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거부가 된 이삭(창26:12-25)
페이지 정보
본문
거부가 된 이삭(창26:12-25)
극심한 흉년을 피하여 자원이 많은 애굽으로 내려가고 있을 때 하나님은 행로 중에 나타나시어 그랄에 머물 것을 요구하시고 이 땅에 유하면 축복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당시 그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약속하신 축복은 미래의 문제이고 지금 당장 호구지책이 어려웠습니다. 자기 뿐 아니라 딸린 식솔도 많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배고파 웁니다. 그 장면을 보는 이삭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어떤 결과가 왔습니까?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니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계속하여 복을 주시므로 이삭이 창대하고 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1.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자를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무엇을 보시고 기뻐하십니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그런데 그러한 말씀을 듣고 알면서도 신자가 믿음 생활을 힘차게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대로 살다가는 눈앞에 손해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도 믿음으로 순종할 때 자신 뿐 아니라 자손만대에 축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삶의 기준이 당장 가정에서나 교회 또는 직장에서 과시적인 성과를 올리려고 하는 것보다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 까 하는 중심을 가지고 살 때 하나님은 이삭에게처럼 백배의 축복을 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이 떠나면 부자가 되어도 만족이 없고 설령 부자가 된다고 해도 오래 못 가며 별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참 행복과 삶의 보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실 때 우리는 착한 일을 넘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고후9:8) 하나님께서 은혜주지 않으시면 사람은 육적인 인간이 되어 자기 밖에 모르는 강퍅한 바로 같은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삭과 같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지금 당장의 문제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생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처럼 믿음으로 사는 자를 축복하십니다. 이삭은 믿음으로 순종했더니 그 땅에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의 소출을 얻었고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12-13)
2. 진정한 승리자(14하-22)
이삭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거부가 되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여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그 아비의 종들이 판 우물을 막고 그곳 왕 아비멜렉은 그곳에서 떠날 것을 명령했습니다. 아니꼽고 더럽고 매스껍고 치사하여 아더매치라는 속어가 있듯이 정말 치사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우물문제로 세 번이나 충돌했으나 그때마다 양보했습니다.
말이 양보이지 그 광야에서 수작업으로 우물을 판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죽자 살자 파 놓으면 와서 시비하고 우물을 메꿀 때 얼마나 열이 올랐겠습니까? 고생할 하솔들의 불만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평화를 지향(指向)해야 합니다. 그들도 염치가 있었던지 네 번째 우물까지는 시비를 하지 않아 그곳 이름을 르호봇(넓은 장소란 뜻)
이라 불렀고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였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22)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삭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는 시비를 거는 사람들과 정면충돌하여 싸우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바보같이 그때마다 저 주었습니다. 꼭 힘에 밀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당히 주장할 만한 이유가 없어서도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랬기에 양보인 것입니다. 우물은 곧 생명의 샘이며 목축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업의 절대 자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버린 것입니다. 사람이 싸우기는 쉬어도 참기는 어려운 것인데 이삭은 물질의 욕심 때문에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세상 것 사이에서 하나님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자였습니다. 세상에서 싸움을 잘하여 최고의 지위를 차지한 사람이 5성 장군이라면 이삭이야말로 마음까지 이긴 6성 장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삭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자였습니다. 하나님은 물질 때문에 물질을 보고 애굽으로 가던 이삭의 앞길을 막으시고 물질을 주시고 축복하시더니 종내는 물질을 버릴 수 있는 훈련을 세 번씩이나 시키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우리를 시험하는 것들
별 것 아닌 것은 쉽게 포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자 살자 수고하여 얻을 것을 포기하기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 흉년에 농사를 지어 100배의 소출을 얻었다면 얼마나 피눈물 나는 고생을 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농사나 목축업에 먼저 기본이 되는 것은 물입니다. 그 수원 확보에 엄청난 투자를 했을 것인데 싸우지 않기 위해 그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돌 속에 우물을 파는 고통보다 더 참기 어려운 고통이 따랐을 것입니다. 그곳을 떠났다는 것은 100배의 소출을 얻기까지 개간한 터전을 그대로 두고 쫓겨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럴 때 어찌 이판사판 싸우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고스란히 양보해주고 떠났다는 것은 전쟁보다 더한 고통을 믿음으로 이겨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자는 그러한 시험까지 이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힘이 없어 능력이 없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아닙니다. 부활의 능력을 가진 주님이 어찌 안 죽을 능력이 없으셨겠습니까?
신앙생활은 싸워 이기기보다 평화를 위하여 져 주고 양보 해 주는 용기가 훨씬 더 강한 위력이며 그러한 시험까지 이긴 자가 진정한 승리자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그랄 사람들처럼 억지 부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사람들에게 져 주고 양보하는 것 자체가 정의를 희석시키고 악한사람들의 부당성을 장려 해 주는 것 같은 의문을 느껴서 끝까지 사워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옳다고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물도 귀하고 땅도 귀하고 정의도 귀하지만 그러다보면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일그러집니다. 우물이야 다시 파면되지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깨진다면, 분노로 내속에 있는 인격이 깨진다면 삶의 맛을 회복되기가 너무도 힘듭니다. 이기는 것보다 지는 것이 최종 평가 점수가 높다는 것을 이삭은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물과 땅은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더 주실 수 있지만 내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손실되고 자신이 자기 시험에 빠진다면 그 상처의 회복은 그만큼 더 어려운 것입니다. 이렇게 이삭은 에섹(분쟁)과 싯나(억지반대)를 지나 르호봇(넓은 장소)의 우물을 얻었던 것입니다.
극심한 흉년을 피하여 자원이 많은 애굽으로 내려가고 있을 때 하나님은 행로 중에 나타나시어 그랄에 머물 것을 요구하시고 이 땅에 유하면 축복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당시 그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약속하신 축복은 미래의 문제이고 지금 당장 호구지책이 어려웠습니다. 자기 뿐 아니라 딸린 식솔도 많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배고파 웁니다. 그 장면을 보는 이삭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어떤 결과가 왔습니까?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니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계속하여 복을 주시므로 이삭이 창대하고 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1.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자를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무엇을 보시고 기뻐하십니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그런데 그러한 말씀을 듣고 알면서도 신자가 믿음 생활을 힘차게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대로 살다가는 눈앞에 손해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도 믿음으로 순종할 때 자신 뿐 아니라 자손만대에 축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삶의 기준이 당장 가정에서나 교회 또는 직장에서 과시적인 성과를 올리려고 하는 것보다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 까 하는 중심을 가지고 살 때 하나님은 이삭에게처럼 백배의 축복을 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이 떠나면 부자가 되어도 만족이 없고 설령 부자가 된다고 해도 오래 못 가며 별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참 행복과 삶의 보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실 때 우리는 착한 일을 넘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고후9:8) 하나님께서 은혜주지 않으시면 사람은 육적인 인간이 되어 자기 밖에 모르는 강퍅한 바로 같은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삭과 같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지금 당장의 문제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생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처럼 믿음으로 사는 자를 축복하십니다. 이삭은 믿음으로 순종했더니 그 땅에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의 소출을 얻었고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12-13)
2. 진정한 승리자(14하-22)
이삭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거부가 되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여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그 아비의 종들이 판 우물을 막고 그곳 왕 아비멜렉은 그곳에서 떠날 것을 명령했습니다. 아니꼽고 더럽고 매스껍고 치사하여 아더매치라는 속어가 있듯이 정말 치사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우물문제로 세 번이나 충돌했으나 그때마다 양보했습니다.
말이 양보이지 그 광야에서 수작업으로 우물을 판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죽자 살자 파 놓으면 와서 시비하고 우물을 메꿀 때 얼마나 열이 올랐겠습니까? 고생할 하솔들의 불만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평화를 지향(指向)해야 합니다. 그들도 염치가 있었던지 네 번째 우물까지는 시비를 하지 않아 그곳 이름을 르호봇(넓은 장소란 뜻)
이라 불렀고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였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22)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삭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는 시비를 거는 사람들과 정면충돌하여 싸우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바보같이 그때마다 저 주었습니다. 꼭 힘에 밀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당히 주장할 만한 이유가 없어서도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랬기에 양보인 것입니다. 우물은 곧 생명의 샘이며 목축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업의 절대 자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버린 것입니다. 사람이 싸우기는 쉬어도 참기는 어려운 것인데 이삭은 물질의 욕심 때문에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세상 것 사이에서 하나님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자였습니다. 세상에서 싸움을 잘하여 최고의 지위를 차지한 사람이 5성 장군이라면 이삭이야말로 마음까지 이긴 6성 장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삭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자였습니다. 하나님은 물질 때문에 물질을 보고 애굽으로 가던 이삭의 앞길을 막으시고 물질을 주시고 축복하시더니 종내는 물질을 버릴 수 있는 훈련을 세 번씩이나 시키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우리를 시험하는 것들
별 것 아닌 것은 쉽게 포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자 살자 수고하여 얻을 것을 포기하기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 흉년에 농사를 지어 100배의 소출을 얻었다면 얼마나 피눈물 나는 고생을 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농사나 목축업에 먼저 기본이 되는 것은 물입니다. 그 수원 확보에 엄청난 투자를 했을 것인데 싸우지 않기 위해 그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돌 속에 우물을 파는 고통보다 더 참기 어려운 고통이 따랐을 것입니다. 그곳을 떠났다는 것은 100배의 소출을 얻기까지 개간한 터전을 그대로 두고 쫓겨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럴 때 어찌 이판사판 싸우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고스란히 양보해주고 떠났다는 것은 전쟁보다 더한 고통을 믿음으로 이겨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자는 그러한 시험까지 이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힘이 없어 능력이 없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아닙니다. 부활의 능력을 가진 주님이 어찌 안 죽을 능력이 없으셨겠습니까?
신앙생활은 싸워 이기기보다 평화를 위하여 져 주고 양보 해 주는 용기가 훨씬 더 강한 위력이며 그러한 시험까지 이긴 자가 진정한 승리자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그랄 사람들처럼 억지 부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사람들에게 져 주고 양보하는 것 자체가 정의를 희석시키고 악한사람들의 부당성을 장려 해 주는 것 같은 의문을 느껴서 끝까지 사워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옳다고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물도 귀하고 땅도 귀하고 정의도 귀하지만 그러다보면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일그러집니다. 우물이야 다시 파면되지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깨진다면, 분노로 내속에 있는 인격이 깨진다면 삶의 맛을 회복되기가 너무도 힘듭니다. 이기는 것보다 지는 것이 최종 평가 점수가 높다는 것을 이삭은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물과 땅은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더 주실 수 있지만 내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손실되고 자신이 자기 시험에 빠진다면 그 상처의 회복은 그만큼 더 어려운 것입니다. 이렇게 이삭은 에섹(분쟁)과 싯나(억지반대)를 지나 르호봇(넓은 장소)의 우물을 얻었던 것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