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되는 쓰라린 상처(창42:26-38)
페이지 정보
본문
재생되는 쓰라린 상처(창42:26-38)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린 열형들은 무서운 죄의식에 사로 잡혔습니다.(21절)
괴로워하는 형들의 모습을 본 요셉은 가슴이 아파 울었다고 했습니다.(24절)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은 20년간 잠잠한 듯 하였으나 엉뚱하게 이렇게 불거져 나올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어떠한 범죄 행위도 완전히 잊혀 질 수 없습니다. 그 양심은 언젠가는 반드시 되살아납니다. 그것을 회개하도록 성령님은 자극합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현대인들의 거의 대다수가 양심이 화인 맞아 감각 기능을 상실하여 죄책감을 못 느끼고 있다는 점입니다. 내가 잘못한 과오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리화 시키며 아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심각한 병입니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심각한 현대인의 병입니다.
1. 더욱 공포스러운 요셉의 형제들(26-28)
둘째형 시므온을 인질로 잡아 둔 요셉은 형들이 자루에 곡물을 가득 가득 채운 이후 가지고 온 돈까지 넣어서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객점(客店)에 들어와 한 사람이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어본 즉 돈이 자루 아구에 그대로 있는 게 아닙니까?
깜짝 놀라서 다른 형제들에게 말하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 하고 어찌 할 바를 몰랐습니다. 돈을 자루에 다시 넣어 보낸 것은 요셉의 깊은 애정의 표현이었습니다. 생활고에 허덕이는 가족들의 형편을 생각하며 가슴이 아팠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게 하려는 호의(好意)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형들은 그 일로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돈이 들어있으면 기뻐해야 할 일인데 왜 그렇게 두려웠을까요? 그것은 애굽의 총리대신이 분명 생트집을 잡아 그들을 죽이려는 계략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들 생각에는 “이제 너희들은 다 죽은 목숨인 줄 알라”는 사형통보로 받아 들여졌을 것입니다. 형들은 왜 하필 우리에게만 정탐꾼으로 트집을 잡고 돈까지 넣어 보냈단 말인가? 거기에 시므온을 자기들 보는 앞에서 묶어 인질로 잡아두기까지 했습니다. 아무리 지혜를 짜 내어도 흔쾌한 해답이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돈이 들어 있는 것이 기쁘기는커녕 더욱 공포감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뭔지 모르게 자기들을 놓고 엄청난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은 그들을 더욱 공포스럽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죄지은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죄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처럼 의로운 사람은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오히려 떳떳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과 의인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죄가 있는 사람은 남의 호의(好意)도 오히려 의심하고 경계합니다. 그래서 감사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요셉은 매사를 하나님의 일과 관련지어 생각했고 반면 형들은 불 신앙적으로 구부러진 이성(理性)과 자기중심적 사고(思考)로 받아들이고 해석했기에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어두움의 세력은 오히려 두려워하고 거부했습니다.(요1:10-11) 그러나 길을 찾은 백성은 얼마나 감격스런 은혜입니까?
2. 아들들의 고민
아들들에게 있어서 이제 더 심각한 고민거리가 생겼습니다. 곡물자루에 돈이 그대로 들어있는 것도 심상치 않은데 또 어떻게 아버지를 설득하여 베냐민을 데리고 가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찍이 요셉을 잃어버린 아픔을 가진 아버지가 시므온이 그들의 말대로 인질로 잡혀 있는지 아니면 중간에 어떤 사고나 당하지 아니했는지 어떻게 믿어 줄 것인가? 또 베냐민까지 데리고 가겠다고 하면 잃어버린 요셉 생각이 떠오를 것이며 어떤 반응을 보이시게 될 지 얼마나 마음이 조렸겠습니까? 민수기서 32:23절에 보면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형들은 아직 폭로 되지 않은 그들의 숨은 죄가 생각나서 얼마나 마음이 조리고 불안 초조했겠습니까? 그들은 과거 완전범죄를 하였다고 자위할 때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였으나 범죄가 노출될 위기에 처하자 얼마나 뼈가 마르는 것 같은 고통을 느껴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반시 죄를 적발시켜 그 죄 값을 치루시게 하시는 공의로운 분이심을 실감해야 합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죄 값을 치루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에 필요하셔서 막대기로 사용하셨다고 해도 결국 죄 문제는 다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행여나 내가 하나님의 구속사에 악역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에게 돌아온 아들들은 기억도 하기 싫고 더더욱 다시 거론하기 싫은 요셉 이야기를 반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보고하며 옛날의 쓰라린 사건을 아버지 앞에서 상기하며 설명할 때 얼마나 양심에 가책을 느꼈겠습니까? 스스로 얼굴이 붉어졌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저주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의 총리대신인 요셉이 그때 팔아버린 동생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까지는 그래도 죄를 토설치 않았습니다. 반성은 했지만 회개는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 가닥 양심이 살아있다면 죄인들은 그때가 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아직도 아버지 앞에서 진실을 고백하지 못하고 숨기며 거짓 연극을 하고 있는 가슴은 사람이라면 가슴이 숯덩이처럼 타 들어갔을 것입니다. 형들은 베냐민을 데려오라는 애굽의 총리대신과 보낼 수 없다는 아버지 사이에서 진실을 말할 수 없었으니 그들의 그 고민스러움은 하나님께서 조이시는 심각한 고문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서서히 돌아가는 맷돌처럼 우리를 부수어서 신생의 재창조를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재생된 야곱의 상처(36-38)
야곱은 곡식을 구하려 애굽에 다녀온 아들들로부터 엄청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시므온이 인질로 잡혀 있으며 또 베냐민을 데리고 다시 오지 않으면 시므온을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자루에 돈을 다시 넣어주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생트집을 잡으려는 게 틀림없다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식량을 가져 온 것을 보면 자식들의 증언은 거짓말이 아닌 것 같은데 어찌해야 좋을지? 야곱은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큰 분노와 절망에 빠졌습니다. 야곱은 20년전의 악몽이 떠오르며 요셉의 기억이 되살아나 가슴이 미여질 것 같았을 것입니다. 베냐민을 함께 보내면 베냐민도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는 자식들을 향한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36절) 요셉사건으로 야곱은 자식들을 믿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죄가 숨어 있는 곳에 야기되는 문제입니다. 아이성 공격때 이스라엘이 왜 실패 했습니까? 아간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죄는 불화를 가져다 줍니다. 죄는 불신을 가져다 줍니다. 죄는 될 일도 안 되게 만드는 은근한 실패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큰 아들 르우벤이 야곱에게 시므온과 베냐민을 데려오지 못하면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이라고 말했습니다. 불신의 사람들은 극단적인 맹세로 함부로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베냐민을 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너희 행하는 길에서 재난이 그 몸에 미치면 너희가 나의 흰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 가게 함이 되리라”(38)고 화까지 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야곱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무던히도 잘 참아왔습니다. 무려 20년이나 쓰라린 가슴을 부둥켜 안고 참아왔습니다. 말하지 않는 부모님의 그 아린 가슴을 자녀들이 어찌 알아주었겠습니까? 그런데 상처가 되살아났던 것입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아픈 가슴을 쓸어 안았습니다. 형들의 범죄는 그만큼 자신들도 괴롭게 했고 다른 사람에게도 깊은 상처를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생명이 귀하면 남의 생명도 귀한 줄 알아야 합니다. 요셉을 파는데 한 마음이 되었던 형들처럼 우리는 악한 일에 생각없이 동조해서는 안됩니다. 자기 감정 때문에 형제를 미워하고 질투했던 형들의 비틀어진 마음은 이처럼 야곱 가정에 엄청난 재난을 가져오게 했던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깊은 교훈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의 섭리안에 행하여 지고 있다는 믿음으로 받아들인 믿음의 사람 요셉과 죄를 범하고도 끝까지 은패시키며 두려운 공포속에 허덕여야 했던 형들과의 관계는 바로 그것이 천국과 지옥생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린 열형들은 무서운 죄의식에 사로 잡혔습니다.(21절)
괴로워하는 형들의 모습을 본 요셉은 가슴이 아파 울었다고 했습니다.(24절)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은 20년간 잠잠한 듯 하였으나 엉뚱하게 이렇게 불거져 나올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어떠한 범죄 행위도 완전히 잊혀 질 수 없습니다. 그 양심은 언젠가는 반드시 되살아납니다. 그것을 회개하도록 성령님은 자극합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현대인들의 거의 대다수가 양심이 화인 맞아 감각 기능을 상실하여 죄책감을 못 느끼고 있다는 점입니다. 내가 잘못한 과오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리화 시키며 아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심각한 병입니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심각한 현대인의 병입니다.
1. 더욱 공포스러운 요셉의 형제들(26-28)
둘째형 시므온을 인질로 잡아 둔 요셉은 형들이 자루에 곡물을 가득 가득 채운 이후 가지고 온 돈까지 넣어서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객점(客店)에 들어와 한 사람이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어본 즉 돈이 자루 아구에 그대로 있는 게 아닙니까?
깜짝 놀라서 다른 형제들에게 말하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 하고 어찌 할 바를 몰랐습니다. 돈을 자루에 다시 넣어 보낸 것은 요셉의 깊은 애정의 표현이었습니다. 생활고에 허덕이는 가족들의 형편을 생각하며 가슴이 아팠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게 하려는 호의(好意)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형들은 그 일로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돈이 들어있으면 기뻐해야 할 일인데 왜 그렇게 두려웠을까요? 그것은 애굽의 총리대신이 분명 생트집을 잡아 그들을 죽이려는 계략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들 생각에는 “이제 너희들은 다 죽은 목숨인 줄 알라”는 사형통보로 받아 들여졌을 것입니다. 형들은 왜 하필 우리에게만 정탐꾼으로 트집을 잡고 돈까지 넣어 보냈단 말인가? 거기에 시므온을 자기들 보는 앞에서 묶어 인질로 잡아두기까지 했습니다. 아무리 지혜를 짜 내어도 흔쾌한 해답이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돈이 들어 있는 것이 기쁘기는커녕 더욱 공포감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뭔지 모르게 자기들을 놓고 엄청난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은 그들을 더욱 공포스럽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죄지은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죄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처럼 의로운 사람은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오히려 떳떳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과 의인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죄가 있는 사람은 남의 호의(好意)도 오히려 의심하고 경계합니다. 그래서 감사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요셉은 매사를 하나님의 일과 관련지어 생각했고 반면 형들은 불 신앙적으로 구부러진 이성(理性)과 자기중심적 사고(思考)로 받아들이고 해석했기에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어두움의 세력은 오히려 두려워하고 거부했습니다.(요1:10-11) 그러나 길을 찾은 백성은 얼마나 감격스런 은혜입니까?
2. 아들들의 고민
아들들에게 있어서 이제 더 심각한 고민거리가 생겼습니다. 곡물자루에 돈이 그대로 들어있는 것도 심상치 않은데 또 어떻게 아버지를 설득하여 베냐민을 데리고 가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찍이 요셉을 잃어버린 아픔을 가진 아버지가 시므온이 그들의 말대로 인질로 잡혀 있는지 아니면 중간에 어떤 사고나 당하지 아니했는지 어떻게 믿어 줄 것인가? 또 베냐민까지 데리고 가겠다고 하면 잃어버린 요셉 생각이 떠오를 것이며 어떤 반응을 보이시게 될 지 얼마나 마음이 조렸겠습니까? 민수기서 32:23절에 보면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형들은 아직 폭로 되지 않은 그들의 숨은 죄가 생각나서 얼마나 마음이 조리고 불안 초조했겠습니까? 그들은 과거 완전범죄를 하였다고 자위할 때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였으나 범죄가 노출될 위기에 처하자 얼마나 뼈가 마르는 것 같은 고통을 느껴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반시 죄를 적발시켜 그 죄 값을 치루시게 하시는 공의로운 분이심을 실감해야 합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죄 값을 치루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에 필요하셔서 막대기로 사용하셨다고 해도 결국 죄 문제는 다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행여나 내가 하나님의 구속사에 악역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에게 돌아온 아들들은 기억도 하기 싫고 더더욱 다시 거론하기 싫은 요셉 이야기를 반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보고하며 옛날의 쓰라린 사건을 아버지 앞에서 상기하며 설명할 때 얼마나 양심에 가책을 느꼈겠습니까? 스스로 얼굴이 붉어졌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저주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의 총리대신인 요셉이 그때 팔아버린 동생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까지는 그래도 죄를 토설치 않았습니다. 반성은 했지만 회개는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 가닥 양심이 살아있다면 죄인들은 그때가 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아직도 아버지 앞에서 진실을 고백하지 못하고 숨기며 거짓 연극을 하고 있는 가슴은 사람이라면 가슴이 숯덩이처럼 타 들어갔을 것입니다. 형들은 베냐민을 데려오라는 애굽의 총리대신과 보낼 수 없다는 아버지 사이에서 진실을 말할 수 없었으니 그들의 그 고민스러움은 하나님께서 조이시는 심각한 고문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서서히 돌아가는 맷돌처럼 우리를 부수어서 신생의 재창조를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재생된 야곱의 상처(36-38)
야곱은 곡식을 구하려 애굽에 다녀온 아들들로부터 엄청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시므온이 인질로 잡혀 있으며 또 베냐민을 데리고 다시 오지 않으면 시므온을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자루에 돈을 다시 넣어주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생트집을 잡으려는 게 틀림없다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식량을 가져 온 것을 보면 자식들의 증언은 거짓말이 아닌 것 같은데 어찌해야 좋을지? 야곱은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큰 분노와 절망에 빠졌습니다. 야곱은 20년전의 악몽이 떠오르며 요셉의 기억이 되살아나 가슴이 미여질 것 같았을 것입니다. 베냐민을 함께 보내면 베냐민도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는 자식들을 향한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36절) 요셉사건으로 야곱은 자식들을 믿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죄가 숨어 있는 곳에 야기되는 문제입니다. 아이성 공격때 이스라엘이 왜 실패 했습니까? 아간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죄는 불화를 가져다 줍니다. 죄는 불신을 가져다 줍니다. 죄는 될 일도 안 되게 만드는 은근한 실패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큰 아들 르우벤이 야곱에게 시므온과 베냐민을 데려오지 못하면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이라고 말했습니다. 불신의 사람들은 극단적인 맹세로 함부로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베냐민을 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너희 행하는 길에서 재난이 그 몸에 미치면 너희가 나의 흰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 가게 함이 되리라”(38)고 화까지 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야곱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무던히도 잘 참아왔습니다. 무려 20년이나 쓰라린 가슴을 부둥켜 안고 참아왔습니다. 말하지 않는 부모님의 그 아린 가슴을 자녀들이 어찌 알아주었겠습니까? 그런데 상처가 되살아났던 것입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아픈 가슴을 쓸어 안았습니다. 형들의 범죄는 그만큼 자신들도 괴롭게 했고 다른 사람에게도 깊은 상처를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생명이 귀하면 남의 생명도 귀한 줄 알아야 합니다. 요셉을 파는데 한 마음이 되었던 형들처럼 우리는 악한 일에 생각없이 동조해서는 안됩니다. 자기 감정 때문에 형제를 미워하고 질투했던 형들의 비틀어진 마음은 이처럼 야곱 가정에 엄청난 재난을 가져오게 했던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깊은 교훈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의 섭리안에 행하여 지고 있다는 믿음으로 받아들인 믿음의 사람 요셉과 죄를 범하고도 끝까지 은패시키며 두려운 공포속에 허덕여야 했던 형들과의 관계는 바로 그것이 천국과 지옥생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