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후의 반란(왕하9:1-37절) B.C 841년경 > 수요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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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후의 반란(왕하9:1-37절) B.C 841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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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회
댓글 0건 조회 4,871회 작성일 12-02-05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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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부터 10장까지는 예후의 쿠데타에 관한 기록입니다. 예후는 북 이스라엘의 요람 왕(이세벨의 딸인 아달랴의 동생)을 죽이고 왕이 된 사람입니다.


1. 예후가 기름 부음을 받음(1-10절)

에후는 이미 열왕기서 상 19:16절에 오므리 왕가(아합왕가)의 심판 도구로 선택 되었었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 한 후 이세벨을 피하여 광야 로뎀 나무 아래 있을 때 하나님께서 새로 사명을 부여해 주신 내용이기도 합니다. 다메섹에 가서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하고 오므리 왕가에 대한 최후의 심판의 도구가 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예언대로 20년 후에 엘리사가 제자를 시켜(9:1절) 예후에게 기름을 붓게 했던 것입니다. 예후가 반란을 일으킨 때는 아람과 이스라엘의 “길르앗 라못”(갈릴리 바다 서 남쪽)을 서로 탈취하기 위해 전쟁을 벌리고 있을 때였습니다.(왕하8:28)


2. 예후의 치밀한 작전(9:11-20절)

에후는 길르앗 라못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 당시 요람왕은 아람왕 하사엘과 전쟁 중 부상을 입고 이스르엘 성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일선부대 지휘관들의 지지를 얻을 예후는(12-13절), 아직 일이 끝난 것이 아니므로 이 반란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지 말 것을 당부하였습니다.(15절) 그리고 그는 요람 왕이 있는 이스르엘 성으로 쳐들어갔습니다. 이스르엘 성에는 남 왕국(유다)의 아하시야 왕이 요람과 함께 있었습니다. 아하시야는 요람의 외조카였기에 (아합과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가 남왕국 아하시야의 아버지 여호람과 결혼했었음) 외삼촌의 병문안을 왔던 것입니다. 이스르엘성에 있던 요람왕은 아직도 예후의 반란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었기에 두 번이나 파숫군을 보내어 에후가 오는 것을 환경하게 했습니다.(17-20절)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예후는 매우 치밀한 전략가였던 것 같습니다.


3. 요람왕의 살해(21-26절)

예후는 자기를 마중 나온 요람 왕을 살해 했습니다.(24절) 요람이 죽음으로서 오므리(아합의 아버지)왕가는 4대(오므리, 아합, 아하시야: 남 왕국 아하시야와 동명이인, 요람)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오므리 왕은 44년간(B. C 885-841년) 북왕국을 통치하였습니다.) 요람의 시체는 엘리야의 예언대로 나봇의 포도원으로 만든 왕의 정원에 버려졌던 것입니다.(왕상21:19절) 예후가 엘리야의 예언을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수년전 그가 아합의 군대 장관으로 있을 때 엘리야가 찾아와 직접 예언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25절)


4. 유다 왕 아하시야의 죽음(27-29절)

외삼촌 요람에게 병문안 왔던 유다 왕 아하시야가 살해된 모습니다. 대하 22:9절에 “아하시야는 사마리아성에 숨었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역대하에 기록된 사마리아성은 곧 북 왕국 전체를 가르키는 대명사로 보아야 함) 아하시야는 미쳐 유다로 도망가지 못하고 북 왕국에 숨어 있다가 예후의 부하들에게 살해되고 만 것입니다. 아하시야는 어머니 아달랴의 영향을 받아 우상숭배 정책을 폈으며 즉위 일 년 만에 예후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던 것입니다.(대하22장)


5. 이세벨의 죽음에 관한 기록(30-37절)

아합의 아내 인 악한 왕비 이세벨의 죽음에 대한 기록입니다. 엘리야의 에언대로(오아상21:23)그녀의 시체는 개들에게 먹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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