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생축재앙(출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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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바로에게 경고하게 했습니다. 계속 하나님의 요구를 거절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억지로 잡아두면 여호와의 손이 들에 있는 생축(참, 마귀, 낙타, 소, 양등)에게 심한 돌림병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재앙은 주로 재물보다는 애굽인들의 몸을 괴롭히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가축이 생계수단이 되거나 가축을 이용하여 경작하는 애굽 백성들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도 우리가 어렸을 때 소한마리는 그 가정의 꿈이었고 재산 목록 1호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짐승들이 괴질에 걸려 죽어갈 때 애굽 백성들은 얼마나 절망스런 고통을 당했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바로가 자기에게는 직접적인 피해가 없기 때문에 그 백성들의 아픔을 자기 아픔보다 더 크게 느꼈을 것인가? 백성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생축 재앙으로 그가 얼마나 뼈아픈 고뇌를 했을 것인가? 을 생각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인간의 죄가 피조물에게 미치는 영향성
4절에 보면 다섯 번째 재앙도 분명히 차별화 하실 것을 사전에 경고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생축은 하나도 죽지 않게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로마서8:22절에 보면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인간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관리자인 인간이 잘못하면 더불어 고통 받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다섯 번째 재앙도 짐승에게 무슨 죄가 있고 잘못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간접적으로 소유물을 치시므로 소유자에게 고통을 주고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어떤 회사나 가정이나 단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임자나 관리자 혹은 인도자가 잘못하고 범죄하면 공연히 그와 관련되거나 그에게 소속된 모든 사람들은 도매금으로 고통을 당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봅니다. 요나 때문에 같은 배에 탔다는 이유만으로 선객(船客)들 전원이 얼마나 죽을 고생을 했습니까? 사람은 얼마나 잔인합니까? 사용가치가 있을 때는 지승을 실컷 부려먹고 또 잔인하게 잡아먹습니다. 심지어는 곰의 쓸개에 대롱을 꼽아놓고 담즙을 빨아 먹는다고 하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사람은 자기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족까지도 팽개치고 달아나 버리는 실정이니 “혼이 아래로 내려가는”(전3:21) 짐승 따위와 아랑곳 하겠습니까? 아마 짐승들도 그러한 인간들에게 본능적인 저항을 한 것일까요? 태국 관광지에서 코끼리들이 조련사의 말을 듣지 않고 날 뛰어서 관광객들이 죽고 다치는 사고 가 났다는 보도를 최근에 보았습니다. 우리는 풀 한 포기까지라도 아끼고 사랑할 때 자연 질서가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창조해 놓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5등)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인간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카나다에 갔을 때 밤에 나방이등 날 벌레가 전등불 빛에 너무도 난무하기에 왜 방제를 하지 않느냐? 고 했더니 친구가 “왜 약을 뿌려 죽여야 하는가?” 라고 되물었습니다. 카나다는 해충(害蟲)을 죽여야 할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약을 뿌리지 못하도록 제제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도 해충 때문에 “죽겠다”는 하소연을 들어 본적이 없답니다. 먹이사슬에 의해 저절로 조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우리나라와는 기후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점도 있을 것입니다만 그것이 자연 질서의 올바른 유지 방법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인간의 일그러진 죄성 때문에 피조물들이 고통당하고 있으며 인간의 범죄 때문에 자연도 재앙을 더불어 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애굽에 내린 재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바로는 직접 자신에게 피해가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가축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는 축산업자와 농부들의 아픔을 같지 나누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더더욱 죽어가는 짐승의 고통 정도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완강한 바로의 마음이 오늘 우리들의 마음은 아닙니까?
2. 생축 재앙의 의의(意義)
이재앙의 심판에도 하나님의 사랑의 경과가 들어 있습니다. 바로는 이미 두 번(8:8, 8:25)이나 약속을 파기한 후였기에 이번에는 경고가 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그에게 자비로 대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바로에게 계속 자율권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지금이라도 보내주면 무사할 것이나 거절하면 생축재앙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의 왕권을 신성하게 존중하신 것입니다. 24시간이라는 유예기한(期限)까지 정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잘못했을 때 회개하고 순종할 기회를 주십니다. 본 재앙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①애굽우상에 대한 새로운 공격입니다
8:26절에서도 암시되었지만 애굽 사람들은 소나 짐승들을 신성시 했습니다. 그 짐승들을 잡아 제사 드리다가 돌에 맞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②하나님은 간접적으로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기둥을 치면 보가 울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유물을 치시므로 파멸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여기서도 이스라엘의 가축은 아무런 탈도 없이 보호해 주었습니다.(6)
③재앙의 심각성을 알 수 있습니다
가축은 축음의 생산과 전쟁에 큰 타격을 줍니다. 당장 생계에 위협이 따릅니다. 식용을 위해 젖을 짜야 하는데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④더 큰 심판에 대한 경고입니다
가축이 지금 얻어맞았으니 다음에는 “애굽 사람들이 얻어맞을 차례임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다섯 번째 재앙은 열 번째 재앙의 전주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이기적인 바로의 옹고집
애굽백성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자기들이 기르는 소나 말이 원인 모를 병으로 신음하고 죽어가는 것을 보는 백성들의 고통을 바로는 남의 일처럼 생각합니다. 니느웨 왕은 요나를 통해 경고하시는 말씀을 듣고 즉시 전국에 금식하며 기도하도록 조서를 내리고 (욘3:7) 자신이 먼저 베 옷을 입고 회개하므로 니느웨가 구원받았습니다. 에스더는 자신의 안일보다는 유다민족을 위하여 금식을 하면서 “죽으면 죽으리다”(에스더서4:16) 하고 목숨을 내건 기도를 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왕들이 가뭄으로 백성이 고통당하면 자기의 죄로 알고 산에 올라가 기우제(祈雨祭)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왕이란 사람이 자기에게는 직접 피해가 없다고 해서 소극적 반응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자신의 자존심만 생각하며 옹고집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7절에 보면 사람을 보내어 이스라엘 지경은 어떠한가 살피고 오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완전한 것을 알면서도 완강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아마 바로 멋대로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고센지방은 공기가 맑아서 아직 괴질이 미치지 안했으나 그곳도 곧 전염될 것이니 두고 보자는 심산이었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자기만 생각하고 백성의 고통에 무감각한 처사입니까? 우리는 사람과 사람과의 연대성을 넘어 우리에게 속한 피조물까지도 절대적 영향 하에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만일 인간이 잘못하면 피조물의 생명까지도 파괴되기 마련입니다. 나 한사람의 잘 잘못은 호수의 파문처럼 지구 전체에 엄청난 파급효과가 있음을 경계합시다. 더욱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은 성도들의 영향력은 얼마나 지대한지 모릅니다.v
지금까지의 재앙은 주로 재물보다는 애굽인들의 몸을 괴롭히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가축이 생계수단이 되거나 가축을 이용하여 경작하는 애굽 백성들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도 우리가 어렸을 때 소한마리는 그 가정의 꿈이었고 재산 목록 1호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짐승들이 괴질에 걸려 죽어갈 때 애굽 백성들은 얼마나 절망스런 고통을 당했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바로가 자기에게는 직접적인 피해가 없기 때문에 그 백성들의 아픔을 자기 아픔보다 더 크게 느꼈을 것인가? 백성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생축 재앙으로 그가 얼마나 뼈아픈 고뇌를 했을 것인가? 을 생각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인간의 죄가 피조물에게 미치는 영향성
4절에 보면 다섯 번째 재앙도 분명히 차별화 하실 것을 사전에 경고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생축은 하나도 죽지 않게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로마서8:22절에 보면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인간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관리자인 인간이 잘못하면 더불어 고통 받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다섯 번째 재앙도 짐승에게 무슨 죄가 있고 잘못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간접적으로 소유물을 치시므로 소유자에게 고통을 주고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어떤 회사나 가정이나 단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임자나 관리자 혹은 인도자가 잘못하고 범죄하면 공연히 그와 관련되거나 그에게 소속된 모든 사람들은 도매금으로 고통을 당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봅니다. 요나 때문에 같은 배에 탔다는 이유만으로 선객(船客)들 전원이 얼마나 죽을 고생을 했습니까? 사람은 얼마나 잔인합니까? 사용가치가 있을 때는 지승을 실컷 부려먹고 또 잔인하게 잡아먹습니다. 심지어는 곰의 쓸개에 대롱을 꼽아놓고 담즙을 빨아 먹는다고 하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사람은 자기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족까지도 팽개치고 달아나 버리는 실정이니 “혼이 아래로 내려가는”(전3:21) 짐승 따위와 아랑곳 하겠습니까? 아마 짐승들도 그러한 인간들에게 본능적인 저항을 한 것일까요? 태국 관광지에서 코끼리들이 조련사의 말을 듣지 않고 날 뛰어서 관광객들이 죽고 다치는 사고 가 났다는 보도를 최근에 보았습니다. 우리는 풀 한 포기까지라도 아끼고 사랑할 때 자연 질서가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창조해 놓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5등)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인간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카나다에 갔을 때 밤에 나방이등 날 벌레가 전등불 빛에 너무도 난무하기에 왜 방제를 하지 않느냐? 고 했더니 친구가 “왜 약을 뿌려 죽여야 하는가?” 라고 되물었습니다. 카나다는 해충(害蟲)을 죽여야 할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약을 뿌리지 못하도록 제제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도 해충 때문에 “죽겠다”는 하소연을 들어 본적이 없답니다. 먹이사슬에 의해 저절로 조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우리나라와는 기후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점도 있을 것입니다만 그것이 자연 질서의 올바른 유지 방법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인간의 일그러진 죄성 때문에 피조물들이 고통당하고 있으며 인간의 범죄 때문에 자연도 재앙을 더불어 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애굽에 내린 재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바로는 직접 자신에게 피해가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가축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는 축산업자와 농부들의 아픔을 같지 나누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더더욱 죽어가는 짐승의 고통 정도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완강한 바로의 마음이 오늘 우리들의 마음은 아닙니까?
2. 생축 재앙의 의의(意義)
이재앙의 심판에도 하나님의 사랑의 경과가 들어 있습니다. 바로는 이미 두 번(8:8, 8:25)이나 약속을 파기한 후였기에 이번에는 경고가 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그에게 자비로 대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바로에게 계속 자율권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지금이라도 보내주면 무사할 것이나 거절하면 생축재앙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의 왕권을 신성하게 존중하신 것입니다. 24시간이라는 유예기한(期限)까지 정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잘못했을 때 회개하고 순종할 기회를 주십니다. 본 재앙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①애굽우상에 대한 새로운 공격입니다
8:26절에서도 암시되었지만 애굽 사람들은 소나 짐승들을 신성시 했습니다. 그 짐승들을 잡아 제사 드리다가 돌에 맞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②하나님은 간접적으로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기둥을 치면 보가 울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유물을 치시므로 파멸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여기서도 이스라엘의 가축은 아무런 탈도 없이 보호해 주었습니다.(6)
③재앙의 심각성을 알 수 있습니다
가축은 축음의 생산과 전쟁에 큰 타격을 줍니다. 당장 생계에 위협이 따릅니다. 식용을 위해 젖을 짜야 하는데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④더 큰 심판에 대한 경고입니다
가축이 지금 얻어맞았으니 다음에는 “애굽 사람들이 얻어맞을 차례임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다섯 번째 재앙은 열 번째 재앙의 전주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이기적인 바로의 옹고집
애굽백성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자기들이 기르는 소나 말이 원인 모를 병으로 신음하고 죽어가는 것을 보는 백성들의 고통을 바로는 남의 일처럼 생각합니다. 니느웨 왕은 요나를 통해 경고하시는 말씀을 듣고 즉시 전국에 금식하며 기도하도록 조서를 내리고 (욘3:7) 자신이 먼저 베 옷을 입고 회개하므로 니느웨가 구원받았습니다. 에스더는 자신의 안일보다는 유다민족을 위하여 금식을 하면서 “죽으면 죽으리다”(에스더서4:16) 하고 목숨을 내건 기도를 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왕들이 가뭄으로 백성이 고통당하면 자기의 죄로 알고 산에 올라가 기우제(祈雨祭)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왕이란 사람이 자기에게는 직접 피해가 없다고 해서 소극적 반응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자신의 자존심만 생각하며 옹고집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7절에 보면 사람을 보내어 이스라엘 지경은 어떠한가 살피고 오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완전한 것을 알면서도 완강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아마 바로 멋대로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고센지방은 공기가 맑아서 아직 괴질이 미치지 안했으나 그곳도 곧 전염될 것이니 두고 보자는 심산이었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자기만 생각하고 백성의 고통에 무감각한 처사입니까? 우리는 사람과 사람과의 연대성을 넘어 우리에게 속한 피조물까지도 절대적 영향 하에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만일 인간이 잘못하면 피조물의 생명까지도 파괴되기 마련입니다. 나 한사람의 잘 잘못은 호수의 파문처럼 지구 전체에 엄청난 파급효과가 있음을 경계합시다. 더욱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은 성도들의 영향력은 얼마나 지대한지 모릅니다.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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