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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파리재앙(출8: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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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회
댓글 0건 조회 6,570회 작성일 07-05-20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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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어떠한 재앙들이 내렸습니까?(피, 개구리, 이 재앙)
그러나 바로의 마음은 더 완강해 졌습니다. 한마디로 더 오기가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네 번째 내린 재앙이 파리재앙입니다. 사실 왕은 뚝심이 있는 것 같지만 자살적인 경쟁을 벌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바로 왕에 한(限)한 사실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다투고 있는 모든 죄인들의 투쟁이 다 이와 같이 얼빠진 일에 속한 것입니다. 치고 쳐도 계속 회개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러한 이스라엘에게도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 하느냐?” (사1:5)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요구 사항은 불변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잘못한 줄 알면서 박박 우겨되고, 악(惡)인 줄 알면서 끝까지 선(善)을 공격하고 비 진리인 줄 알면서 진리를 공박하는 어리석은 일을 계속해서는 안 됩니다.

1. 파리재앙은 공중 재앙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재앙은 강, 세 번째 재앙은 땅에서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나 여기 파리 재앙은 공중에서 발생된 것을 간과(看過)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것은 계속 거부하면 할수록 심판의 영역(領域:sphere)이 넓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파리 떼는 70인 역에는 κμϒόΜμια(쿠노뮈아), 즉 개파리(dog-fly)를 번역된 것을 보면 지금의 파리보다 더 크고 털이 많아 사람을 쏘는 파리 떼로 생각됩니다. 우리도 어렸을 때 쇠파리에 물려 살갗에 피가 삐쭉 삐쭉 나고 쑤시는 고통을 당해 본 경험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파리 떼가 집집마다 가득하고 공간마다 우굴 거리므로 아래로도 위로도 피할 수 없고 따끔따끔하게 쏘아대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파리 재앙은 모세의 권능의 지팡이가 사용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자기 종을 통하여 그 손에 지팡이를 들고 일하게 하시지만 때로는 하나님이 직접 역사하신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2. 재앙의 차별성(22절)
일반적으로 이 세상에서는 선과 악이 같이 취급을 받으며 이 양자(兩者) 사이에 별로 구별이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마5:45, 전9:2) 하나님께서 땅에 내린 전염병이나 가뭄, 홍수 기타 재앙을 보면 아무런 구별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자세히 관찰하면 동양 사상에도 분명 권선징악(勸善懲惡) 사상이 있고 하나님은 모든 족속을 똑같이 다루시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분한 것은 하나님은 법을 준수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베푸시고, 파괴하는 자에게는 벌을 주십니다. 사울, 헤롯대왕, 나폴레옹 같은 사람은 어떤 재앙을 입었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일러주었습니다.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나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경험한 바도 행복의 균형은 역시 선한 사람 편으로 중량이 쏠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끝날 에도 양과 염소를 분별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마25:31-33) 한쪽에는 하늘의 즐거움과 완전한 행복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는 영원한 어두움만 있습니다.(유다서 13절) 하나님은 개구리 재앙 때와 마찬가지로 사전에 경고했습니다.(20-21절) 그리고 파리재앙은 차별화하시겠다고 했습니다.(22절) 지금까지는 이스라엘도 불편한 고통을 애굽인과 더불어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런 고통에 동참자가 되도록 허용한 이유는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불평에 대한 징벌과 정결케 하는 훈련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고센지방에는 파리가 없게 하시겠다고 하시며 “내가 여호와인 줄 네(바로)가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바로는 의문시 했을 것입니다.
①하나님은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보호하지 못한다는 것
②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③하나님이 극단적인 사태로 끌고 나가지 않을 것 등을 의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재앙을 내리다가 곧 중지하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만약 극단적인 사태가 온다면 이스라엘도 함께 멸망할 것 아니겠는가 생각하며 은근히 곧 재앙은 멈출 것이라고 판단했겠지요. 하나님은 그러한 바로의 내심(內心)을 모르실리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파리재앙은 바로에게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은 확실하게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3. 바로의 타협안(25-27)
이러한 하나님의 재앙 앞에서 바로는 타협안을 제시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종교문제에 타협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종교문제에 거부감을 가지고 나서는 사람들에게는 흔히 편리한 처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일을 거룩되게 지키라고 했으면 지켜야 합니다. 어떻게든지 적당히 지키고, 적당히 즐기고, 적당히 편해 보려는 태도는 하나님께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외에 종교적인 모든 계율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마음의 밑바닥에 꿈틀거리고 있는 불복종의 정신을 가면으로 덮어씌우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제안에 모세는 즉각 거절했고 또 모세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또 당시의 종교적 갈등 문제가 그것을 허용할 수도 없었습니다.(26절 하단참조) 또 교회와 세상 간에는 충분하고 완벽한 분리가 있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애굽인의 풍습과 마찰되지 않는 예배, 세상적인 예배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원칙이 있어야지 편리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 편리 위주의 사상이 들어오면 그것은 사실상 영적능력의 상실을 가져오고 연약함과 수치를 증명하는 결과가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는 결국 승인합니다. 그러나 단 조건은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28절) 이때 모세는 분명히 쐐기를 박았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기만적인 행동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의 마음은 완강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지 않았습니다.(32절) 결국 그의 강퍅한 고집은 바로의 운명을 거의 확정짓고 있었습니다. 바로가 이상의 경험을 겪고도 그렇게 완강해 졌습니다. 그것은 회복되지 않았으니 완고와 고집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고통 아래 있을 때는 만약 하나님이 이 어려운 일을 제거해 주시면 생명까지라도 바치겠다는 희생을 맹세하지만 그 맹세를 이행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것도 한번 생각해 봄직 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변소에 갈 때와 올 때가 다르다” 했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러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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