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름에 이긴 야곱(창32:2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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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름에 이긴 야곱(창32:24-32)
본문을 보면 야곱이 평상시에도 에서를 얼마나 의식하며 살았던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쩌튼 야곱은 기본적인 양심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한 잘잘못을 모르고 승리감에만 도취되어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더욱이 크리스챤들이 범하기 쉬운 죄는 무조건 승리감에만 치부하며 자기를 합리화 해 버리는 경향입니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도, 감사한 마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만 감사하면 끝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형과 아버지에게 잘못했다는 양심 때문에 초조하게 지내 왔었기에 형이 군사 400명을 데리고 마주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너무 놀랐던 것 같습니다. 야곱이 취한 행동은 충분히 그것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께 매달리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야곱 앞에 어떤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당시 야곱은 너무 초조했기에 무조건 그 사람을 붙잡고 늘어졌습니다. 야곱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
오직 야곱은 죽느냐? 사느냐?(to be or not to be) 그것만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에서가 보냈건 라반이 보냈건, 하나님께서 보내셨던 일단 이기고 보아야 했습니다. 이 결사적이고 간절함이 일단은 우리에게도 중요합니다.
1. 몸으로 오신 하나님
원래 씨름이라는 것은 자기 힘만 가지고는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좋게는 상대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요, 나쁘게는 슬쩍 속이는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야곱이란 이름도 “속임수” “사기꾼”이란 뜻으로 씨름꾼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은 오락삼아 그 게임도 했을 것이요, 어떤 때는 영역문제로 뒤엉클어져 씨름으로 결판내기도 했을 것입니다. 야곱은 그런 훈련이 된 사람이었기에 일단 이기고 보아야 했습니다. 일단 씨름에 지면 항복해야 하고 이긴 사람의 종이 되어야 했기에 질 수 없었습니다. 제일 무서운 사람은 이판사판 결사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경찰관과 소방관이 싸우면 물불을 안 가리는 소방관이 이기고, 소방관과 소경이 싸우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소경이 이긴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 소경도 노인한테는 딸싹 못합니다. 노인은 이판사판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그러한 야곱은 쓰러뜨릴 수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야곱이 싸운 그 사람은 분명히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전에도 아브라함을 사람 모습으로 방문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처럼 야곱에게 직접 나타나신 것은 야곱 자신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야곱은 이 씨름을 통하여 자신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자신감 때문에 어떤 어려움도 능히 극복해 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26, 28절 참고) 야곱에게 장자의 직분을 맡게 하셨고(25:23) 이삭을 통하여 만민이 야곱을 섬기고 열국이 야곱에게 굴복하게 된다는 축복을 하게 하신 하나님께서(창27:29) 야곱을 통해 그 사명과 역할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감과 확신이 필요하다고 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께서 져 주신 것이지 야곱이 이긴 것이 아닙니다. 또 환도뼈까지 위골되었으나 놓지 않고 매달린 “야곱의 끈기 있는 근성” 그것이 오늘 우리 모두의 신앙자세가 되어야 하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기도한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안 만나 주시겠습니까?(렘29:13)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까지 “이스라엘”이라고 바꾸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이겼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이제 “너는 어떤 상대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서 12:4절에 보면 야곱은 이긴 후에도 붙잡고 울면서 그에게 간구했다고 했습니다. 그 울음은 바로 그 분이 하나님인 것을 알고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격하여 터져 나온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이사야 41:14절에 보면 하나님은 야곱을 지렁이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야곱에게 직접 오셔서 용기를 주시고 야곱의 자아(自我)를 깨뜨려서 복음적 사명 수행자로 만들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곧 씨름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야곱처럼 속임수만 써서 요리 저리 빠져 나가면 안 됩니다. 이제 하나님을 붙잡고 매달려야 합니다. 지렁이 같은 나에게도 오시어 만나주시고 이름을 바꾸어 주시고 축복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깨달은 야곱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무엇을 느꼈습니까? 이 사람은 자기를 죽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칼이나 무기가 없었지 않습니까? 힘으로도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쳐서 환도 뼈를 부러뜨릴 정도면 명치 쪽에 한방 먹였다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왜 저녁 내내 자기와 싸운 것입니까? 그것은 야곱에게 자신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새벽녘에야 알았습니다.
환도 뼈가 위골된 후 알았습니다. 그 분은 벧엘에 오셨던 하나님이신 것을 깨달았습니다.(호12:4)
야곱은 웬만해서 울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자존심 하나로 버티어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깨달은 후 눈물이 터졌던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지려 했습니다. 그런데 에서와의 문제는 해답이 나오지 않았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친히 오시어 그것이 교만 때문인 것을 깨우쳐 주셨던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내 자존심, 내 고집, 내 기질을 하나님 앞에서 꺾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나를 이기신 것이며 또 내가 하나님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나는 “이스라엘”이 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이 은혜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야곱이 평상시에도 에서를 얼마나 의식하며 살았던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쩌튼 야곱은 기본적인 양심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한 잘잘못을 모르고 승리감에만 도취되어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더욱이 크리스챤들이 범하기 쉬운 죄는 무조건 승리감에만 치부하며 자기를 합리화 해 버리는 경향입니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도, 감사한 마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만 감사하면 끝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형과 아버지에게 잘못했다는 양심 때문에 초조하게 지내 왔었기에 형이 군사 400명을 데리고 마주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너무 놀랐던 것 같습니다. 야곱이 취한 행동은 충분히 그것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께 매달리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야곱 앞에 어떤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당시 야곱은 너무 초조했기에 무조건 그 사람을 붙잡고 늘어졌습니다. 야곱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
오직 야곱은 죽느냐? 사느냐?(to be or not to be) 그것만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에서가 보냈건 라반이 보냈건, 하나님께서 보내셨던 일단 이기고 보아야 했습니다. 이 결사적이고 간절함이 일단은 우리에게도 중요합니다.
1. 몸으로 오신 하나님
원래 씨름이라는 것은 자기 힘만 가지고는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좋게는 상대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요, 나쁘게는 슬쩍 속이는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야곱이란 이름도 “속임수” “사기꾼”이란 뜻으로 씨름꾼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은 오락삼아 그 게임도 했을 것이요, 어떤 때는 영역문제로 뒤엉클어져 씨름으로 결판내기도 했을 것입니다. 야곱은 그런 훈련이 된 사람이었기에 일단 이기고 보아야 했습니다. 일단 씨름에 지면 항복해야 하고 이긴 사람의 종이 되어야 했기에 질 수 없었습니다. 제일 무서운 사람은 이판사판 결사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경찰관과 소방관이 싸우면 물불을 안 가리는 소방관이 이기고, 소방관과 소경이 싸우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소경이 이긴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 소경도 노인한테는 딸싹 못합니다. 노인은 이판사판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그러한 야곱은 쓰러뜨릴 수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야곱이 싸운 그 사람은 분명히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전에도 아브라함을 사람 모습으로 방문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처럼 야곱에게 직접 나타나신 것은 야곱 자신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야곱은 이 씨름을 통하여 자신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자신감 때문에 어떤 어려움도 능히 극복해 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26, 28절 참고) 야곱에게 장자의 직분을 맡게 하셨고(25:23) 이삭을 통하여 만민이 야곱을 섬기고 열국이 야곱에게 굴복하게 된다는 축복을 하게 하신 하나님께서(창27:29) 야곱을 통해 그 사명과 역할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감과 확신이 필요하다고 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께서 져 주신 것이지 야곱이 이긴 것이 아닙니다. 또 환도뼈까지 위골되었으나 놓지 않고 매달린 “야곱의 끈기 있는 근성” 그것이 오늘 우리 모두의 신앙자세가 되어야 하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기도한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안 만나 주시겠습니까?(렘29:13)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까지 “이스라엘”이라고 바꾸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이겼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이제 “너는 어떤 상대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서 12:4절에 보면 야곱은 이긴 후에도 붙잡고 울면서 그에게 간구했다고 했습니다. 그 울음은 바로 그 분이 하나님인 것을 알고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격하여 터져 나온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이사야 41:14절에 보면 하나님은 야곱을 지렁이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야곱에게 직접 오셔서 용기를 주시고 야곱의 자아(自我)를 깨뜨려서 복음적 사명 수행자로 만들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곧 씨름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야곱처럼 속임수만 써서 요리 저리 빠져 나가면 안 됩니다. 이제 하나님을 붙잡고 매달려야 합니다. 지렁이 같은 나에게도 오시어 만나주시고 이름을 바꾸어 주시고 축복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깨달은 야곱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무엇을 느꼈습니까? 이 사람은 자기를 죽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칼이나 무기가 없었지 않습니까? 힘으로도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쳐서 환도 뼈를 부러뜨릴 정도면 명치 쪽에 한방 먹였다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왜 저녁 내내 자기와 싸운 것입니까? 그것은 야곱에게 자신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새벽녘에야 알았습니다.
환도 뼈가 위골된 후 알았습니다. 그 분은 벧엘에 오셨던 하나님이신 것을 깨달았습니다.(호12:4)
야곱은 웬만해서 울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자존심 하나로 버티어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깨달은 후 눈물이 터졌던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지려 했습니다. 그런데 에서와의 문제는 해답이 나오지 않았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친히 오시어 그것이 교만 때문인 것을 깨우쳐 주셨던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내 자존심, 내 고집, 내 기질을 하나님 앞에서 꺾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나를 이기신 것이며 또 내가 하나님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나는 “이스라엘”이 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이 은혜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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