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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사랑의 눈물(창43: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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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회
댓글 0건 조회 6,127회 작성일 06-12-20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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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사랑의 눈물(창43:16-34)

이대로 굶어 죽을 것인가? 베냐민을 보낼 것인가? 야곱의 기가 막힌 고뇌는 결국 한 가닥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바라는 것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한 요셉은 베냐민을 함께 보낼 것을 드디어 결단했습니다. 오늘은 열형들과 베냐민은 모르고 있었지만 야곱의 열두 형제가 함께 만나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요셉의 집에서 13년 만에 만찬을 나누는 극적이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1. 가슴 조인 형들
꿈에도 그리고 사랑했던 동생 베냐민이 함께 온 것을 확인한 요셉의 가슴은 얼마나 기쁨으로 울렁거렸겠습니까?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러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요셉은 철저하게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 그들을 대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들 사이를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까? 요셉은 애정과 진실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으며 그러는 사이 형들의 마음은 불안과 초조로 가슴을 조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않았던 첫 번째 방문과는 너무도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자기들을 정탐꾼으로 몰아세웠고 시므온을 보는 앞에서 결박하기까지 서슬이 새파랗던 요셉이 이게 웬일입니까? 자신의 집으로 인도하고 짐승을 잡아 성찬을 준비하라고 지시합니다. 형들은 자루에 들어있던 돈 문제로 엄한 사비가 있을까 두려워했는데 오히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 상관하지 않겠다고 너무도 관대하게 대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시므온도 석방시켰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어 정오까지 그가 오기를 기다리는 형들의 심정을 한번 가늠해 보십시오. 얼마나 어리둥절했겠습니까? 차라리 죄를 묻고 호통을 친 것보다도 더 불안하고 초조해서 아마 간이 타들어 갔을 것 같습니다. 각자 각자 나름대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을 것입니다. 죄의 책벌은 꼭 가혹한 형벌만이 아닌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너그러운 관용이 더욱 반성하고 뜨거운 회개의 눈물을 흐리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간이 형들에게는 여삼추(如三秋)같이 길고 지옥 같았을 것 같습니다. 20년 전 요셉에게 저질렀던 죄와 아버지를 속인 죄 또 자신들의 불성실했던 모든 숨은 죄들까지 생각나며 불안했고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시리라는 뼈아픈 고통이 심령 속에서 고동쳤지 않았을까 상상이 됩니다.
요셉은 형들과 베냐민이 두렵거나 불안해하지 않도록 지난번과는 180˚로 다르게 부드럽게 대했을 것입니다. 그런 요셉의 태도가 형들에게 몇 갑절 더 공포스러움을 느끼게 했을 것 같습니다.
요셉이 그처럼 자신의 가점은 숨기고 있었던 데는 여러 가지 깊은 생각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①베냐민 문제를 통하여 자신들이 헤쳤던 요셉을 가슴속에 상기케 하므로 뼈저린 회개를 촉구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②베냐민에게도 자기에게 차별했던 감정이 있는가를 점검해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③행여나 대화 가운데 내용이 진실치 못하다면 그러한 형들의 부정직성을 이제는 완전하게 고쳐주고 싶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화해는 겉으로 사랑하고 용서 해 주는 것만으로 불충분합니다. 속죄와 화해의 개념은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속죄는 죄를 지었던 그 죄를 덮어서 없었던 것으로 여기는 것이며 화해는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과거의 허물을 정산하고 서로의 상처가 치유되어야 합니다. 서로가 자신과 하나님 앞에 정직한 통정(通情)만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곧 속죄와 더불어 화해를 원하신 사랑의 폭발이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 되는 것이 진정한 화해인 줄 믿습니다. 요셉의 깊은 생각은 바로 그 점이었을 것입니다.

2. 숨어서 운 요셉(30절)
요셉이 형들과 베냐민을 만났으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겠습니다. 그래도 그 중에 제일 중요한 이야기는 아버지 소식이었습니다.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지금까지 생존하셨느냐?”(26) 그들은 대답을 한 후에도 머리 숙여 절했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굽신굽신한 것입니다.
요셉이 꾼 꿈이 그대로 정확하게 실현된 것입니다. 형제들의 열한 곡식단이 요셉의 곡식 단에 절한 꿈이었는데 (37:7) 곡식문제로 20년만이 그 꿈이 현실화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너무도 정확히 진행하고 계신다는 것이 실증으로 나타나기에 우리는 성경말씀을 믿으며 기뻐함과 동시에 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침착하고 감정을 통제하는 대인 요셉이라도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베냐민 이야기가 나올 때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타는 듯 하여 급히 안방으로 들어가 한참 울고 얼굴을 씻은 다음 정색을 하고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요셉의 심경을 우리가 감히 다 이해는 할 수 없지만 쓰라린 마음은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모두가 아버지 피를 받은 한 형제들이지만 같은 어머니에게서 낳은 베냐민을 끔찍이 생각하는 요셉을 볼 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예수님의 피로 사서 한 형제가 되고 가족이 된 우리는 믿음 안에 형제인 것을 절감하며 더욱 사랑하고 기도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이내 교우끼리 더 깊은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갈6:10)고 이르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편애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도 편애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그 모습을 안 보이려고 숨어서 울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들이 속 깊은 대인(大人)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3. 의미 있는 만찬석(32-34)
요셉은 애굽의 풍습대로 식탁을 따로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큰 형으로부터 차례로 앉게 하였고 베냐민에게 다른 형에 비하여 5배나 풍성히 대접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잔치석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왜 배석을 구분하였습니까?
요셉의 상, 형제들의 상, 애굽인의 상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애굽인은 히브리인들과 같이 음식을 먹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 좌석의 배치를 요셉이 지시하였는데 큰 형부터 시작하여 장유의 순서대로 앉게 하였습니다. 그때 그들이 이상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 것은 요셉이 나중에 자신은 형들에 대해 이미 다 알고 있었음을 깨닫게 하고 싶었을 것이요, 또 형제간에 차서를 따라 서로 존경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질서 의식을 분명히 해 주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3) 베냐민 앞에는 다른 형제보다 더 배식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형들이 베냐민을 지금도 질투하고 있는가를 떠 보기 위한 의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그런 낌새를 느끼지 못했기에 요셉의 마음이 기뻐서 함께 즐거워했습니다.(34) 그때 요셉의 마음이 한결 놓였을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가 생각할 것은 그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즐겁게 식사를 했다고 해서 진정으로 하나 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같은 식탁에 앉아 있기는 했지만 형들은 빨리 곡물을 사서 돌아가려는 생각뿐이었을 것이며 요셉은 형들의 마음이 이제 얼마나 달라졌는지 그것이 궁금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는 무엇보다 먼저 정신이 일치되고 영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생각이 다른데 자리만 함께 하고 있다고 해서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분열된 것을 하나 되게 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뿐입니다. 독일이 통일 되었다고 해서 하나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통일문제도 그렇습니다. 경제, 식량문제보다 더 나아가 정신과 영적인 일치가 와야 합니다. 영적으로 일치하지 못했던 이스라엘도 종국은 남북왕국으로 분열되고 종국은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지 않았습니까?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관계의 회복을 원하십니까? 나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요셉이 형제들과 하나 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이었습니다. 형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로 요셉에게 도움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서로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문제의 원인만 생각하면 불가능합니다. 한 식탁에서 시시콜콜 잘잘못을 가려 보아야 소용없습니다. 요셉처럼 먼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갈 때 마음이 넓어집니다. 남의 허물을 용납하고 남는 넉넉한 여유가 생깁니다. 큰 사람, 관용의 사람이 되는 것을 하나님의 영이 내속에 계셔야 합니다. 요셉의 식탁도 아름답고 귀했지만 우리는 성령으로 하나 된 진정한 하나님의 한 가족들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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