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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러 가신 예수”눅 6:6-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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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회 작성일 12-03-24 11:41 조회 12,69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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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좋은 일만 하셨으나 못 당할 일을 당한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깨닫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본문 6장 말씀 이전에 나오는 누가복음 5장을 보면 ①예수님께서 밤이 맞도록 허탕 친 베드로에게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를 잡게 한 내용(1-11절) ②나병 들린 사람을 깨끗하게 고쳐주신 내용(12-16절)  ③중풍병자를 고치신 내용(17-26절) ④레위라는 세리를 세관에서 불러내어 제자를 삼은 내용(27-39절) 이 차례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예수님이 잘 한 일입니까? 잘못한 일입니까? 박수를 쳐야 할 일입니까? 성질 낼 일입니까? 그런데 그러한 예수님을 로마정부에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7절) 마치 손마른 사람을 고쳐주자 그 사람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님을 어떻게 고발할 까 패를 지어 의논했다고 했습니다.(11절)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많아지고 예수님의 인기가 높아지니 기뻐하고 격려하기는커녕 오히려 예수님을 잡아 죽일 구실을 찾으려 했습니다.


1. 이러한 분위기를 뻔히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얼마나 괴로우셨을까요?

이것이 오늘날 목사님들의 고통이기도 합니다. 호주의 의사 테일러(cedric Tayler) 박사는 Revcide(목사 살해)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언뜻 제목만 보면 탐정 소설 같지만 사실은 목사들에 관하여 진지하게 연구한 보고서입니다. 그 책의 내용 중에 목사들의 건강은 몹시 나쁘며 수많은 병을 가지고 있으며 목사들의 수명은 짧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과로와 교인들로부터 끊임없이 받는 정신적 압박(pressure)과 운동 부족이라는 지적이었습니다. 연세대학교 총장을 지낸 박대선 목사님은 어느 은퇴목사 퇴임식에서 “목사가 도중에 직업을 바꾸지 않고 70세까지 목회를 했다면 무조건 존경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목회생활로 70세가 되었다면 얼마나  참았고, 얼마나 아팠고, 얼마나 울었겠는가?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사순절에 예수님을 생각 해 봅니다. 본문 내용만 보아도 예수님은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무엇이 그렇게 죽을죄를 지었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이 그렇게 미움 받을 일입니까? 도와주고 협조는 못할망정, 같은 동족끼리 미워하고 시기하여 자기 민족을 핍박하고 있는 로마정부에 고발하겠다고 성질낼 일입니까? 그들은 억지를 써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의 병을 고쳐 준 것이 죄라고 종교 재판에 회부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충분히 설명하셨지 않습니까? 9절에 보면 아무리 안식일에 대한 규례가 그렇다고 해도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어느 것이 옳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 손 마른 자를 고쳐주자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였다고 했습니다.(11절)


2.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심보는 여전합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이 잘 되는 것, 좋은 일 하는 것을 보고 격려하고 돕는 자가 되어야지 공연히 트집 잡고 훼방하는 편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 Saturday Review 라는 잡지사의 편집국장이던 놀만 카즌(Norman cousin) 사람은 모든 관절이 약해지고 굳어지는 희귀병에 결려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병상에서 건강에 대한 책을 읽으며 부정적인 정서(Negative Emotion)는 신체 화학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될 사람은 무엇을 보고 듣던 좋은 생각만 합니다. 카즌 그 내용을 읽으면서 만일 그렇다면 반대인 경우 즉 긍정적인 정서는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날부터 의사와 의논하여 T. V도 부정적인 비극을 일으킬만한 슬픈 내용이나 폭력물은 보지 않고 웃을 수 있고 마음이 기뻐지는 희극이나 즐거운 노래만을 감상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랬더니 놀라웁게도 1년 뒤에 카즌 씨의 난치병은 깨끗이 완쾌되었습니다. 카즌 씨의 경험은 신앙의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좋은 예입니다. 인간이 불평불만을 하게 되는 것은 신앙의 눈이 어두워질 때임을 성경은 되풀이하여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불평과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은 신앙의 눈이 흐려져서 하나님이 준비 해 두신 찬란한 미래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섭리하시고 돌보시는 사랑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은 잘 알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종교의식은 누구보다 더 엄격히 지켰지만 그들이 예배하는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핍박하고 미워하던 그 예수님이 바로 그들이 그렇게 고대하던 메시야였는데 시기와 질투 때문에 예수님을 괴롭혔고 끝내는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욕구가 만족되지 않으면 어느 때고 불평불만을 함부로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무엇을 해 주어도 계속 불평거리만 찾습니다. 출애굽기 14장에 홍해를 앞에 두고 불평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베풀어주신 놀라운 기적과 은혜는 깡그리 잊어버렸습니다. 뒤에서 쫓아오는 애굽 군대만 무서워서 신앙의 눈이 완전히 가려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미래가 보이는 모세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14:13절)고 외쳤습니다. 출애굽기 16장에서도 이스라엘 온 회중은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빵 문제에 눈이 어두워 또 다시 불평했습니다. 광야에서 누리는 자유보다 억눌리면서도 애굽에서 빵을 먹을 수 있었던 그때가 더 좋았다고 했습니다. 빵에 눈이 어두워져서 불평하는 상황은 오늘 우리들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입니다. 불평불만은 불신앙에서 시작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병 고침 받고, 예수님 때문에 행복해진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고발하려 했습니다. 예스님을 미워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얼마나 속이 상하셨겠습니까?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우셨겠습니까? 얼마나 허탈하셨겠습니까?


3.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너무도 인기가 없었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6장 마지막 부분에서 7장까지 내용을 보면 예수님을 엄청 인기 없는 분이셨습니다. 첫째로는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실망하고 떠나갔으며(요6:66장) 두 번째는 국회의원, 바리새파 사람들  같은 지식층 인사들이 예수를 반대하고 나섰고(요7:48절)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친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요7:5절)

(1) 예수님의 많은 제자들이 어째서 예수님을 떠났을까요?

그것은 떡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습니다. 5병2어의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은 육신의 빵에 대한 호기심으로 잔뜩 부풀어 있는 그들에게 육신보다 영이 배불러야 한다는 설교를 듣고 실망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너나없이 경제적인 풍요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설교보다 떡에 대한 설교를 해야 목회자가 인기가 있습니다. 그런 교회가 사람이 많이 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인 떡을 더 사모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 어떤 생애를 보냈는지 알려면 그 사람의 수표장을 보아야 합니다. 어떤 것에 돈을 더 많이 썼는지를 보면 그만큼 가치 있게 살았는지를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육신적인 떡만 욕심내던 제자들은 그것보다 천만 배 소중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여 그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은 그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베드로와 열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요6:67절)고 물으실 때 예수님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요즈음 내가 당해 보니까 그때 예수님의 아프셨을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2) 의회원들과 제사장들과 바리새파인들에게 예수님은 무척이나 매력 없고 인기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성전 경호원들에게 예수를 체포 해 오도록 명령했으나 아무도 예수님께 손을 대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오히려 보고하는 소리가 예수를 존경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몹시 격분한 지도자와 권력자들은 “의회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예수를 믿는 자가 있느냐?” (요7:48절)고 문책했습니다. 그 발언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상류층이나 지식층 인사들은 누구도 예수를 믿거나 인정하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설픈 사람들은 닳고 닳아서, 한마디로 벗어지고 건방져서 쉽사리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안으시고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라고 했겠습니까? 그 말씀은 어린아이의 미숙한 상태나 적은 지식이나 부족한 경험을 찬양한 것이 아니라 신비를 가깝게 느끼며 아름다움에 경외감을 가질 줄 알고 의심보다는 먼저 믿고 자기 자신을 맡길 줄 아는 어린이들의 특성을 천국 시민의 자격으로 규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경험도 많았으며 지식이 있고 나아가서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성전에서 살다시피 하는 그들이 먼저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알고 영접했어야 할텐데 오히려 그들의 지위와 지식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고 제거하려는 것을 볼 때 기가 막히셨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그렇습니다. 직분을 가진 중직 자들이 오히려 믿음을 거스리고 엉뚱한 불의를 더 범합니다. 오히려 초신 자들보다 못한 것을 볼 때 그때 예수님이 마음으로 괴로워했을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의 동생들도 형님인 예수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반대자가 되었던 사실을 요한복음 7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육친의 동생들마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여 “세상에 알려져야지 숨어서 일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요7:4절)고 형님인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시골에 있지 말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기적과 이적을 베풀며 민중의 지도자가 되어 줄 것을 바랐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때도 무척 괴로웠을 것 같습니다. 친 동기간들조차 예수님의 깊은 속을 이해 해 주려고 하지 않았을 때 너무도 외로웠을 것 같습니다. 목회자도 때로는 부인도 이해 못하는 문제를 놓고 외로움 속에서 괴로워할 때가 있습니다.

하기 쉬운 말로 척척 정리 해 버리라고 하지만 알곡이 상할 까보아 추수때까지 가라지를 뽑지 말고 놓아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약과 신약에 줄기차게 흐르고 있는 기본적인 성경의 사상은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영원 없는 현재는 무의미하고 허무한 인생을 만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의 병을 고쳐주고 천국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을 그들은 계속 트집 잡고 죽이지 못하여 노기가 가득하였습니다. 영적인 것보다 육신의 빵만을 탐하던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형제 동기들도 예수님의 동역 자가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지상에 계실 때 예수님은 이렇게 사셨습니다. 너무도 힘들고 외롭게 사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본문 눅6:12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이때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으로 갔습니다.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순절에 우리 신앙인들이 이 세상에서 슬프고 외롭고 얻어맞고 당할 때 어떻게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이겨내야 할 것인가를 자신의 생활을 통하여 설교하고 계십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나를 구원하기위하여 힘드셨던 그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도 이 힘든 세상을 기도하므로 잘 이겨 나아가십시다. 기도하려 가신 예수님을 생각 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그 예수님은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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