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정신과 자세(출21:18-26) > 수요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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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정신과 자세(출21: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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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회
댓글 0건 조회 5,723회 작성일 07-12-09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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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을 주신 후 하나님은 그들의 가까운 곳에 계심을 분명히 알리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레와 번개와 나팔소리를 듣고 연기를 보았습니다. 구름 속에서 울려 나오는 음성은 두렵고 무서운 공포였습니다. 그들은 암흑 속에서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만 해도 죽을 것만 같아서 (19절) 모세에게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했습니다. 그때 모세는 그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엄을 그들의 마음속에 심어주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시려는 깊으신 사랑의 속뜻이 있음을 설명하며 감정(憾情)에 위안을 주었습니다. 우리도 언제나 작고 큰일에 동요하지 말고 그때그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영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때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도 그의 은혜가 풍성하므로 많은 군중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어디로 가든지 쫓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능력이 나타났을 때는 매우 두려워서 “그 지방에서 떠나기를 간구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능력이시며 어느 곳에서나 이러한 양면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이러한 양면을 동시에 나타내시어 인간들을 사랑으로 다스리기도 하고, 그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게도 합니다. 모세를 보세요. 동일한 초대를 받았고 동일한 광경과 소리를 들었으나 전혀 놀라지 않았으며 더욱 더 가까이 접근했습니다. 왜 이러한 차이가 있었습니까? 인간의 죄성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임을 느낄 수 없으며 “자비롭고 은혜로운 존재”로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향한 사랑의 어떤 느낌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징벌 밖에는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사탄도 믿고 떤다"고 했습니다. 천사라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는 얼굴을 가리웁니다.(사6:2) 그러나 사랑이 성장하는 곳에는 두려움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경외함이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것 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어 갑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모세를 암흑으로 가까이 가게 했던 것입니다. 20절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시험하고 하나님을 경외케 하여 범죄치 않게 하시려고 위엄을 보여 주었으나 두려움은 신앙의 눈을 뜨는데 큰 도움이 안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40일도 못가서 공포스럽던 이때의 체험을 감쪽같이 잊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미쳐 날 뛰었습니다.(32장) 죄성은 위엄만으로 깨달아지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억센 바람보다 따뜻한 태양이 길손의 옷을 벗깁니다. 선한 자는 어느 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할지라도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2. 참된 예배자
참 하나님은 은으로 만든 신도, 금으로 만든 신도 아닙니다.(23절) 하늘로부터 그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볼 수 없는 형태로 나타나셨습니다.(신4:12)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대상은 영적이며 무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심은 올바른 예배를 드리는 근거를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의 대상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 예배의 장소는 어디여야 한다고 했습니까?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는 곳”(24절)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벧엘, 브니엘(창32:31절)과 같이 그 자신을 나타내심으로 그의 이름을 기념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도 모리아산을 지정해 주시고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창22:2) 그가 그의 단을 세우기 위하여 택하신 곳은(교회) 어느 곳이든지 영원한 성소를 세우실 시기에 이를 때까지(천성) 항상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올 것입니다.(요4:23)

3. 예배드리는 단과 예물(24-26절)
(1) 하나님은 토단(土壇)을 쌓고 그 위에 제물을 올리라고 했습니다.
또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고 했습니다. 곧 자연 그대로의 단이 온당한 단이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가 영원히 속죄 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인간의 솜씨는 단을 더럽힐 뿐입니다. 그것은 인간 자신의 것으로는 아무것도 속죄하는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인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방법으로 다듬은 단은 제사(예배)드리는 자를 만족시켜 줄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만족시켜 줄 수 는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상 숭배적 변조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24절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속죄의 목적)와 화목제(화목과 새로워진 관계 표시)를 드리라”고 했는데 반드시 자신의 소유인 동물이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훔친 것이나 부정한 제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제물의 다른 의미는 우리의 예배로 우리 자신의 몸(롬12:1)과 상한 심령(시51:7)이 결합된 “신령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2) 예배자의 태도(26절)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네 하체가 그 위에 드러날까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체란 인간의 정욕과 수치를 상징하는 것이므로 예배 자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대한 예절을 지켜 경건과 공경의 태도로 예배해야 하며 인간의 욕심과 정욕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가 예배를 빙자하여 그들이 각각 자기의 은사를 내세워 너무 혼란하고 무질서 했으므로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14:33), 그러므로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14:40)고 지적했습니다.
(3) 참된 예배 자에게 주는 축복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24절)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단을 쌓고 기념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모세 시대에는 성막이었고, 솔로몬시대에는 성전이었고, 신약시대는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려야 합니다.9롬12:1) 또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사서 세운 교회에서 대속(代贖) 사건과 부활능력을 기념하면서 정한 시간에, 정한 장소에서, 정한 순서에 따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합니다.(엡1:22-23절 참조)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잘 지킴으로 우리가 보호받고 안전하며 축복받을 삶의 법칙을 정해 주신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그 입법하신 분이 어떤 분인가를 분명히 보여주시며 우리를 사랑하신 입법취지를 바로 알아 제대로 준행할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끝으로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두 가지 사랑은 겸양과 공경입니다. 내적 외적인 자제가 동시에 중요하며 예배의 동기가 분명해야 할 것입니다. 예배의 대상을 바로 알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만을 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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