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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 흑암재앙(출10: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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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회
댓글 0건 조회 5,902회 작성일 07-06-17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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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암재앙은 애굽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치욕적인 재앙이었습니다. 캄캄한 흑암은 모든 애굽인들을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애굽에서 최고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태양신 라(Ra)의 존재를 무색케 하였으므로 애굽인들에게 이 사건은 치명적이었습니다. 이때 바로는 타협을 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바로는 교묘한 간계와 술책으로 이스라엘을 잡아두려고 하였지만 모세는 이를 간단히 거절하였습니다. 이제는 바로를 위한 기도도 없었습니다. 남은 것이라고는 마지막 심판의 재앙, 곧 죽음의 재앙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1. 흑암 재앙의 성격(21-23)
세 번째 이 재앙, 여섯 번째 독종재앙처럼 이번 아홉 번째인 흑암재앙도 아무 예고가 없었습니다. 재앙 때마다 공포에 경악하고 재앙의 제거를 갈구하며 승복을 약속하였지만 금방 완악하여 언약을 파기 해 버린 바로에게 아홉 번째 재앙은 최종적 통보였던 것입니다. 물리적인 어두움은 빛에 대한 반대현상을 말합니다. 성경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가 단절된 상태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 안에는 어두움이 전혀 없습니다. 창조의 시작부터 하나님은 어두움과 빛을 나누셨습니다.(창1:4) 천사들까지도 두 계급으로 나누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임재의 빛 안에 거하는 천사들을 “광명의 천사”(고후11:14)라고 불렀습니다. 사탄은 상대적으로 어두움의 천사인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면 하나님께서도 저희를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두신다고 했습니다.(롬1:28) 그래서 “그들의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롬1“21)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빛이 미치지 못하면 사실상 장님이 되어 선과악, 쓴것과 단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영적 소경과 미맹인(味盲人)이 되고 맙니다. 정신적으로도 소경이 되어 그런 사람은 소경이 어두운데서 더듬는 것 같이 더듬는다고 했습니다(신28:29). 정신적인 투시력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그런 사람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고(마8:12)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암흑에 유리하는 별들이라고 했습니다.(유13) 그러나 빛(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은 빛을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그 빛은 그리스도께서 주십니다. 우리는 다 빛의 아들들입니다.(살전5:5) 그래서 다윗은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시18:28)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릇된 길로 가지 않고 어설픈 철학자들에게 함부로 넘어 가지 않습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빛이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산 사람들은 부활 후에도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라고 했습니다.(단12:3) 하나님이 계신 천성은 어두움은 조금도 없고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닌다고 했습니다.(계21:23-24) 그러므로 흑암재앙은 물리적으로나 영적으로 캄캄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상태요, 태양은 운행되나 애굽인들은 그 태양빛을 전혀 볼 수 없는 흑암상태였던 것입니다.
더듬을 만한 흑암이란 어두움이란 그 자체조차 느낄 수 없는 그런, 빛이 있기 전의 태초의 어두움 상태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kalisch) 한마디로 우리가 표현할 수 있기로는 칠흑 같은 어두움이 3일 동안 애굽의 온 땅에 덮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최고로 추앙받게 태양신”(Ra)의 허구성을 확실히 인식하게 하시므로 바로에게 세상에 어떤 것도 더 이상 의지할 수 없다는 절망감을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은 곧 생지옥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 거하는 곳에는 광명(光明)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은혜의 빛을 주심을 감사하며 아직도 어두움 가운데 있는 이웃을 인도하는 자들이 됩시다.

2. 바로의 타협안(24-27절)
이 암흑재앙은 바로의 마음의 밑바닥을 뒤 흔들었습니다. 바로는 암흑재앙으로 인하여 극도의 충격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불러 타협안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음은 여전히 완악하여 완전히 항복하지 않았으니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어린아이들은 데리고 가도 좋다는 것이었습니다.(24절) 그것은 아직도 그것들을 잡아둠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려는 속셈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영적으로 어두운자가 되어 정욕에 끌림을 받아 식별력을 잃고 있었으니 스스로 심판을 초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타협안에 나타난 특징을 보면 ①전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②모세를 통한 요구 전체를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③오히려 죽일테니 다시는 자기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모세에게 명령하면서 더욱 난폭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두움에 거한 자들의 우둔한 현상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아집과  편견만을 주장하며 사리분별을 하지 못합니다.

3. 모세의 선언(29절)
이것은 바로 바로에게 그의 종말을 고하는 선언이었습니다.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더 이상 기회가 없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지성으로는 이 재앙의 자연적인 근거를 찾기에 한계를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무시무시한 흑암을 만드셨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얼마나 어두웠으면 인위적인 불빛이 무용(無用) 했겠습니까?? 3일이라는 기간에도 깊은 영적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3시간 동안 흑암이 온 땅에 내려 덮였습니다.(마27:45) 여기 3일은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기까지의 3일간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 3일 동안 회개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3일간 암흑재앙이 계속되므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때 왜 바로는 필연코 무슨 큰 변이 일어나리라는 예상을 못했을까요? 우리는 문제가 닥칠 때 베드로처럼 당황하거나(마26:51절) 요나처럼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영적으로 나에게 주는 하나님의 선하신 싸인(sign)임을 빨리 감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난폭해져서 모세에게 다시 자기 앞에 얼굴을 나타내면 죽이겠다고 엄포하는 바로에게 모세는 다시는 왕의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것은 이제 하나님의 임내하심이 끝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최후의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가 약속을 깨뜨릴 때도 관용으로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참아 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눅13:7)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스라엘 나라가 최종적으로 부패하고 강퍅하게 될 때에 그들에게 내려질 운명처럼 바로의 운명은 그와 같이 될 것을 선언했던 것입니다. 바로의 계속된 강퍅한 마음은 결국 애굽인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실증시켜주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게 하여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확신케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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