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순종의 결과(창34: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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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순종의 결과(창34:18-31)
야곱은 하란에서 가나안에 오기까지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이 있었기에 가나안 생활이 평탄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세겜에서 장막을 세울 땅을 사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그곳 이름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강한 손으로 나를 붙들어 주셨으니 앞으로 나의 생활은 평탄할 것”이라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 딸 디나가 그 땅 추장 세겜에게 강간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34:2)
그 사건 때문에 흥분한 야곱의 아들들이 복수극을 벌리게까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1. 고의적(故意的)인 복수모의
모세의 율법은 사람을 살해했을 때 고의인가? 우발적인가를 분명히 구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의도적으로 살해한 경우는 절대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우발적인 살인일 경우는 도피성으로 피하여 생명을 보존 받을 수 있는 피신처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강간 문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 까요? 살인한 것도 아니요, 남자가 정욕에 끌려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죄가 아닐까 선의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책임을 통감하며 또 디나를 연연하여 결혼 제의까지 해 왔는데 어떻게 그러한 잔인한 살인극을 전개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①더욱이 성례인 할례를 빙자하여 복수한 점과
②누이가 겁탈 당한 것이 죄라는 것을 안다면 사람을 의도적으로 죽이는 것은 더 큰 죄라는 것을 왜 몰랐을까요?
③세겜과 그 아비 하몰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자신들이 믿던 신까지 일시에 버리고 여호와 종교로 개종할 것까지 동의했지 않습니까?
사실 이삭은 아들들의 제의를 마땅히 거절했어야 합니다. 할례를 결혼시키기 위한 그러한 조건으로 이용하려는 것을 막았어야 합니다. 우선 디나를 데려온 후 다시 생각해 보자고 심사숙고 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던 것 같아 심히 아쉬운 느낌이 드는 장면입니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어떻게 백성들이 하몰과 세겜의 할례를 받자는 말에 모두 설득되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세겜과 하몰이 신뢰를 받고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유익이 있을 때 따라주지 단순히 지도자의 말에 순응하여 자발적으로 수고나 고통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은 너무 가난했기에 부자인 야곱을 받아드리므로 자기들의 생활에 유익이 올 수 있다는 계산도 없지 않아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34:24) 어쩌튼 그런 방식으로 할례를 받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선민이 되는 것입니까? 마음의 할례가 중요합니다. 오늘날도 교회의 직분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속에 예수의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사는 자라야 진정한 예수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당시 관계된 모든 사람은 한 사람도 정상적인 사람이 없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가 자기 계산만 있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고의적인 복수모의였습니다. 오로지 감정에서 야기된 불신앙적인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그러한 모의 진행이 전혀 재동이 걸리지 않고 척척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도둑맞으려면 개도 짖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야곱도 왜 충고 한마디 안했을까요? 참으로 우리에게 많은 의문을 주고 있습니다.
2. 합동작전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갔다”는 것은 두 사람만 가서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주동이 되어 다른 형제들과 다른 하인들을 끌고 가서 살육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고 고통 중에 있는 자들, 더욱이 전혀 방비 없는 사람들을 무차별 살상했던 것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는데 더욱이 디나와 어머니가 같은 시므온과 레위가 더 분노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분하다고 해서 이 일과 아무 상관없는 주민들까지 다 죽였다는 것은 선뜻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어디에서 아들은 이러한 분노가 끓여 올랐을까요? 단순한 그들 안에 들어 있는 죄성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이들이 레아의 자녀들이란 점에서 생각 해 볼 점이 있습니다.
레아는 야곱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에 항상 가슴에 한(恨)이 서려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그 어머니 품에서 자란 레위와 시므온도 평상시 마음속에 열등감과 분노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쓴 뿌리가 있으면 언젠가 쓴물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이 대부분 문제아가 되는 것은 그런 경우인 것입니다. 누구나 다 자기도 모르게 마음에 상처가 축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러한 분노가 행동에 옮겨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간섭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폭발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그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기분 좋을 때는 의인 아닌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악인도 기분 좋을 때는 남에게 잘 해 줍니다. 그러나 자기 속에 있는 자존심이 건드려지거나 욕망이 좌절될 때는 누구든지 짐승이 될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들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애굽에 팔아 넘겼던 것도 아버지와 그들 어머니의 관계 속에서 그러한 쓴 뿌리가 마음 깊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도 충분히 유추됩니다. 자녀들 모두가 합동 작전으로 살인극에 동참했던 현실도 우리는 평상시 동병상린의 아픔이 있었던 것이 폭발되었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3. 야곱 집의 문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야곱의 집은 구약의 교회요 하나님집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사람을 살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전혀 달랐습니다. 사람을 속이고 무참하게 살해하며 가족과 재산까지 빼앗는 깡패 집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야곱집의 문제입니다. 일면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 있는 반면 다른 면에는 죄를 범하고도 죄의식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영광은 그 규모나 화려한 시설이나 건물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영광은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과 말씀에 있습니다. 이제 야곱의 집이, 교회가 참으로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되려면 어떠해야 합니까? 자기 자신만을 믿지 않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야곱의 집에는 아직도 죄성과 깨질 줄 모르는 자존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세겜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것으로 만족하려고 했습니다. 우리도 예배 의식으로만 만족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쫓아 살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디나의 잘못은 전혀 감안 안했고 또 자신들의 범죄 행위를 합법화 했습니다.
그들은 몸만 가나안 땅에 와 있었을 뿐 마음은 참으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죄를 지어도 그것이 죄인 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죄를 지어놓고도 더 큰 소리를 칩니다. 이제 야곱 집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자신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를 청산함으로 진정한 성령의 역사를 회복시키느냐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배나 거룩한 할례가 인간의 욕심에 악용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곳,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분노나 교만이나 자존심이 사라져야 합니다. 벧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만난 곳, 계신 곳이 벧엘입니다. 야곱이 벧엘로 돌아가지 않고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엉뚱한 계획을 하다 엉뚱한 사고를 치게 되었던 것을 우리는 신앙생활에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야곱은 하란에서 가나안에 오기까지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이 있었기에 가나안 생활이 평탄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세겜에서 장막을 세울 땅을 사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그곳 이름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강한 손으로 나를 붙들어 주셨으니 앞으로 나의 생활은 평탄할 것”이라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 딸 디나가 그 땅 추장 세겜에게 강간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34:2)
그 사건 때문에 흥분한 야곱의 아들들이 복수극을 벌리게까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1. 고의적(故意的)인 복수모의
모세의 율법은 사람을 살해했을 때 고의인가? 우발적인가를 분명히 구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의도적으로 살해한 경우는 절대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우발적인 살인일 경우는 도피성으로 피하여 생명을 보존 받을 수 있는 피신처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강간 문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 까요? 살인한 것도 아니요, 남자가 정욕에 끌려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죄가 아닐까 선의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책임을 통감하며 또 디나를 연연하여 결혼 제의까지 해 왔는데 어떻게 그러한 잔인한 살인극을 전개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①더욱이 성례인 할례를 빙자하여 복수한 점과
②누이가 겁탈 당한 것이 죄라는 것을 안다면 사람을 의도적으로 죽이는 것은 더 큰 죄라는 것을 왜 몰랐을까요?
③세겜과 그 아비 하몰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자신들이 믿던 신까지 일시에 버리고 여호와 종교로 개종할 것까지 동의했지 않습니까?
사실 이삭은 아들들의 제의를 마땅히 거절했어야 합니다. 할례를 결혼시키기 위한 그러한 조건으로 이용하려는 것을 막았어야 합니다. 우선 디나를 데려온 후 다시 생각해 보자고 심사숙고 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던 것 같아 심히 아쉬운 느낌이 드는 장면입니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어떻게 백성들이 하몰과 세겜의 할례를 받자는 말에 모두 설득되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세겜과 하몰이 신뢰를 받고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유익이 있을 때 따라주지 단순히 지도자의 말에 순응하여 자발적으로 수고나 고통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은 너무 가난했기에 부자인 야곱을 받아드리므로 자기들의 생활에 유익이 올 수 있다는 계산도 없지 않아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34:24) 어쩌튼 그런 방식으로 할례를 받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선민이 되는 것입니까? 마음의 할례가 중요합니다. 오늘날도 교회의 직분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속에 예수의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사는 자라야 진정한 예수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당시 관계된 모든 사람은 한 사람도 정상적인 사람이 없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가 자기 계산만 있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고의적인 복수모의였습니다. 오로지 감정에서 야기된 불신앙적인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그러한 모의 진행이 전혀 재동이 걸리지 않고 척척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도둑맞으려면 개도 짖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야곱도 왜 충고 한마디 안했을까요? 참으로 우리에게 많은 의문을 주고 있습니다.
2. 합동작전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갔다”는 것은 두 사람만 가서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주동이 되어 다른 형제들과 다른 하인들을 끌고 가서 살육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고 고통 중에 있는 자들, 더욱이 전혀 방비 없는 사람들을 무차별 살상했던 것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는데 더욱이 디나와 어머니가 같은 시므온과 레위가 더 분노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분하다고 해서 이 일과 아무 상관없는 주민들까지 다 죽였다는 것은 선뜻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어디에서 아들은 이러한 분노가 끓여 올랐을까요? 단순한 그들 안에 들어 있는 죄성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이들이 레아의 자녀들이란 점에서 생각 해 볼 점이 있습니다.
레아는 야곱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에 항상 가슴에 한(恨)이 서려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그 어머니 품에서 자란 레위와 시므온도 평상시 마음속에 열등감과 분노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쓴 뿌리가 있으면 언젠가 쓴물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이 대부분 문제아가 되는 것은 그런 경우인 것입니다. 누구나 다 자기도 모르게 마음에 상처가 축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러한 분노가 행동에 옮겨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간섭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폭발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그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기분 좋을 때는 의인 아닌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악인도 기분 좋을 때는 남에게 잘 해 줍니다. 그러나 자기 속에 있는 자존심이 건드려지거나 욕망이 좌절될 때는 누구든지 짐승이 될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들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애굽에 팔아 넘겼던 것도 아버지와 그들 어머니의 관계 속에서 그러한 쓴 뿌리가 마음 깊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도 충분히 유추됩니다. 자녀들 모두가 합동 작전으로 살인극에 동참했던 현실도 우리는 평상시 동병상린의 아픔이 있었던 것이 폭발되었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3. 야곱 집의 문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야곱의 집은 구약의 교회요 하나님집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사람을 살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전혀 달랐습니다. 사람을 속이고 무참하게 살해하며 가족과 재산까지 빼앗는 깡패 집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야곱집의 문제입니다. 일면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 있는 반면 다른 면에는 죄를 범하고도 죄의식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영광은 그 규모나 화려한 시설이나 건물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영광은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과 말씀에 있습니다. 이제 야곱의 집이, 교회가 참으로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되려면 어떠해야 합니까? 자기 자신만을 믿지 않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야곱의 집에는 아직도 죄성과 깨질 줄 모르는 자존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세겜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것으로 만족하려고 했습니다. 우리도 예배 의식으로만 만족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쫓아 살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디나의 잘못은 전혀 감안 안했고 또 자신들의 범죄 행위를 합법화 했습니다.
그들은 몸만 가나안 땅에 와 있었을 뿐 마음은 참으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죄를 지어도 그것이 죄인 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죄를 지어놓고도 더 큰 소리를 칩니다. 이제 야곱 집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자신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를 청산함으로 진정한 성령의 역사를 회복시키느냐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배나 거룩한 할례가 인간의 욕심에 악용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곳,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분노나 교만이나 자존심이 사라져야 합니다. 벧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만난 곳, 계신 곳이 벧엘입니다. 야곱이 벧엘로 돌아가지 않고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엉뚱한 계획을 하다 엉뚱한 사고를 치게 되었던 것을 우리는 신앙생활에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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