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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창3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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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회
댓글 0건 조회 5,592회 작성일 06-11-12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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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창39:1-10)

오늘 본문은 요셉이 애굽에 팔려와 본격적으로 노예생활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이 노예가 된 것은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빚 대신도 아니요, 전쟁 포로도 아니었습니다. 형들을 돕기 위하여 아버지의 심부름을 갔다가 상품처럼 팔려오고 말았습니다. 부자 집 아들로 채색옷을 입고 사랑받던 아들에서 이방의 노예로 하루 아침에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실로 기막힌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놀랍게도 이 노예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를 배신하고 의리 없게도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도망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게으름 부리거나 일을 못하겠다고 떼쓰지도 않았습니다. 부자집 아들이라고 유세도 않았습니다. 자기가 노예라는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노예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는 카멜레온처럼 살기 위하여 색깔만 변한 그러한 노예가 아니였습니다. 중심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과 인격이 있기에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노예로서의 임무를 성실히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러기까지는 익숙치 못한 습관과 서투른 일솜씨 때문에 얼마나 힘들고 고생스러웠을까 생각하면 끔찍스럽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요즈음 우리나라 아이들이라면 감히 적응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포악해지거나 바보가 되거나 둘 중 하나가 되어 인생을 포기 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마 목사, 장로 가정의 자녀일수록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며 더욱 적응을 못하지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
그러나 요셉은 잘도 견디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격과 힘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철저하게 밑바닥까지 낮추시고 그 밑바닥에서 그와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곧 요셉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고난이며 형제와 온 가족을 구원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1. 함께 하신 하나님
요셉은 애굽의 시위대장(경호실장)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왔습니다. 당시 노예란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한낱 상품에 불가했습니다. 중세까지도 노예는 움직이는 농기구 정도로 취급을 받았다고 합니다.(눅17:7-9절참고) 그런데 본문 2-3절을 보면 요셉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그의 범사가 형통했다고 했습니다. 5절에 보면 요셉이 있었기에 여호와의 복이 주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고 했습니다.
왜 요셉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셨을까요? 믿음이 있고 지혜로운 자들은 다른 것은 다 빼앗겨도 빼앗기지 않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옷을 빼앗기고, 자유로운 신분을 빼앗기고, 아버지를 빼앗겨 노예가 되었지만 하나님을 믿고 자신을 맡기는 믿음만은 빼앗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중심에 그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시련의 비바람이 몰아칠수록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므로 그는 결코 약하거나 가난한자가 아니었고 복의 통로가 될 수 있었습니다. 꿈을 꾼 요셉은 소망의 사람이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마다 꿈이 생각났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 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그러한 축복을 소유했기에 근면하고 정직하여 주인에게 눈가림을 하는 노예가 아니라 오히려 인정해 주는 주인에게 감사하며 열심히 일한 결과 노예로서 가정총무로 승진 하였습니다.(4절) 이와 같이 선한 사람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장소와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은혜를 끼칩니다. “나는 한 달란트 밖에 받지 못했다” “나는 말단이다” “영향력이 없다”고 푸념만 해서는 안 됩니다. 어디서나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세상에서는 비록 노예 신분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중심인물입니다.
나 때문에 가정도, 교회도, 직장도 복을 받는 축복의 통로가 됩시다.

2. 뿌리치기 힘든 유혹(7-10)
애굽에서 요셉은 적어도 노예로서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생각지 못했던 더 큰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그를 성적으로 유혹했으니 그 유혹을 뿌리친다는 것은 육체적인 고난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고 했습니다.(6절하) 그래서 주인의 처가 그를 보는 눈치가 이상하더니 결국은 노골적으로 동침할 것을 청했습니다. 실로 젊은 청년 요셉에게는 너무도 뿌리치기 힘든 성적인 유혹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①요셉도 남자요 정욕이 넘치는 나이였습니다
②당시 노예는 주인들의 성적 노리개로 사용하는 예가 빈번 했습니다
③만약 거절했다가는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하급노예로 밀려날 수 도 있고, 심한 매를 맞을 수도 있고, 심하면 죽임까지도 당할 수 있었습니다.
④이 여주인의 요구를 들어주면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 받을 수도 있고 다른 출세도 할 수 있다고 판단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첫째는 자기를 전적으로 인정해 준 주인 보디발에 대한 의리를 저 버리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뻔히 보고 계시는데 내가 어찌 그 앞에서 죄를 범하였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의 머릿속에는 항상 자기 것과 자기 것이 아닌 것에 대한 구분이 뚜렷했습니다.
우리는 계산이, 사리가 불분명해서는 안 됩니다. 옛 어른들도 “財産分明은 大丈夫”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궁핍하고 어려워도 내 것과 남의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사나이 중의 사나이란 의미입니다. 요셉은 주인의 아내를 건드리는 것은 믿고 사랑해 준 주인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그 분의 얼굴에 침 뱉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요셉은 얼긋 얼긋 눈짓으로 유혹할 때 요셉은 무척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겨냈던 요셉의 고난은 실로 거룩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때 요셉이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채 한 순간의 유혹을 참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10년간 쌓았던 모든 공로가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방황할 때 참으로 그들을 위험하게 했던 것은 더위나 전갈이나 불뱀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불신과 원망과 성적 유혹이었습니다. 대충입고 춤추는 모압 여자들을 보자 “우리가 40년 동안 이런 여자들을 못 봤다”고 덤벼들다 하루에 3만명이 죽어버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장 무서운 것은 가난이나 질병이나 어려운 상황만이 아닌 것입니다.
요셉은 신분은 노예였지만 그는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믿음의 인격자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3.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고난을 주신 이유
여기 요셉의 기록 가운데 잘 이해되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해를 못한 사람들은 요셉이 그처럼 하나님을 잘 믿었고, 또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는데 왜 연거푸 그런 비참한 일만 거듭 당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왜 노예로 만들어 놓고 함께 하셨을까요? 아예 처음부터 형통케 하셨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닥칠 7년 기근에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요셉이 그런 고생을 하지 않았다면 남을 살리기는 커녕 요셉 자신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형제들과 애굽인을 살리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고통을 당하고 낮아지지 않으면 삶의 지혜가 부족하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배우고 많은 사람을 끌어안을 수 있는 능력과 마음의 여유를 소유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은 요셉을 요셉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볼 때 요셉은 완전한 그리스도의 모형인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혼자만의 문제였다면 굳이 그 엄청난 고난의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시려고 친히 고난의 십자가를 자초 하셨던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엡2:4)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설령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공중에 있는 진리로는 단 한 사람도 살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진리는 성육신(Incarnation)되어야 합니다.
요셉이 꾼 꿈으로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쁨으로 노에가 되었을 때 그의 진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 살아 역사하는 진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기쁨으로 적응하십시오.
그때 하나님께서 나의 고난을 통해 다른 사람을 살리실 것입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기쁘고 행복해 지게 합시다. 축복의 통로가 다 되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복음을 맘과 몸과 입과 행동으로 전하시는 구원의 통로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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