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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형제의 화해(창3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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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회
댓글 0건 조회 4,612회 작성일 06-09-13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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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형제의 화해(창33:1-7)

 본문은 하나님께서 라반의 시기와 에서의 복수심에서 야곱을 건지시고 두 형제가 서로 화해하게 하신 내용입니다. 야곱을 통한 구속의 역사를 이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보여줍니다.
33장이 가르치는 전체의 교훈은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고 하나님만 신뢰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벧전5:7참조) 하나님은 28:15절에서 무사히 귀국시켜 주시겠다는 약속에 근거하여(31:3,13)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고향에 돌아왔으면 하나님만 믿고 모든 것을 맡겼어야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어리석게도 불필요한 공포와 쓸모없는 인간적인 계획으로 에서의 복수를 피하려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라반에게서 건져 주신 것 같이 에서의 복수의 칼에서도 에서의 마음을 돌이켜 무서운 복수의 칼 대신 포옹을, 갈등과 투쟁 대신 감격의 눈물을 주셨습니다.(창31:24,29, 창33:4)

1. 두 형제의 만남(1-4)
 약복 강에서 기도의 응답을 받아 이름까지 이스라엘로 바뀐 야곱은 이제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만약을 대비하여 가족들을 삼진으로 나누어 나아가게 했습니다. 혹 유혈 참사가 나더라도 가족 중 일부의 생명이라도 건져보고 싶은 야곱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아직도 그 마음속에 극복되지 못한 채 남아있는 불신앙의 흔적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믿음의 아버지라면 아내들을 중심으로 원을 만들어 자식들을 다 외워 싸고 자기가 앞장서 나갔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 위대한 믿음의 사람에게도 오직 인간적인 편견이 남아 있어서 더 사랑하는 자식과 덜 사랑하는 자식이 구별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앞에 나간 야곱은 에서에게 몸을 일곱 번이나 굽혀서 절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왕을 맞이하는 신하의 자세이거나 재판받는 죄수가 재판장의 호의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적인 경의를 표하는 자세입니다. 따지고 보면 에서가 형은 형인데 쌍둥이 형이며 그것도 발목을 잡고 잇따라 나온 처지입니다. 그런데 왜 이처럼 어떻게 보면 굴욕적이고 어떻게 보면 왕을 대하듯 경의를 표했던 것입니까? 그것은 단지 아버지와 형을 속인 죄의식 때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진짜 그랬던 이유는 야곱의 신앙심 때문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이 그의 마음을 주장하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단지 에서에게 복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시켰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과 무단한 충돌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때 신앙의 사람과 불신앙의 사람의 차이가 판명됩니다.  사실 그때그때 심판의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계시록에 “아마겟돈 전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전쟁을 3차 대전이라고 하지만 평상시 우리가 하고 있는 신 불신자간의 전쟁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마겟돈”은 “므깃도의 산”이란 뜻으로 사사시대 하솔왕의 부하인 “시스라”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멸절시키기 위하여 자기 군대를 다 모아 “므깃도의 산”에서 대접전을 벌인데서 유래된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이러한 영전(靈戰)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러한 싸움은 단지 나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 내 뒤에 계신 하나님과 우리의 상대 뒤에 있는 악한 영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일곱 번 절한 것은 단순히 비겁한 행동이 아니라 훌륭한 믿음의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에서에게 머리를 숙인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나의 머리로 두신 하나님께 복종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저 사람의 잘못보다도 내 교만을 문제 삼고 계시는구나” 생각하면 한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 얼마든지 경의를 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세상을 끌어 안을 수 있는 포용력이 생깁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머리를 숙였을 때 그는 에서만 끌어안은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끌어안은 진정한 믿음의 사람으로 태어났던 것입니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이 아무리 잘못했더라도 그 사람을 끌어안지 못하는 것은 내 속에 아직도 나라는 교만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끝까지 꺾을 것 꺾게 하시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순복하게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에서의 마음을 녹이신 하나님(4절)
야곱은 내심 얼마나 불안했었습니까? 그런데 뜻밖에 일이 전개되었습니다. 에서가 달려와 끌어안고 목을 어긋 맞기고 입을 맞추며 우는게 아닙니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습니까? 하나님은 믿는 사람속에서만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생각에 전혀 가능성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들 속에도 역사하시어 악한 생각을 제하여 주십니다. 눈물도 쏟게 하고 감동도 시키십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증오심이 사라지면 반갑고 사랑스런 마음으로 변합니다. 에서의 다음 생활을 보면 완전히 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신앙의 사람들에게 장애가 되고 한계가 되는 사람들을 일시적으로 라도 변화시켜 앞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문제에 봉착하던지 항상 먼저 주께 기도드려야 합니다. 그 사람을 주장하고 있는 어떤 악성도 하나님을 움직이시고 녹여주십니다. 에서의 마음이 녹으니 동생의 가족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에서와 야곱 사이에 형제애의 대화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5절) 에서의 눈에 야곱은 사랑스러워하는 마음이 생기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가족들을 차례로 인사케 하고 소개합니다.  화해는 아름다운것입니다. 죽이려 하고 두려워하던 형제의 마음이 녹으니 얼마나 평화롭습니까? 그때 야곱은 에서에게 가축떼를 예물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9절) 고합니다. 마음이 녹으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증오나 분노는 이 세상의 어떤 선물로도 가라 앉힐 수 없는 것입니다. 완전한 화해는 하나님이 간섭하셔야 합니다.
마음이 녹아야 합니다. 야곱은 이제 형을 우러러 보고 있습니다.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10절) 야곱은 에서의 변한 모습에서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느꼈던 것입니다.
무엇이 에서에게 눈물을 흘리게 했는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사람과도 적대관계가 없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해 져서 그들에게 진정한 겸손을 보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야곱이 에서에게 그랬듯이 누구에게 대적의 자세가 아니라 전혀 적대 감정이 없는 순전한 겸손의 모습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서로의 담이 허물어지고 선한 이웃이 되며 결국 그들도 한님의 백성으로 초청될 가능성이 크게 될 것입니다.

3. 에서의 호의와 야곱의 거절(12-17)
 에서는 기분이 좋아져서 어떻게든지 야곱을 도와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거절합니다. 왜 거절한 것입니까? 야곱은 일시적으로 변한 자체만을 보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또 야곱은 자신은 하나님께 선택된 계약의 상속자로 자신의 자녀는 가능한 한 타인과 섞여 지내기를 원치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이제 완전히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따르겠다는 의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야곱은 자신의 가족들의 형편을 충분히 고려했던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강행군 할 수도 없었습니다. 또 야곱은 자신의 모든 것을 에서의 손에 맡기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리듬과 철학이 다르고 목표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가 아무리 호의를 베푼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신앙 로선과 삶의 철학이 다르면 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좋은게 좋다고 함께 하다가 오히려 큰 시험에 빠질 경우가 많음을 알아야 합니다.
①끝으로 야곱이 에서에게 절한 것처럼 우리는 싸우지 않아야 할 사람과 무모하게 싸우지 말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일곱 번이라도 참고 양보하고 내가 죽어야 할 것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버려야 할 것 버리고, 낮아져야 할 때 낮아지고 죽어야 할 때 죽는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②그 사람의 마음이 바뀌었다고 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던데서 떠나 그 사람을 의지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다가는 오히려 큰 낭패를 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 안에 있는 교만과 자존심을 낮추고 머리를 숙이십시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못할 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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