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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기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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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회 작성일 08-02-20 00:36 조회 12,57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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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에 만났던, 내 인생을 변하게 했던 친구가 있습니다. 가을바람에 떨어져 뒹군 나뭇잎만 보아도 껄껄대고 웃었습니다. 다른 동기생인 장(張)형은 야! 그렇게 재미있느냐? 하며 별 것을 보고 다 웃는구나 하면 재미있지 않아 또 구르네. 또 굴러 하며 웃으면 모두가 어이가 없어 웃어버리곤 했습니다. 바로 그 친구가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던 지금 서울 강성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박요일목사입니다. 그 친구 주위에는 다 불교나 원불교 성향을 가진 친구들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자취생활을 하고 있을 때나 엄연히 아침 식사 당번인데도 새벽에 없어졌다 늦게 돌아오므로 번번이 우리의 속을 타개 만들었습니다. 주일날이라도 같이 한번 어울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새벽기도회와 주일 예배 참석 때문이었습니다. 누가 눈치를 하든 말든 그저 묵묵히 자기 방식대로 살았고 핀잔을 주어도 싱글벙글 웃기만 하고 농담 따먹기로 우리를 웃기니 나무라는 우리까지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나는 그 친구가 주책바가지 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렇지만 왠지 정이 끌리고 좋아서 결국 지내다 보면 그 친구가 원하는 쪽으로 끌려가곤 했습니다. 그 친구는 알고 보니 아버님이 장로였고 어머님은 권사였습니다. 너무도 가산(家産)이 어려워 고아원 혜택을 받아 고등학교까지 겨우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도 있을 곳이 없어 나에게 붙어살면서도 전혀 눈치 보는 일도 없고 항상 당당했으며 자기 길을 묵묵히 갔습니다. 허파에 바람 든 사람처럼 근심 걱정은 전혀 해 보려고도 않고 항상 우리를 웃기며 또 웃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밉다가도 금방 좋아지는 무엇인가 인력(引力)을 지닌 그런 친구였던 것입니다. 사찰에 가서 1년 반 이상 규율 생활을 하며 불교의 “초발심 작용운”부터 조금이나마 금강경 강해까지 받고 제법 불교도(佛敎徒) 행세를 해 왔던 나로서는 거슬리는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좋았던 그 친구, 지금도 만나면 가슴이 시원해지는 그 친구를 이제야 이해 할 수 있게 되고 보니 나는 역시 한참 뒤떨어진 사람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 친구나 나나 사시(司試詩)에 몇 번 고배를 마시고 결굴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 친구는 나 보다 저만큼 앞서가고 교회가 크고 작고를 떠나 올려다 보이는 친구입니다. 신학쪽으로도 대석학자가 되어 교수생활을 하였으며 지금은 목동에 맘모스 교회를 세워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여튼 내가 특히 부러워했던 점은 그 친구는 누구하고도 쉽게 접근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교수면 교수, 정가의 인물이던, 법조계 인물이던, 아이부터 어른까지 금방 친해 집니다. 그 친구에게는 마음에 울타리가 없어요. 누구든 어디든 어디서나 웃기고 웃습니다. 억지가 없었습니다. 웃는 것도 사물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도 물 흐르듯 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주장은 분명했고 언제든 물꼬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돌리던 그 친구야 말로 이미 목적에 이끌려 가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나는 그 친구에 의해 전도되어 개종했고 지금은 목사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그 친구와의 만남은 나의 삶의 방향까지 바꾸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야 나도 알았습니다. 그 친구가 그렇게 살았던 비밀은 곧 그 친구 속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 속에서 그들 움직였기에 그 친구의 낙천적인 삶과  항상 웃을 수 있었던 그 웃음, 그 여유가 나왔던 것입니다. 그 친구의 웃음은 억지웃음이 아니었습니다. 그 친구의 생각은 너무도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랬기에 누구나 거부감이 없었고 금방 동화되었습니다.
별거 아닌 것 같으면서도 언제나 대화의 분위기는 그 친구 쪽으로 쏠렸고 그냥 기쁘게 시간을 보내다 기쁘게 헤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진지함이 있었고 결론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것은 그 친구가 타고난 자질이요,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성품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크리스천의 모습이었습니다. 코미디언들의 억지로 웃겨 보려는 그러한 작업과는 너무도 다른 내면에서 솟아 나오는 진실이었습니다. 옹달샘에서 맑은 물이 계속 솟아나오듯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으로부터 발산되는  삶의 에너지요, 지혜였습니다. 그 성령님이 나를 주장하므로 우러나오는 평강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paul  사도는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면 항상 기뻐할 수밖에 없음을 체험한 고백입니다. 기독교를 그렇게도 핍박하고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서 죽게 할 때 독려하며 입회했던 그 사울이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그렇게 변해 버렸습니다.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한마디로 바울은  속에서 솟아나는 기쁨을 도저히 억제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영인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면 누구든지 바울사도와 같이 기뻐서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님은 생명의 영입니다. 성령님은 능력의 영입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그 전능하신 영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 승리한 영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의 방해를 받지 않습니다. 무엇이나 성령님의 의지대로 성취하십니다. 그래서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되는 것도 그  성령님으로는 다 된다고 했습니다.(슥4:6) 그 예수의 영이 그 속에 있는 사람은 그래서 항상 기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힘과 능력과 자신감과 확신이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나는데 그런 사람의 삶은 얼마나 자연스럽겠습니까? 얼마나 당당하겠습니까? 그러니 평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평안하냐?” 물으셨고 숨을 내쉬면서 “성령 받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평안하냐?”고 하신 말씀은 역으로 왜 떨고 있느냐?는 의미였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사순절을 기도하며 보냅시다. 주님의 구속의 은혜를 깊이 감하며 성령 충만 해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성령 받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아셨습니다.
육신의 지혜와 힘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고 가르쳐  보아야 헛수고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약속한 성령을 기다리라고 당부하셨고 제자들은 그 성령을 받자 확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전도의 불이 붙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임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변화가 옵니까?

1. 기쁨이 솟아납니다
여러분, 탤런트 전은주씨를 아시지요? 그 분이 늘씬하고 잘 생겼습니까?
솔직히 짜리몽땅합니다. 얼굴도 귀염성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치아마저 뻐등등하여 구강 구조도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기가 대단하지요, 어디든지 그 분이 등장하면 웃음바다가 됩니다.  그분이 처음에 탤런트로 입문했을 때 주로 맡은 배역은 식모역이나, 아기 담사리, 청소부 역이었답니다. 그 분의 소망은 나도 멋진 배역이나 주인공 한번 해 보는 것이었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새벽시장에 갔다가 생선장수 아줌마가 껄껄 웃으며 물건을 파는데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들더랍니다. 그래서 바로 저거야, 나도 냅다 웃어보자, 하고 무조건 웃어댔더니 그 웃음 때문에 떴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까지 좋다보니 그 분의 웃음은 듣는 사람들의 막힌 가슴을 확 터지게 하는 위력이 있어 탤런트계의 대모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억지로 웃어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데 성령님의 역사로 속에서 기쁨이 솟아난다면 얼마나 웃음의 위력이 크겠습니까? 이제야 알 고보니 내 친구 목사님의 자연스러움은 다 그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역사였음을 알았습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안에 있기 때문에 속에서 기쁨이 절로 솟아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면 성격이 변합니다. 기쁨이 넘치고 용기가 생깁니다.
자신감이 넘칩니다. 근심과 걱정이 물러가고 소망이 생깁니다. 우울증 환자가 고침 받고, 각종 질병이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마음이 즐거우니 웬만한 질병은 자연 치유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근심이 물러가니 낙천적인 성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2. 성령님이 계시면 여유가 만만합니다
황수관 박사이야기를 들으니 영국에 처칠 수상은 여유가 만만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바지에 지퍼가 열린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이 지적하자 새장 문이 열러 있어도 죽은 새는 날아가지 않는다고 오히려 자연스럽게 농담으로 받아 넘겼다고 합니다. 한번은 욕실에서 벗은 채로 나오는데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이 거실에 앉아 있더랍니다.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그런데 태연스럽게 영국 국무장관이 미국 대통령에게 감출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웃으며 넘기더랍니다. 얼마나 여유스럼이 있는 농담입니까?
우리 크리스챤들은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조그만 일에 전전긍긍하며 초조하고 불안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데 무엇이 그렇게 조급하고 두려울 것 있습니까? 사울왕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자 그는 얼마나 불안 초조했습니까? 그래서 죄 없는 다윗을 정적으로 알고 죽이려고 얼마나 쫓아 다녔습니까?
그러나 성령님이 함께 한 다윗은 얼마나 여유가 있었습니까? 사울이 잠들었을 때, 바로 자기 앞에서 용변을 하고 있을 때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처리 하실 것을 맡기고 복수심에 불타서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성령님이 그 안에 계시는 크리스챤은 여유가 있습니다. 말로는 “용서하라, 사랑하라” 하지만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은 죽은 회당회장의 딸의 시신 앞에서 태연하였습니다. 가족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시며 우는 자들에게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39)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의 시신만 본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영혼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 예수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예수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롬8:5-6절에 보면 “육신을 쫓는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쫓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조급하지 않습니다. 불안해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영에 속한 사람들로서 영의 생각을 해야 합니다.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여유롭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3. 진정한 크리스챤은 항상 기쁘게 삽시다(살전5:16-18)
오늘 본문 4:4절에서 하나님은 바울사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어떤 생활을 원하신다고 하셨습니까?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사람이 살다보면 기쁠 때도 있고, 괴로울 때도 있습니다. 즐거울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은  항상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도저히 미친 사람 아니고서는 항상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깊은 묵상을 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 사정을 뻔히 아시면서도 왜?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을까요? 살전 5:16절 이하에도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문장의 순서를 잘 보십시오. 기도하면 기뻐 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먼저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성경이 불가능한 것을 우리에게 억지로 강요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강요하므로 고통을 주실 분이 아니십니다. “항상 기뻐하라” 고 하신 말씀 속에는 마치 어버이가 어린아이들에게 내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 내가 항상 도와주고 책임져 주겠다는 말과 같은 사랑이 응축되어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므로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말라는 안타까운 권면입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6:25)고 당부 또 당부하셨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 않고 거두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잘 기르지 않느냐? 너희는 하나님께 그런것들보다 얼마나 귀한 존재이냐? 제발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재발견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영이 들어있습니다. 크리스챤들은 만세전부터 이미 택함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 하나님을 믿음으로 항상 기쁘게 살 수 있도록 오늘도 내일도 영원토록 보장 해 주십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우리의 죗값을 모두 속량 해 주신 후 죽어도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생명까지 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개발하고 활용하여 잘 살 수 있도록 지혜와 명철을 주어 과학문명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식수가 오염되고 공기가 오염되며, 석유가 바닥이 난다고 해도 그때는 그때대로 하나님의 대안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땅위에 우리가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면 다 공급해 주실 것이요, 천국으로 부르시려면 더 좋은  세계로 데려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최선의 노역을 다하면서 기쁘게 살아가는 것을 보기 좋아하십니다. 그렇게 살 수 있는 모든 기초를 충분히 확보 해 놓았고 또 정 힘들 때 기도하면 해결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주안에서, 곧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강권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항상 기뻐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사람이 확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성격이 변합니다. 기뻐하는 것 같이 좋은 약은 없습니다.(잠17:22) 그러니 불치병이 고침 받습니다. 웃으며 장사하니 손님이 모여 듭니다. 실패해도 믿음으로 다시 일어서니 최후의 성공 자가 됩시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는 속담도 있습니다. 웃어서 나쁠 것  없습니다. 크리스천은 부모 형제가 죽어서 울어도 슬픈 눈물이 아닙니다. 울어도 울어도 기뻐서 웁니다. 왜냐구요, 더 좋은 천국으로 갔으니까요? 사업이 꼬꾸라지고 실패해도 웃습니다. 내가 최선을 다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회복이 안 된다고 해도 거기에는 나에게 더 유익한 어떤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그때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는 말씀은 결코 억지가 아닙니다. 더더욱 지나간 말로 그저 해 보신 식언(食言)이 아닙니다. 여러분! 옹달샘은 끊임없이 속에서 생수가 솟아납니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닫고 도우시는 은혜를 깨달으면 우리 크리스천들 속에서는 기쁨이 저절로 밀고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억지로 웃게 해서 웃는 코미디언들 같은 웃음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 속에서 기쁨이 솟아나므로 웃으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크리스챤의 미소가 천만금짜리가 아니겠습니까?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사순절은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여 온갖 고난을 받으시고 내 생명의  영원한 담보물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한 그 사랑을 깊이 묵상하며 우리들의 믿음자세를 추스르자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살이가 힘들어 죽겠다고 한숨이나 짓고 절망하며 괴로워한다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당하신 모든 희생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주안에서 오늘도 행복하고 미래에도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며 기쁘게 살게 하시려고 그 고난을 겪으셨던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은 우리의 노력으로 천국 길을 닦기 위하여 시간 시간 교회에 나오고 힘에 겹도록 봉사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고 보장해 주셨기 때문에 감사하여 예배드리고 기뻐서 서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인생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잘못된 신앙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쁘게 삽시다. 생각만 바뀌면 얼마든지 항상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항상 기쁘게 삽시다” 서로 인사합시다. 그렇게 기쁘십니까? 됐습니다. 바로 그 모습 그대로 삽시다. 속에서 기쁨이 솟아나는데 누구를 미워하고 누구를 시기할 수 있습니까? 가장 위대한 힘은 사랑의 힘입니다. 강풍이 못 벗긴 옷, 태양이 한번 웃으니 홀딱 벗었다는 동화가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미소는 세상을 따뜻하게 할 것입니다.
놀라운 행운의 꽃을 피울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며 행복하게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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