 하고 있습니다.
3절부터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3-4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잡을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잡고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최소 단위는 사람이 아니라 가정입니다.
여기서 가정은 친족 뿐만 아니라 내 옆의 이웃과 동료들을 포함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구원받는 것마저도 철저히 개인적인 일로 규정합니다.
이는 성경이 일관적으로 부인하는 개념입니다.
물론 회개하고 믿고 영접하는 것은 남이 대신해 줄 수 없는 본인 스스로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이 있기까지 그리고 구원받아 성화되는 과정은 결코 개인적인 차원이 아닌 공동체적 차원임을 본문은 명확히 밝힙니다.
어린 양을 식당이나 가게에서 대량으로 조리한 후 일인분씩 소포장해서 구입해 먹으면 간단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마리씩 가족단위로 그 식구를 위하여 취하게 하셨습니다.
양 한마리를 다 먹기에는 인원이 부족한 일인가족의 경우 비슷한 처지의 이웃들과 함께 나누게 하셨습니다.
앞으로 40년 동안의 기나긴 여정을 앞 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린 양을 함께 나눠먹음으로 가족단위의 결속력은 더욱 강화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일인가구 시대를 맞아 일회용 일인용 상품과 음식들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에는 일인분이 없습니다.
나 혼자 믿고 나 혼자 구원받는다는 개념은 성경에 없는 것으로서 지극히 소승불교스러운 위험한 사상입니다.
종교적인 열성은 어려워보이지만 실상 누구나 다 가능합니다.
얼마든지 거짓으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배우자, 자녀, 부모님과의 관계는 차원이 다릅니다.
가족과의 관계는 숨길 수 없는 본인의 실체를 나타내는 바로미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구 반대편의 굶주리고 있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전에 내 곁의 형제, 내 옆의 이웃과 화해하고 화목하기를 원하십니다.
가족과 이웃은 나라는 존재의 실체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대단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느냐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답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잘못 이해합니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 다음에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구절은 순서를 뜻하지 않습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할 수 없는 공존을 나타냅니다.
마태복음 5 장 23 절 - 24 절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 또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린다는 것은 제사이며 오늘날 예배를 말합니다.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이 화목과 화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들어도 꽤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우리는 실상 무엇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지 잘 모릅니다.
열심히 교회다니고 전도 많이하고 헌금 많이 드리고 말씀읽고 기도많이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요즘의 코로나 위험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하나님을 사랑한 나머지 무리한 대면예배로 인해 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빠뜨리고 상심케하는 일부 교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 난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에겐 그 출발조차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그저 나의 진심을 드리는 것이 유일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진심을 어떻게 드립니까?
우리는 진심 조차 얼마든지 속일 수 있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내 진심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곳이 있습니다.
그 곳에서 진심을 드리면 됩니다.
바로 가정입니다.
바로 내 일터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지구 반대편의 이름모를 세계 인류를 사랑하라는 거창하고도 범세계적인 구호가 아니었습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 내 가족, 내 이웃, 내 동료들을 사랑하라는 너무나 소박하고 단순한 숙제입니다.
가족과 동료들이야말로 나 자신에게보다 더 나의 진심을 수시로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족과 동료들을 편가르기나 편애함없이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족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기본 단위를 통해 각 사람을 성장시키십니다.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 가정을 통해 아내를 위해 부모와 자식을 위해 나의 개인적인 쾌락과 욕구를 희생하는 법을 배우게 하십니다.
내 맘대로 안되는 배우자와 자식을 통해 자신의 혈기과 폭력성의 무용함과 폐악성을 깨닫고 온유하고 인내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기적인 이웃을 향한 희생과 인내를 통해 욕심의 허무함과 자존심의 미련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가족과 동료라는 연마석을 통해 더욱 다듬어지고 더욱 광이 나는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족은 최소 기본 단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족이 흔들리면 하나님의 나라가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충격적이고 황당하기까지한 코로나 상황을 통해 최소한 한가지 진리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온전히 세우시기위해 하나님께서 최소 기본 단위를 강하게 세우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바로 가정을 회복시키시고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교회 성장을 위해, 사업 성공을 위해, 대학진학과 취업을 위해 가장 먼저 희생되었던 가족을 다시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합니다.
어머니 한 사람 새벽기도나가면 온 가족이 구원받고 형통할 것이라는 왜곡된 믿음들이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교회를 통해 사업의 성장을 도모하고 교회의 힘과 규모를 이용하여 정치적인 이익을 도모하려던 쭉정이 믿음들이 뽑혀져 나가는 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동안 돈과 쾌락에 눈이 멀고 감각이 마비되어 세상의 노예였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자유케하시려고 하십니다.
제 2의 출애굽이라는 절체절명의 시대에 사는 우리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나라의 최소 단위인 가정을 다시 살리기 원합니다.
어린 양의 고기를 함께 나누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나누는 가정이 되기를 원합니다.
가정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의 시험대임을 깨닫고 가정을 통해 새롭게 변화받는 사람이 됩시다. 아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첫달을 선포하십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달력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를 민간력 또는 애굽력이라고 합니다.
티쉬리(1월), 헤쉬반(2월), 키슬루(3월), 테벳(4월), 스밧(5월), 아달(6월), 니산(7월), 이야르(8월), 시완(9월), 탐무즈(10월), 아브(11월), 엘룰(12월)
그런데 하나님께서 본문에 이 달을 해의 첫 달이 되게하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본문의 이 달은 니산 즉 일곱번째 달입니다.
일곱번째이던 니산이 1월이 되고 기존의 1월이었던 티쉬리가 7월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종교력, 또는 성서력이라고 부릅니다.
종교력과 민간력은 첫달의 기준만 다르지 실제는 동일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공식적으로 종교력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유대력이란 종교력 또는 성서력을 말하며, 민간력은 여기에다 6개월만 더하면 됩니다.
유대력 = 성서력, 종교력 = 민간력, 애굽력 + 6
그리고 유대력은 19년마다 6개월의 윤달을 가짐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태양력과 대략 2개월 또는 3개월 차이가 납니다.
태양력 = 유대력 + 2,3
달력하나 보는데 이렇게 복잡해서 어떻게 성경공부하겠느냐 싶지만 서양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음력 구정설을 대하는 입장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유대력에 따라 절기를 지키지 않으므로 실제 믿음 생활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습니다.
우리는 부활절, 성령강림절, 맥추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을 해마다 기독교계의 협의하에 태양력을 기준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더욱 쉽게 말해 교회에서 나눠드린 달력을 보시면 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임박한 상황에서 본문의 새 달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의중은 도대체 무엇인지 알아봐야합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역사적으로 새해 첫 달은 새로운 왕의 즉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왕이 즉위하는 날을 새해 첫달로 삼는 경우가 역사를 통해 빈번히 있었습니다.
바로 새로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신다는 메세지입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압제에서 해방시키시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새로운 나라로 세우시는 출발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궁극적 의미를 뜻합니다.
죄의 노예였던 우리를 죽음의 형벌에서 구해주심과 함께 우리와 함께 새로운 나라를 세우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본문 41절에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에서 여호와의 군대는 이스라엘 백성을 말하는 것으로 한 국가의 필수요소인 군대라는 명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소속을 구체화 하고 있습니다.
3절부터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3-4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잡을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잡고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최소 단위는 사람이 아니라 가정입니다.
여기서 가정은 친족 뿐만 아니라 내 옆의 이웃과 동료들을 포함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구원받는 것마저도 철저히 개인적인 일로 규정합니다.
이는 성경이 일관적으로 부인하는 개념입니다.
물론 회개하고 믿고 영접하는 것은 남이 대신해 줄 수 없는 본인 스스로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이 있기까지 그리고 구원받아 성화되는 과정은 결코 개인적인 차원이 아닌 공동체적 차원임을 본문은 명확히 밝힙니다.
어린 양을 식당이나 가게에서 대량으로 조리한 후 일인분씩 소포장해서 구입해 먹으면 간단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마리씩 가족단위로 그 식구를 위하여 취하게 하셨습니다.
양 한마리를 다 먹기에는 인원이 부족한 일인가족의 경우 비슷한 처지의 이웃들과 함께 나누게 하셨습니다.
앞으로 40년 동안의 기나긴 여정을 앞 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린 양을 함께 나눠먹음으로 가족단위의 결속력은 더욱 강화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일인가구 시대를 맞아 일회용 일인용 상품과 음식들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에는 일인분이 없습니다.
나 혼자 믿고 나 혼자 구원받는다는 개념은 성경에 없는 것으로서 지극히 소승불교스러운 위험한 사상입니다.
종교적인 열성은 어려워보이지만 실상 누구나 다 가능합니다.
얼마든지 거짓으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배우자, 자녀, 부모님과의 관계는 차원이 다릅니다.
가족과의 관계는 숨길 수 없는 본인의 실체를 나타내는 바로미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구 반대편의 굶주리고 있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전에 내 곁의 형제, 내 옆의 이웃과 화해하고 화목하기를 원하십니다.
가족과 이웃은 나라는 존재의 실체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대단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느냐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답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잘못 이해합니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 다음에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구절은 순서를 뜻하지 않습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할 수 없는 공존을 나타냅니다.
마태복음 5 장 23 절 - 24 절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 또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린다는 것은 제사이며 오늘날 예배를 말합니다.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이 화목과 화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들어도 꽤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우리는 실상 무엇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지 잘 모릅니다.
열심히 교회다니고 전도 많이하고 헌금 많이 드리고 말씀읽고 기도많이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요즘의 코로나 위험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하나님을 사랑한 나머지 무리한 대면예배로 인해 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빠뜨리고 상심케하는 일부 교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 난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에겐 그 출발조차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그저 나의 진심을 드리는 것이 유일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진심을 어떻게 드립니까?
우리는 진심 조차 얼마든지 속일 수 있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내 진심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곳이 있습니다.
그 곳에서 진심을 드리면 됩니다.
바로 가정입니다.
바로 내 일터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지구 반대편의 이름모를 세계 인류를 사랑하라는 거창하고도 범세계적인 구호가 아니었습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 내 가족, 내 이웃, 내 동료들을 사랑하라는 너무나 소박하고 단순한 숙제입니다.
가족과 동료들이야말로 나 자신에게보다 더 나의 진심을 수시로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족과 동료들을 편가르기나 편애함없이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족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기본 단위를 통해 각 사람을 성장시키십니다.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 가정을 통해 아내를 위해 부모와 자식을 위해 나의 개인적인 쾌락과 욕구를 희생하는 법을 배우게 하십니다.
내 맘대로 안되는 배우자와 자식을 통해 자신의 혈기과 폭력성의 무용함과 폐악성을 깨닫고 온유하고 인내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기적인 이웃을 향한 희생과 인내를 통해 욕심의 허무함과 자존심의 미련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가족과 동료라는 연마석을 통해 더욱 다듬어지고 더욱 광이 나는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족은 최소 기본 단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족이 흔들리면 하나님의 나라가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충격적이고 황당하기까지한 코로나 상황을 통해 최소한 한가지 진리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온전히 세우시기위해 하나님께서 최소 기본 단위를 강하게 세우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바로 가정을 회복시키시고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교회 성장을 위해, 사업 성공을 위해, 대학진학과 취업을 위해 가장 먼저 희생되었던 가족을 다시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합니다.
어머니 한 사람 새벽기도나가면 온 가족이 구원받고 형통할 것이라는 왜곡된 믿음들이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교회를 통해 사업의 성장을 도모하고 교회의 힘과 규모를 이용하여 정치적인 이익을 도모하려던 쭉정이 믿음들이 뽑혀져 나가는 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동안 돈과 쾌락에 눈이 멀고 감각이 마비되어 세상의 노예였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자유케하시려고 하십니다.
제 2의 출애굽이라는 절체절명의 시대에 사는 우리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나라의 최소 단위인 가정을 다시 살리기 원합니다.
어린 양의 고기를 함께 나누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나누는 가정이 되기를 원합니다.
가정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의 시험대임을 깨닫고 가정을 통해 새롭게 변화받는 사람이 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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