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픔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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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오늘은 예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대신 죽으시려고 비실거리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왜 종려 주일이라고 합니까? 예수님이 지나갈 때 백성들이 자기들의 옷을 벗어 길에 깔고 종려 나뭇가지를 꺾어 호산(마21:15절) 다윗의 자손이여 하며 찬송을 했기 때문입니다. 호산나는 원어로 “호쉬아나”(시118:25)에서 유래된 환호성의 일종으로 직역하면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가 기도하나이다”란 의미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종려 주일이라고 하며 내일부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돌아오는 주일 전날 토요일(3월22일)까지를 고난 주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군중의 환호를 보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시기하여 예수를 죽일 방책을 연구했는데 예수님의 일행 중 돈 전대를 맡았던 가룟 유다를 은30냥에 매수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눅22:44) 감람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오는 예수를 성전 군관들을 동원하여(눅22:52) 다짜고짜 체포하여 빌라도 법정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고소한 죄목은 무엇이었습니까? “백성을 미혹(迷惑)하고 가이사에게 세(稅 )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눅23:2)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곧 “신성모독”이라는 “종교적 죄목”으로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종교지도자들은 (마26:64-66) 간교하게도 예수님을 민중을 선동, 납세거부 등 주로 정치적 죄목으로 총독 빌라도에게 고소했던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이 납세 거부자였습니까? 눅20:22절에 이하에 보면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으려고 “가이사(로마황제)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한가? 불가한가? 물었을 때 예수님은 분명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말씀했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어찌 납세거부자입니까? 왜 예수님이 민중을 선동했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들을 살려주셨고 선행을 권장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며 영원히 죽지 않을 천국의 복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그 보혈의 공로로 우리의 죄가 사함 받아 영원히 죽지 않을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33년의 생애동안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산 시간은 전혀 없었습니다. 30세까지 목수 생활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고, 3년간 공생애 기간 동안은 머리 둘 장소도 없이 제자들을 거느리고 발길 닿는데로 다니며 생활전체로 천국 복음만 전했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왜 검거되어 고문을 당해야 했습니까?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머리에 씌우고, 침을 뱉고 갈대로 머리를 쳤습니다. 십자가에 양손과 양발에 대못을 박고 옆구리를 로마병정이 창으로 찌르자 물과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조금만 압전에만 찔려도 아프고, 요리하다 손만 조금 상해도 쓰린데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러한 아픔을 당하시며 견디셨던 것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였느니라”(롬5:8)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어 죄 없는 예수님을 그토록 비통하게 죽게 하여 대신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도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의 목에 칼을 꽂으려 했던 그 심정 이상으로 마음이 아프셔서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9시까지 계속하더니(마27:45절) 라고 기록된 것처럼 차마 예수님이 당하시는 그 비통한 모습을 보실 수 없어 눈을 감아 버리셨던 것 같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이 죽는 모습을 눈 뻔히 뜨고 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은 그 고통을 견디어 가시며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대신 못 박히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때 박은 못이 여기 있습니다. 이 못은 그때 박은 그곳과 무게와 크기를 똑같이 재현시킨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그 아픔을 맛보고 싶으면 앞으로 나오세요. 나도 눈 딱 감고 박아 보았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상상해도 예수님의 그 아픔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 혹한과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전투를 하다 자기 부대에서 이탈되어 러시아 코사크 군대에게 쫓기게 되었습니다. 도망가다 골목에 있는 모피 상안으로 뛰어들어 숨겨줄 것을 애원했습니다. 그때 모피상 주인은 재빨리 모피 속으로 몸을 숨기고 모피로 잔뜩 덮어버렸습니다. 러시아 군인들이 문을 부수고 뛰어 들어오자 모피상 주인이 항의했더니 집안을 샅샅이 뒤지며 모피 더미에 창으로 푹푹 쑤셨습니다. 결국 찾지 못하고 돌아가자 곧 나폴레옹의 수비대가 나폴레옹을 옹위하고 나갔습니다. 그때 모피상 주인도 간이 섬짓하여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당신처럼 위대한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꼭 알고 싶습니다. 죽을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에 모피 더미 안에 숨어 있을 때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때 나폴레옹은 벌컥 화를 내며 성난 목소리로 무엄하게 “그 따위 질문을 함부로 하는가? 병사들은 저 건방진 놈을 밖으로 끌어내 당장 총살시켜라. 내가 직접 명령을 내리겠다”고 호통을 치자 가련한 모피 상인은 수비대에 체포되어 눈을 가린 채 기둥에 묶었습니다. 수비대가 일렬로 서서 장전하는 소리가 철컥철컥 들렸습니다. 그때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다리가 오들오들 떨리고 가슴은 절망감으로 콩닥거렸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목을 가다듬고 ‘사격준비, 조준’ 하고 명령했습니다. 이제 자신이 죽는다는 생각을 할 때 모피 상인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쳐 눈물이 뺨을 적셨습니다. 한참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더니 모피 상인을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갑자기 눈을 가렸던 안대가 풀렸고 햇빛에 눈이 부셨습니다. 그때 자신의 눈을 깊이 바라보면 나폴레옹이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알 것이요, 내가 그때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여러분, 아무리 여러분이 상상해 보아도 예수님의 그 아픔을 모르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그래도 조금은 근사하게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김재준 집사입니다. 저 아래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고 올라와 교회 입구 빌라도 법정에서 고문을 당하고 얻어맞으며 계단을 올라와 십자가에 못 박히는 드라마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때 로마 병정들은 사정없이 채찍으로 갈겼습니다. 여러분들도 예수님의 아픔이 얼마나 컸던 가를 알고 싶으면 이 쇠못에 박혀 보셔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아픔을 당하셨던가를 생각해 봅시다.
1. 배신당한 아픔입니다.
마21장에서 예루살렘에서 나귀를 타고 입성할 때 군중들은 자기들의 입은 옷을 벗어 길에 깔아주었고 종려나무 가시를 꺾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환호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잡을 방책을 연구했고, 예수님 일행의 돈 전대를 맡아보면 바로 12제자 중 하나였던 유다가 배신하여 예수를 넘겨주었습니다. 그것도 가증스럽게 예수님과 입을 쪽 맞추며 “랍오니여”(선생님이여)했습니다. 그것이 곧 군호였던 것입니다. 그때 유다는 강도를 잡는데 사용하는 몽치 든 군관들을 데리고 왔습니다.(눅22:52) 이 얼마나 가증스런 배신입니까? 구세주 예수님을 노예 1명 값인 은 30냥에 이렇게 팔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뒤 22장 54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구차스럽게 자기 목숨 살아 보겠다고 예수님이 보시고 계시는 바로 눈앞에서 계집종과 다른 종들에게 자기는 예수를 알지도 못하며 절대 예수당이 아니라고 세 번이 팔팔 잡아떼었습니다. 그 뿐입니까? 그렇게 예수님을 환영하고 환호하던 군중들마저 금세 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습니다.(마27:23, 눅23:21) 군병들은 예수님 얼굴에 침을 뱉고 갈대로 머리를 쳤습니다. 이 얼마나 모독스런 행위입니까? 심지어는 가짜 면류관을 만들어 씌우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하고 희롱했습니다. 예수님을 쫓던 제자들은 다 도망 가 버렸고 십자가 아래는 요한과 여자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여러분, 아픔 중에서 제일 큰 아픔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배신당한 아픔입니다. 사기 당해 보셨어요? 사기도 일종의 배신입니다. 믿고 보증서 주었더니 속여 먹어 버렸습니다. 믿고 사랑했더니 하루아침에 변심 해 버렸습니다. 그때 살맛 안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배신의 쓰라린 아픔을 당했습니다.
2. 형벌의 아픔이었습니다.
사람이 맞을 짓을 하고 맞으면 그래도 덜 억울합니다. 그런데 자기들을 구원하려고 기나긴 역사 속에서 계시로 보여주었고 이제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 죄 없는 예수님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했습니까? 재판관 빌라도는 세 번이나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눅23:22) 심지어 빌라도 아내까지도 예수님이 아무 죄가 없고 옳은 사람임을 꿈에 보았으니 손대지 말라고 사람을 보내어 빌라도에게 귀띔까지 해 주었습니다.(마27: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군중들이 민란을 일으킬까 겁이 나서 얼마나 혹독한 고문을 했습니까? 가죽 끝에 뼛조각이나 쇠 구슬을 달아 한 번씩 몸을 휘감아 내려치며 그것들이 살에 박혀 밭고랑처럼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골이 파였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예수님에게 친히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게 했습니다. 너무도 괴롭고 힘들어 13번이나 넘어졌답니다. 군병들은 그때마다 후려치며 재촉했고 벤허 영화에 보면 물도 못주게 바가지를 차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기진맥진한 예수님을 제일 높은 십자가에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아 중앙에 높이 세웠던 것입니다. 이마에는 가시관에 찔려 붉은 피가 얼굴을 적셨고 양손과 양팔은 찢어져 내렸습니다.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는 물과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얼마나 아프셨으면 “엘리 엘리 나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27:46)하고 외치셨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이 이렇게 우리의 죄짐을 지고 죽으셨기에 우리는 죽지 않고 살게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나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모진 고통을 당하시며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입니다. 고난 주간을 앞두고 이 기간만이라도 예수님의 그 고난을 내 고난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 때문에 고생하신 부모님을 생각하는 자녀는 웬만한 고난도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를 대신하여 그처럼 처절한 고통을 당하신 그 예수님을 깊이 묵상해 보시는 고난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롬8:6)이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여러분을 사랑하신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의 모든 짐도 대신 져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롬8:32절에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라고 반문하셨습니다. 여러분을 살리시기 위하여 그처럼 모진 고통을 당하고 돌아가신 예수님은 영으로 오셔서 여러분과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마28:20)
3. 버림당한 아픔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버림당하셨습니다. 그래도 그것은 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까지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엘리 엘리 나마 사박다니”라고 십자가상에서 외치셨던 것입니다. 견딜 수 없는 육신의 고통을 당하면서 너무도 처절했기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도우심을 바랐으나 끝내 버림 당하셨습니다. 그 아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버림당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독생자 예수를 제물로 삼으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보다 더 아픔 고통을 참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곧 “죄인 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었던 것입니다.(롬5:8) 오죽 마음이 아프셨으면 3시간 동안이나 눈을 감아 버리셨겠습니까? 이러한 하나님과 예수님의 아픔 때문에 우리는 죄속함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그러한 고통과 아픔을 통하여 “우리를 거스리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塗抹)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셨습니다.(골2:14) 그러므로 우리는 그 예수 안에 자유케 되었습니다. 죄로부터 자유, 죽음으로부터 자유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 요8: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예수)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는데 그 여섯 번째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다 이루었다” 였습니다. 그 말씀은 헬라 원어로 “ΤεΤελοσταί”(테테로 스타이)입니다. 그 뜻은 형을 받고 감옥에 있던 죄수가 형기를 마치고 석방될 때 죄 패에 붉은 두 줄을 끝고 형리가 써주는 일종의 석방장 입니다. 그것만 가지고 있으면 더 이상 동일한 죄로 검거나 구속되지 않습니다. 그 죄로부터 완전자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죽을 죽음을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의 법조문으로 쓴 죄의 증서를 깨끗이 painting out(깨끗이 지음) 해 버리신 것입니다. 이제 그 아픔과 고통을 우리 대신 당하시고 죽으신 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영원히 죽음으로부터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죄 값은 사망” 이라고 했으니 이제 여러분의 죄가 다 씻어졌는데 죽을 리 없지 않습니까? 이것이 기독교의 구원입니다. ♪143장(구141장) 2절까지 주님의 은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조금만 압전에만 찔려도 아프고, 요리하다 손만 조금 상해도 쓰린데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러한 아픔을 당하시며 견디셨던 것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였느니라”(롬5:8)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어 죄 없는 예수님을 그토록 비통하게 죽게 하여 대신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도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의 목에 칼을 꽂으려 했던 그 심정 이상으로 마음이 아프셔서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9시까지 계속하더니(마27:45절) 라고 기록된 것처럼 차마 예수님이 당하시는 그 비통한 모습을 보실 수 없어 눈을 감아 버리셨던 것 같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이 죽는 모습을 눈 뻔히 뜨고 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은 그 고통을 견디어 가시며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대신 못 박히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때 박은 못이 여기 있습니다. 이 못은 그때 박은 그곳과 무게와 크기를 똑같이 재현시킨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그 아픔을 맛보고 싶으면 앞으로 나오세요. 나도 눈 딱 감고 박아 보았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상상해도 예수님의 그 아픔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 혹한과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전투를 하다 자기 부대에서 이탈되어 러시아 코사크 군대에게 쫓기게 되었습니다. 도망가다 골목에 있는 모피 상안으로 뛰어들어 숨겨줄 것을 애원했습니다. 그때 모피상 주인은 재빨리 모피 속으로 몸을 숨기고 모피로 잔뜩 덮어버렸습니다. 러시아 군인들이 문을 부수고 뛰어 들어오자 모피상 주인이 항의했더니 집안을 샅샅이 뒤지며 모피 더미에 창으로 푹푹 쑤셨습니다. 결국 찾지 못하고 돌아가자 곧 나폴레옹의 수비대가 나폴레옹을 옹위하고 나갔습니다. 그때 모피상 주인도 간이 섬짓하여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당신처럼 위대한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꼭 알고 싶습니다. 죽을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에 모피 더미 안에 숨어 있을 때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때 나폴레옹은 벌컥 화를 내며 성난 목소리로 무엄하게 “그 따위 질문을 함부로 하는가? 병사들은 저 건방진 놈을 밖으로 끌어내 당장 총살시켜라. 내가 직접 명령을 내리겠다”고 호통을 치자 가련한 모피 상인은 수비대에 체포되어 눈을 가린 채 기둥에 묶었습니다. 수비대가 일렬로 서서 장전하는 소리가 철컥철컥 들렸습니다. 그때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다리가 오들오들 떨리고 가슴은 절망감으로 콩닥거렸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목을 가다듬고 ‘사격준비, 조준’ 하고 명령했습니다. 이제 자신이 죽는다는 생각을 할 때 모피 상인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쳐 눈물이 뺨을 적셨습니다. 한참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더니 모피 상인을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갑자기 눈을 가렸던 안대가 풀렸고 햇빛에 눈이 부셨습니다. 그때 자신의 눈을 깊이 바라보면 나폴레옹이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알 것이요, 내가 그때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여러분, 아무리 여러분이 상상해 보아도 예수님의 그 아픔을 모르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그래도 조금은 근사하게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김재준 집사입니다. 저 아래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고 올라와 교회 입구 빌라도 법정에서 고문을 당하고 얻어맞으며 계단을 올라와 십자가에 못 박히는 드라마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때 로마 병정들은 사정없이 채찍으로 갈겼습니다. 여러분들도 예수님의 아픔이 얼마나 컸던 가를 알고 싶으면 이 쇠못에 박혀 보셔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아픔을 당하셨던가를 생각해 봅시다.
1. 배신당한 아픔입니다.
마21장에서 예루살렘에서 나귀를 타고 입성할 때 군중들은 자기들의 입은 옷을 벗어 길에 깔아주었고 종려나무 가시를 꺾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환호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잡을 방책을 연구했고, 예수님 일행의 돈 전대를 맡아보면 바로 12제자 중 하나였던 유다가 배신하여 예수를 넘겨주었습니다. 그것도 가증스럽게 예수님과 입을 쪽 맞추며 “랍오니여”(선생님이여)했습니다. 그것이 곧 군호였던 것입니다. 그때 유다는 강도를 잡는데 사용하는 몽치 든 군관들을 데리고 왔습니다.(눅22:52) 이 얼마나 가증스런 배신입니까? 구세주 예수님을 노예 1명 값인 은 30냥에 이렇게 팔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뒤 22장 54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구차스럽게 자기 목숨 살아 보겠다고 예수님이 보시고 계시는 바로 눈앞에서 계집종과 다른 종들에게 자기는 예수를 알지도 못하며 절대 예수당이 아니라고 세 번이 팔팔 잡아떼었습니다. 그 뿐입니까? 그렇게 예수님을 환영하고 환호하던 군중들마저 금세 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습니다.(마27:23, 눅23:21) 군병들은 예수님 얼굴에 침을 뱉고 갈대로 머리를 쳤습니다. 이 얼마나 모독스런 행위입니까? 심지어는 가짜 면류관을 만들어 씌우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하고 희롱했습니다. 예수님을 쫓던 제자들은 다 도망 가 버렸고 십자가 아래는 요한과 여자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여러분, 아픔 중에서 제일 큰 아픔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배신당한 아픔입니다. 사기 당해 보셨어요? 사기도 일종의 배신입니다. 믿고 보증서 주었더니 속여 먹어 버렸습니다. 믿고 사랑했더니 하루아침에 변심 해 버렸습니다. 그때 살맛 안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배신의 쓰라린 아픔을 당했습니다.
2. 형벌의 아픔이었습니다.
사람이 맞을 짓을 하고 맞으면 그래도 덜 억울합니다. 그런데 자기들을 구원하려고 기나긴 역사 속에서 계시로 보여주었고 이제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 죄 없는 예수님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했습니까? 재판관 빌라도는 세 번이나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눅23:22) 심지어 빌라도 아내까지도 예수님이 아무 죄가 없고 옳은 사람임을 꿈에 보았으니 손대지 말라고 사람을 보내어 빌라도에게 귀띔까지 해 주었습니다.(마27: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군중들이 민란을 일으킬까 겁이 나서 얼마나 혹독한 고문을 했습니까? 가죽 끝에 뼛조각이나 쇠 구슬을 달아 한 번씩 몸을 휘감아 내려치며 그것들이 살에 박혀 밭고랑처럼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골이 파였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예수님에게 친히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게 했습니다. 너무도 괴롭고 힘들어 13번이나 넘어졌답니다. 군병들은 그때마다 후려치며 재촉했고 벤허 영화에 보면 물도 못주게 바가지를 차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기진맥진한 예수님을 제일 높은 십자가에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아 중앙에 높이 세웠던 것입니다. 이마에는 가시관에 찔려 붉은 피가 얼굴을 적셨고 양손과 양팔은 찢어져 내렸습니다.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는 물과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얼마나 아프셨으면 “엘리 엘리 나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27:46)하고 외치셨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이 이렇게 우리의 죄짐을 지고 죽으셨기에 우리는 죽지 않고 살게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나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모진 고통을 당하시며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입니다. 고난 주간을 앞두고 이 기간만이라도 예수님의 그 고난을 내 고난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 때문에 고생하신 부모님을 생각하는 자녀는 웬만한 고난도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를 대신하여 그처럼 처절한 고통을 당하신 그 예수님을 깊이 묵상해 보시는 고난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롬8:6)이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여러분을 사랑하신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의 모든 짐도 대신 져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롬8:32절에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라고 반문하셨습니다. 여러분을 살리시기 위하여 그처럼 모진 고통을 당하고 돌아가신 예수님은 영으로 오셔서 여러분과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마28:20)
3. 버림당한 아픔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버림당하셨습니다. 그래도 그것은 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까지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엘리 엘리 나마 사박다니”라고 십자가상에서 외치셨던 것입니다. 견딜 수 없는 육신의 고통을 당하면서 너무도 처절했기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도우심을 바랐으나 끝내 버림 당하셨습니다. 그 아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버림당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독생자 예수를 제물로 삼으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보다 더 아픔 고통을 참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곧 “죄인 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었던 것입니다.(롬5:8) 오죽 마음이 아프셨으면 3시간 동안이나 눈을 감아 버리셨겠습니까? 이러한 하나님과 예수님의 아픔 때문에 우리는 죄속함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그러한 고통과 아픔을 통하여 “우리를 거스리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塗抹)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셨습니다.(골2:14) 그러므로 우리는 그 예수 안에 자유케 되었습니다. 죄로부터 자유, 죽음으로부터 자유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 요8: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예수)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는데 그 여섯 번째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다 이루었다” 였습니다. 그 말씀은 헬라 원어로 “ΤεΤελοσταί”(테테로 스타이)입니다. 그 뜻은 형을 받고 감옥에 있던 죄수가 형기를 마치고 석방될 때 죄 패에 붉은 두 줄을 끝고 형리가 써주는 일종의 석방장 입니다. 그것만 가지고 있으면 더 이상 동일한 죄로 검거나 구속되지 않습니다. 그 죄로부터 완전자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죽을 죽음을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의 법조문으로 쓴 죄의 증서를 깨끗이 painting out(깨끗이 지음) 해 버리신 것입니다. 이제 그 아픔과 고통을 우리 대신 당하시고 죽으신 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영원히 죽음으로부터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죄 값은 사망” 이라고 했으니 이제 여러분의 죄가 다 씻어졌는데 죽을 리 없지 않습니까? 이것이 기독교의 구원입니다. ♪143장(구141장) 2절까지 주님의 은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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