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유익한 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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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디모데후서 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본문의 바울 사도는 그의 생애 마지막 때에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순교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의 지상사역의 마지막 순간에 아끼는 제자 누가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가 충성된 일꾼이라 불렀던 디도는 달마디아로 보냈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늘나라에 가기전 두 사람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영적인 아들 디모데, 그리고 본문의 마가였습니다.
마가는 골로새서 4:10 에 바나바의 조카입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을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여인이었습니다.
마리아의 다락방은 예수님의 부활 후 제자들의 모임 장소였으며, 사도바울은 사도행전 12:5 에 마리아의 집을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그 다락방에서 120 성도가 기도할 때 성령님의 강림이 있었으니 우리는 마가 다락방이라고 부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특이한 기록이 나옵니다. (막14:50-52)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예수님께서 체포되시어 제자들이 다 도망하는데,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님을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게 됩니다.
그러자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사건으로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청년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은 별 다른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 청년은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 자신으로서 그 당시 혈기왕성하나 겁많고 소심했던 그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그 후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의 구제 헌금을 전달하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오는 길에 그를 안디옥으로 데려왔습니다(행 12: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그 후 바울의 제1 차 선교여행 때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 나섰다가 구브로(Cyprus) 섬의 살라미에서 두 사도의 수종자 혹은 수행원이 되었습니다(행 13: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그런데 구브로를 떠나 바울 일행이 밤빌리아의 버가에 당도했을 때 마가의 겁많은 소심함이 다시 문제가 되었습니다.
바울 일행에게 닥친 엄청난 핍박은 물론이요, 갈라디아북부 지방에 닥친 전염병 때문에 두려움에 휩싸인 마가는 두 사도들을 떠나 예루살렘의 자기 집으로 되돌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마가의 비겁하고 소심한 행동은 그 누구보다 마가를 절실히 필요로했던 바울에게 큰 배신감과 상처를 주었습니다.
이 때의 불미스러운 일은 제2 차 선교여행을 떠나기 전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고 헤어진 사건의 빌미가 되었습니다(행 15:36-41).
바나바는 자신의 조카 마가의 소심함과 철없음을 용납하고 함께 가고자 하였으나 바울은 완강하게 반대하였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하여 바울에게 있어서 생명의 은인이요, 길잡이나 다를 바 없는 바나바와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여기까지의 설명으로는 마가는 단지 외국어 잘하고 믿음좋은 부자 어머니와 외삼촌을 둔 겁많고 철없는 어린 아이정도로만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실패를 통해서 그 실패를 유익으로 전환시킬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마가는 자신의 참가를 반대하는 냉정한 바울을 원망하는데, 소심한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데 사로잡혀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비록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고 선교여행 중간에 겁에 질려 돌아온 연약하고 소심한 그였지만 마가는 그 실패를 통해서 예수님을 보았고 바울과 바나바를 보았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더럽고 치사해서 안간다고 털어버렸을 그가 이제 달라졌습니다.
유복한 집안의 아들로서 편한 삶을 버리고 삼촌 바나바를 따라 선교를 떠나는 결단을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전서 5:13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그 후 마가는 베드로 사도의 수행원과 통역역할을 감당하며 베드로의 영적인 아들로서 나름대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마가는 바울 사도에게만큼은 여전히 소인배요 배신자요 상처를 준 사람으로 기억되었을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런 바울 사도와 마가 사이의 화해 과정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본장 11절의 바울사도의 말,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다라는 말을 통해 바울 사도에게 있어 마가의 의미를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이 후 바울 사도를 만나기위해 디모데와 함께 로마로 온 마가는 바울 사도의 순교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는 로마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끼고 마가복음을 기록하게 됩니다.
마가가 원래는 비겁하고 소심하였으나 후에 훌륭한 사람이 되어 바울 사도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닙니다.
본문 10절에는 마가와 대비되는 데마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데마는 골로새서 4:14 와 빌레몬서 1:24에 의하면 바울 사도와 함께 로마 감옥에 투옥될 정도로 바울 사도와 고난을 함께 당했습니다.
그런 그가 바울 사도의 2차 로마 투옥을 앞두고 세상으로 도망쳤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데마와 마가라는 인물의 대비를 통해 우리는 인생전반에 걸친 신앙의 여정의 의미를 되돌아 보고자 합니다.
신앙은 일시적인 감정이나 결단의 차원을 넘어 한 사람의 인생 전반에 걸치 대장정입니다.
그 대장정의 주인공이 성령님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인가로 신앙과 불신앙으로 나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멋있게 등장하고 멋있게 퇴장하기를 원하지만 인생이 뜻대로 되면 인생이겠습니까?
우리 각 사람안의 여러 상처들과 두려움, 약점들과 한계와 부족함은 언제나 우리를 넘어지게하고 좌절하게 합니다.
부족하고 약하지만 세상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테두리 안에 거했던 사람들입니다.
무엇인가 대단한 일을 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테두리 안에 있다는 것은 그 어떤 일보다 대단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넘어지고 쓰러져도 하나님께서 팔을 내미시고 우리를 붙잡아주시고 일으켜주시기 때문입니다.
마가처럼 세계적인 선교를 감당하고 신약의 복음서를 기록하는 영광스러운 역할은 아니어도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내게 유익한 자라 불리는 귀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작고 사소하더라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크고 작음의 구별이 없습니다.
비록 마가처럼 연약하고 비겁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붙잡힌 바 된 우리는 실수와 실패를 통해 나의 상처입은 자존심과 타인의 원망과 증오라는 덫에 사로 잡혀있어서는 안됩니다.
이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패와 실수까지도 우리가 예수님을 발견하는 계기로 도구로 사용하실 정도로 저와 여러분을 넉넉히 품에 안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으로 돌아갔던 데마의 길은 한 줌도 안되는 육신의 길이요 멸망의 길입니다.
신앙의 연수가 오래되고 깊어질 수록 나의 성공과 업적보다는 오히려 나의 실패와 연약함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시고 나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의 테두리 안에 머물기바랍니다.
크든 작든 남들이 뭐라하든 말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남은 우리의 시간과 삶을 바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본문의 바울 사도는 그의 생애 마지막 때에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순교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의 지상사역의 마지막 순간에 아끼는 제자 누가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가 충성된 일꾼이라 불렀던 디도는 달마디아로 보냈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늘나라에 가기전 두 사람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영적인 아들 디모데, 그리고 본문의 마가였습니다.
마가는 골로새서 4:10 에 바나바의 조카입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을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여인이었습니다.
마리아의 다락방은 예수님의 부활 후 제자들의 모임 장소였으며, 사도바울은 사도행전 12:5 에 마리아의 집을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그 다락방에서 120 성도가 기도할 때 성령님의 강림이 있었으니 우리는 마가 다락방이라고 부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특이한 기록이 나옵니다. (막14:50-52)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예수님께서 체포되시어 제자들이 다 도망하는데,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님을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게 됩니다.
그러자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사건으로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청년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은 별 다른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 청년은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 자신으로서 그 당시 혈기왕성하나 겁많고 소심했던 그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그 후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의 구제 헌금을 전달하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오는 길에 그를 안디옥으로 데려왔습니다(행 12: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그 후 바울의 제1 차 선교여행 때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 나섰다가 구브로(Cyprus) 섬의 살라미에서 두 사도의 수종자 혹은 수행원이 되었습니다(행 13: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그런데 구브로를 떠나 바울 일행이 밤빌리아의 버가에 당도했을 때 마가의 겁많은 소심함이 다시 문제가 되었습니다.
바울 일행에게 닥친 엄청난 핍박은 물론이요, 갈라디아북부 지방에 닥친 전염병 때문에 두려움에 휩싸인 마가는 두 사도들을 떠나 예루살렘의 자기 집으로 되돌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마가의 비겁하고 소심한 행동은 그 누구보다 마가를 절실히 필요로했던 바울에게 큰 배신감과 상처를 주었습니다.
이 때의 불미스러운 일은 제2 차 선교여행을 떠나기 전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고 헤어진 사건의 빌미가 되었습니다(행 15:36-41).
바나바는 자신의 조카 마가의 소심함과 철없음을 용납하고 함께 가고자 하였으나 바울은 완강하게 반대하였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하여 바울에게 있어서 생명의 은인이요, 길잡이나 다를 바 없는 바나바와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여기까지의 설명으로는 마가는 단지 외국어 잘하고 믿음좋은 부자 어머니와 외삼촌을 둔 겁많고 철없는 어린 아이정도로만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실패를 통해서 그 실패를 유익으로 전환시킬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마가는 자신의 참가를 반대하는 냉정한 바울을 원망하는데, 소심한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데 사로잡혀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비록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고 선교여행 중간에 겁에 질려 돌아온 연약하고 소심한 그였지만 마가는 그 실패를 통해서 예수님을 보았고 바울과 바나바를 보았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더럽고 치사해서 안간다고 털어버렸을 그가 이제 달라졌습니다.
유복한 집안의 아들로서 편한 삶을 버리고 삼촌 바나바를 따라 선교를 떠나는 결단을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전서 5:13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그 후 마가는 베드로 사도의 수행원과 통역역할을 감당하며 베드로의 영적인 아들로서 나름대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마가는 바울 사도에게만큼은 여전히 소인배요 배신자요 상처를 준 사람으로 기억되었을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런 바울 사도와 마가 사이의 화해 과정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본장 11절의 바울사도의 말,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다라는 말을 통해 바울 사도에게 있어 마가의 의미를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이 후 바울 사도를 만나기위해 디모데와 함께 로마로 온 마가는 바울 사도의 순교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는 로마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끼고 마가복음을 기록하게 됩니다.
마가가 원래는 비겁하고 소심하였으나 후에 훌륭한 사람이 되어 바울 사도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닙니다.
본문 10절에는 마가와 대비되는 데마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데마는 골로새서 4:14 와 빌레몬서 1:24에 의하면 바울 사도와 함께 로마 감옥에 투옥될 정도로 바울 사도와 고난을 함께 당했습니다.
그런 그가 바울 사도의 2차 로마 투옥을 앞두고 세상으로 도망쳤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데마와 마가라는 인물의 대비를 통해 우리는 인생전반에 걸친 신앙의 여정의 의미를 되돌아 보고자 합니다.
신앙은 일시적인 감정이나 결단의 차원을 넘어 한 사람의 인생 전반에 걸치 대장정입니다.
그 대장정의 주인공이 성령님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인가로 신앙과 불신앙으로 나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멋있게 등장하고 멋있게 퇴장하기를 원하지만 인생이 뜻대로 되면 인생이겠습니까?
우리 각 사람안의 여러 상처들과 두려움, 약점들과 한계와 부족함은 언제나 우리를 넘어지게하고 좌절하게 합니다.
부족하고 약하지만 세상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테두리 안에 거했던 사람들입니다.
무엇인가 대단한 일을 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테두리 안에 있다는 것은 그 어떤 일보다 대단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넘어지고 쓰러져도 하나님께서 팔을 내미시고 우리를 붙잡아주시고 일으켜주시기 때문입니다.
마가처럼 세계적인 선교를 감당하고 신약의 복음서를 기록하는 영광스러운 역할은 아니어도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내게 유익한 자라 불리는 귀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작고 사소하더라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크고 작음의 구별이 없습니다.
비록 마가처럼 연약하고 비겁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붙잡힌 바 된 우리는 실수와 실패를 통해 나의 상처입은 자존심과 타인의 원망과 증오라는 덫에 사로 잡혀있어서는 안됩니다.
이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패와 실수까지도 우리가 예수님을 발견하는 계기로 도구로 사용하실 정도로 저와 여러분을 넉넉히 품에 안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으로 돌아갔던 데마의 길은 한 줌도 안되는 육신의 길이요 멸망의 길입니다.
신앙의 연수가 오래되고 깊어질 수록 나의 성공과 업적보다는 오히려 나의 실패와 연약함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시고 나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의 테두리 안에 머물기바랍니다.
크든 작든 남들이 뭐라하든 말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남은 우리의 시간과 삶을 바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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