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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통곡(창37: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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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회
댓글 0건 조회 4,943회 작성일 06-11-01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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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통곡(창37:25-36)

야곱의 아들들은 평상시 요셉을 미워하던 마음이 이제 증오가 되었고 그 증오심은 이성의 눈 뿐 아니라 영혼의 눈까지 멀게 해 버렸던 것입니다. “티끌모아 태산(泰山)”이라고 나쁜 생각도 쌓이고 쌓이면 악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상시 좋은 생각을 많이 해야 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동생 야곱을 죽이려고 물이 없는 깊은 우물에 쳐 넣은 다음에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었습니다.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요셉의 처량한 울음소리를 들으면서도 자기들끼리 음식을 먹고 있었을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요셉은 형들의 안전이 걱정스러워 100여리가 넘는 광야 길을 물어 물어 찾아왔는데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저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부패한 인간성이 어떠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다행이 하나님께서 이스마엘 대상들을 등장시켜 요셉을 은 20개에 노예로 팔게 하므로 생명을 구출해 주셨습니다.
르우벤의 양심을 자극했던 하나님은 (22절) 이번에는 유다의 마음에 지혜를 주셔서(26절) 다시 한번 요셉의 생명을 구출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 요셉 대신 애꿎은 숫염소 한 마리가 희생되었습니다. 형들은 요셉의 옷에 그 염소 피를 묻혀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다”고 아버지를 뻔뻔스럽게 속였던 것입니다.

1. 아들들의 잔인성
상해범이나 살인범들을 보면 우발적인 범행과 고의적인 범행이 있습니다. 이 야곱의 형제들은 어떤 유형의 범행이었습니까? 더더욱 25절에 보면 동생을 물없는 구덩이에 던져서 죽어가게 해 놓은 자기들은 태연히 음식을 먹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잔인한 행동입니까? 동생이 울부짖으며 죽어가고 있는데 어찌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은 전혀 양심에 가책조차 느끼지 못하였다는 증거입니다. 정녕 한가닥 양심의 빛 마져 사라져 버린 어두움의 자식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악한 생각은 짐승보다 더 잔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동생을 노예로 팔기 위한 명분은 그럴싸했습니다.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27절) 는 유다의 말에 다른 형제들도 동의 했습니다만 그것은 요셉을 상품화시키므로 사실상 인간 요셉을 매장하는 행위였습니다. 유다의 실낱같은 긍휼도 다른 형제들의 잔인성에 짓밟히고 말았으니 유다도 결국 양심을 판 사람이었습니다. 마치 예수님을 가룟유다에게 은 30냥에 팔아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죽게 한 사건 그대로 방불케 합니다.
형들이 그 돈을 어디에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공평하게 나누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결국 그 죄값도 그들에게 그대로 돌아 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남을 미워하는 작은 마음은 나중에는 너무도 잔인한 인성의 소유자가 되고 만다는 무서운 교훈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 야곱의 통곡
 형들의 음모는 치밀했습니다. 자신들의 범행을 은닉하고 아버지를 속이기 위하여 그럴싸한 연극을 연출했습니다. 그들은 요셉이 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으로 가장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열형이 하나같이 이에 동의했고 한명도 양심선언을 하거나 안색하나 변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시다. 21세기 신파극도 아닌데 야곱이 감쪽같이 속을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연출이 기막히게 성공적이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인 사건을 상시케 합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들이었습니다. 뛰어난 연극 가족이었습니다.
한명이라도 나중에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어떡하나? 아니면 함께 자랐던 옛정을 생각하면서 동생에 대한 애정이 있었더라면 표정이라도 변했을 것 아닙니까?
야곱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슬피 통곡했습니다. 야곱은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34절)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요셉을 더 사랑했으며 그 편애 때문에 형들이 요셉을 죽일 살의(殺意)를 품었고 결국 죽이기까지 했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야곱의 슬픔이 오죽 했겠습니까?
야곱은 평상시 대단히 모진 사람이었습니다. 웬만해서는 울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가 죽었을 때도 울었다는 기사가 없습니다. 딸이 강간당했을 때도, 아들들이 범죄 했을 때에도 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셉을 잃고 나서는 슬픔이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아들들은 죄인 열명보다 참으로 의롭게 살려고 했던 이 아들 한명이 아버지에게 얼마나 소중했으며 그 무죄한 한명의 피를 흘린 것이 얼마나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인가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내신 것은 너무나도 큰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거부하는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그 아들만큼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을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매달면서도 희희낙락했습니다.
의로운 이 아들의 죽음은 다른 아들들의 모든 죄보다 더 큰 슬픔을 야곱에게 안겨 주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지어 온 모든 죄보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 앞에 더 고통스럽고 안타까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운명하시는 순간 눈을 감아버렸으니 3시간동안 성경은 온 천지가 캄캄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눅23:44)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야곱의 통곡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래도 자녀들은 거짓 위로를 하며 아버지의 슬픔에 가슴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사건앞에 독일의 진센돌프 백작처럼 꼬꾸라져야 합니다. 지금도 나와 상관없는 문외한이 되지 맙시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드립니다.

3. 꿈과 정반대의 운명
38절에 보면 요셉은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팔려 갔다고 했습니다. 실로 꿈과는 정반대로 비참한 자리까지 낮아지고 말았습니다. 노예는 상품이요, 걸어다니는 농기구에 불과했습니다. 높아지기는커녕 한낱 상품으로 전락되고 만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꿈 때문에 오히려 인생의 가장 비참한 자리에까지 떨어지고 만 것입니까?
이럴 때 우리는 어떠한 행동을 취해야 합니까? 후회만 해야 합니까? 절망해야 합니까?
그럴수록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기꺼이 밑바닥으로 내려 가야합니다. 물리학에도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 있듯이 더 높아지기 위하여는 때로 낮아져야 더 높이 솟아 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시기 전에 믿음을 달아보십니다.
가장 좋은 것은 그냥 주시지 않습니다. 시험을 견디며 말씀을 붙잡고 끝까지 신뢰하는지를 시험해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 잔도 주시지만 먼저 쓴 잔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난으로 시험해 보십니다.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붙잡고 그 고난의 시간을 잘 감당하십시오. 시험을 참는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약1:12) 그러면 하나님께서 꿈대로 ,기도대로, 약속대로 요셉처럼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크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 크게 키울 요셉을 야곱이란 한 인간의 작은 사랑속에 파묻어 둘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난 요셉은 이제부터는 큰 아버지요 전능하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 믿고 살도록 새 출발의 스타트 라인 Start Line)에 서게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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