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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의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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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회
댓글 0건 조회 5,386회 작성일 09-12-08 11:12

본문

총론
창세기 1장에 나타난 중요한 진리

-.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없다는 무신론자(atheist),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자(agnostic), 다신론 자(polytheist), 범신론자(pantheist) 또 물질은 영원하며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유물론자(materialist) 나아가서 창조와 역사의 배후에 신의 계획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운명론자(fatalist)들도 단지 주장일 뿐이고, 또 어떤 과학자나 역사학자도 창조론을 부정하거나 창조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진화론도 창조에 대한 증명은 못했다. 그러나 어떤 종교 경전이고 서두에 스스로 만물을 지었다고 주장한 교조나 교주는 성경에 없고(사44:24), 또 만물을 보아 우리는 창조주를 알 수 있습니다.(롬11:36)

-.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가 말씀하시고, 이름을 지으시고, 축복하셨기 때문이다. 현대 생물학에서도 진화설을 주장하지만 같은 종 안에서의 변화는 인정하지만 한 종류의 피조물에서 다른 종류의 피조물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점진적 창조는 인정이 안된다. 그러나 계시는 점진적이다. 좋은 말만 뽑아 고립적인 교리를 세우지 말라. 옛 속담에, 새것은 옛 것에 감추어져 있고 옛 것은 새것에 계시된다는 말이 있다.그러므로 하나님의 원리는 변하지 않지만 그에 뜻을 나타내심은 바뀔 수 있다.

-. 그러면 우주 창조의 목적인?
하나님께는 부족한 것이 없는데 굳이 우주창조를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성을 제한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영원하신 분이 시간과 인간의 역사 속에 자신을 제한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啓示)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나 분명히 밝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저술가요(author), 지탱 자(stainer)요 창조의 목적이라는 점이다.(골1:15-17, 계4:11)
살아계신 말씀이신(요1:14) 그리스도는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자연이라는 책을 통하여 하나님을 계시하신다.(요1:1-5, 시19편) 성령님은 또 예수님과 하나님을 증명하신다. 곧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계시인 것이다.

-. 창조는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계시하고 있는가?
①그의 지혜와 능력(욥28:23-26, 잠3:19)
②그의 영광(시8:3-9) ③그의 능력과 하나님 되심.(롬1:18-21)
④대수롭지 않은 존재인 인간에 대한 사랑(시8:3-9)
⑤그의 섭리로 돌보심(사40:2절 이하)이다.
우리 주님은 지상에 계실 때 꽃들과 새들에게서 조차 아버지의 은혜로운 손길을 보았다.(마6:26-29) 

-. 천사의 창조시기
성경에 천사는 언제 창조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창세기 3장에 사탄이 등장한 것을 보면 인간 창조 전에 지으신 피조물임에 틀림없습니다. 여기서 원 창조(original creation) 이론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창조된 것은 틀림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히1:14, 창3:1)그러나 천사를 창조한 후 사탄이 타락하여(사14:12) 그에 대한 심판으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여 재창조를 했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견해라고 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불완전성과 전능성, 전지성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창1:1절과 2절 사이에 간격이 있을 수 있고 그때 하나님은 창조의 준비 작업으로 천사를 창조하였고 Lucifer가 그때 반역하여 심판을 초래했던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겔28:11-19절)

-. 원창조설에 대한 비판 ①하나님이 불완전하실리 없다
  ②Lucifer 한 천사 때문에 혼란이 왔을리 없다 ③그래서 공허하고 흑암 가운데 있었을까?그래서 1장의 창조가 사실상 몰락한 우주의 회복이란 말인가?
그러나 하나님은 처음 어떻게 존재하신 분인가? 왜 창조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여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을까?--home work (상상도 좋고, 성서적 근거면 더 좋고)
인간의 창조-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반역의 아픔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그의 모양과 형상(지, 정, 의, 자유)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다- 회복 가능
인간이야말로 하나님 다음의 절대지배자다(골3:10)-Lucifer는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기에 인간의 자리를 뺏고저 한다-그래서 성공했고 인간은 그것 때문에 통치의 자리를 상실했다.(히2:5-18절)  7절-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주어졌다(롬5:) 예수님은 지상에 계실 때 물고기(눅5: 마17:24절이하), 새(마26:74-75), 짐승들(마21:1-7)을 다스리심을 증명하였다.(계1:5-6)

-. 새 창조
고후4:3-6절, 5:17절을 보면 그리스도를 통해 영적 새 창조약속.
①인간은 완전하게 창조되었다- 우주가 그랬듯이 죄로 인해 “혼돈과 공허”속에 목적없이 공허하며 흑암중에 있다.
②성령은 죄를 깨닫게 하시는 자신의 일을 시작하신다(창1:2) 구원은 반드시 주님과 더불어 시작된다.(행4:12, 엡2:8)
③성령은 말씀을 사용하신다-비취어 깨닫게 함(시119:130)
말씀을 떠나서는 구원 얻을 수 없다(요5:24, 히4:12, 요1:14-하나님은 말씀으로 물과 땅을 나누심. 말씀은 쪼개는 힘이 있다)
④그리스도를 믿음이 생명을 줌- 제3일에 땅이 창조된 것과 관련 이것이 실제적 부활, 죽음을 벗어난 생명- 주님의 부활도 3일에
⑤번식의 책임-종류대로 열매 맺고,(창1:29) 생육번성명령(창1:22)
⑥아담은 옛 창조의 머리-그리스도는 새 창조의 머리다.
구약은 “아담 시대의 책”(창5:1)- 저주로 끝난다(말4:6)
신약은 “예수그리스도의 시대의 책(마1:1)-다시 저주가 없다(계22:3)
※그리스도 (Graham Scroggie의 정의)-구약에 예언되었고(predicted), 복음서에 나타났고(present), 요한계시록에 지배적이 되셨다.(predominant) 메시야 예언-베들레헴에서 출생으로 이끄는 사슬의 고리, 구약의 모형상징은-모두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창세기 개요
1.총괄적으로 본 인간의 역사(1-11장)
-. 1-2장 천지창조  -.  3-5장  아담과 그의 가족    -. 인간의 타락 3장
-. 6-11장 노아의 가족    -. 홍수 6-10장      -. 바벨의 반역 11장
2. 상세히 본 이스라엘의 역사(12-50장)
-. 12:1-25:18, 아브라함(아들을 주신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 25:19-26:35  이삭(신부를 취하는 외아들)
-. 27:1-36:43 야곱 (영과 육의 대결)
-. 37:1-50:26 요셉(하나님의 통치의 섭리)

※창세기에 예시된 그리스도
①창조의 말씀(창1:3, 요1:1-5, 고후4:3-7)
②마지막 아담(롬5장, 고전15:45절)
③여자의 씨(창3:15, 갈3:19, 갈4:4)
④아벨(창4장, 히11:4, 12:24)
⑤노아와 홍수(창6-10장, 벧전3:18-22)
⑥멜기세덱(창14장, 히7-10장)
⑦언약의 자녀(창17장, 갈4:21-31)
이삭은 기적적인 탄생, 죽으려는 의지, 상징적인 부활(히11:19) 신부를 취함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줌.
⑧어린양(창22:7-8, 요1:1-29)
⑨야곱의 사닥다리(창28:12이하, 요1:51)
⑩요셉(창37-50장)
형제들에게 거부-아버지의 사랑하는 자-온당치 않게 고난당함-나를 내 형제들에게 용납되고- 지배하는 자리에 오름(우리의 주라 칭함) (50:18)

※각  론
1장- 창조주와 하나님의 인격성, 우주창조, 인간창조와 축복
2장-생명나무
1. 첫 안식일(2:1-3)-안식(安息)이란 멈춘다는 의미, 하나님은 지쳐서 쉬지 않으신다. (시121:4) 창조의 사역을 멈추신 것 의미(완성) 이날 피조물을 축복하고(창1:2) 인간에게 복주심(1:26-28)- 아담은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으므로 그에게는 첫째날이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은 없었다.
다시 언급된 안식일: 출20:8-11절에 이르기까지 구약에 나타나지 않음, 언약의 표시로 모세 율법에 주어짐(출20:8) 이방인들에게는 안식일을 준 증거없음(시147:19-20) 이스라엘이 유배당한 이유도 안식일 범했기 때문(느13:15-22)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 율법 시대이므로 안식일 지키심 그러나 바리세인들의 규율은 따르지 않으심(막2:23-28)
초대교회 신자-최종적으로 이스라엘과 결별 주일 모임, 교제와 예배를 위한 특별한 날(행20:7, 고전16:1-3, 계1:10)
주일-마지막 아담이 부활하신 날 우리의 구원을 완성한 날, 그리스도의 부활기념9마28:1, 요20:1)

새로운 창조를 이룩한 사역 완전성을 기념하는 날(고후5:17)
안식일주일(The Lord's day)
①옛 창조의 완성(육적)
②이스라엘에게만
③노력하여 얻은 구원(6일간 일하고 쉼을 얻음
④장차 올 왕국 모형(히4:)
⑤율법의 그림자에 속한 것(골2:13-17)
  ①새 창조의 완성(영적)
  ②모든 신자에게
  ③은혜로 얻은 구원: 먼저 하나님을 만나고 다음으로   
    그를 위해 수고함
  ④그리스도의 나라.
  ⑤은혜의 충만한 빛

바울은 갈4:9-11절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율법주의 속박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시사했음. 또 연약한 양심과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생활 표시다(롬14:4-13)

2. 첫 동산(2:4-14)
성경 역사에는 네 개의 동산이 언급됨
①에덴-죄가 들어 온 곳 ②겟세마네-그리스도께서 죽음을 괴로워 한 곳(눅22:43)
③갈보리-그가 죽어 장사지낸 곳(요19:41-42절참조)
④천국의 낙원-(계21:1절 이하)
에덴은 행복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 주신 곳-잘 지켜야 했다(사탄의 공격 암시).
※두 나무(선악과 생명나무)
선악과는 the tree of knowledge (지식의 나무)다 그것을 먹음으로 선과 악을 구분했기 때문-금단의 과실나무, 하나님의 권위 상징- 무슨 나무인지 알 수 없지만- 절대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처음 법-명령을 어겼기에 생명나무를 따 먹지 못하게 했다- 에덴에서 쫓아내고 그룹들과 불칼로 지키게 했다(3:24) 율법이 없을 때는 죄로 여겨지지 않았다(롬5:13)
생명나무를 따 먹을 수도 있었는데 인간은 마귀에게 속아 금단의 과실을 먹은 것이다. 동산에서 자유스러움과 풍성함을 누렸으므로 선악과의 열매는 먹지 않아도 되었다.(죄는 풍성한 사람이 범한다)
-. 첫 결혼- ①동반자 제공 ②종족 번식 ③도와 최선을 이룩할 것
여기 1:22절에 맞으시고는 “세우시고”란 의미가 있는데 그리스도와 교회를 상징한다.(엡5:21-22)
①아담의 갈비뼈 취한 것- 예수님의 열구리에서 교회 탄생(요19:31-39)
②교회는 주님의 사랑과 관심 대상-아담과 하와
③아담이 의지적으로 금단의 과실 먹음-주님도 의지적으로 죽으심-그의 사랑과 은혜가 놀랍다.

3장 . 인간의 타락

1. 유혹(3:1-6)
사탄은 1:3절 이전에 죄에 빠졌다 뱀의 모습으로 하와에게 왔는데 3장은 속이는 뱀, 4장은 살인하는 자이다.(요8:44) 하와의 마음을 표적 삼음-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형상따라 창조된 일부분이다. 마음 공격은 하나님의 공격이다. 마음이 진리를 붙잡으면 사탄은 이길 수 없다. 사탄은 먼저 말씀에 의심을 일으키고(3:1), 하나님 말씀을 부인하고(3:4) 자기의 거짓말로 대신한다(5) 사탄은 그들에게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하려 한다고 선하심을 손상시켰다.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加減)한 것이 문제였다. (2:17절과 3:3절을 비교할 것) 마음이 정복되자 육신의 정욕(먹음직하고 6절) 안목의 정욕(보암직하고) 이생의 자랑(지혜롭게 할 만큼) 을 보게 된다.(요1서2:15-17절참조) 혼자 죄를 짓는 것은 어렵다- 아담도 말려들었다.

2. 저주(7-19)
순수함과 영화로움을 상실(7절)하여 벌거벗은 것을 감추려 했으나 하나님은 자기 노력이란 옷을 허락 않으셨다(21절). 하나님과 교제 욕망 상실, 죄의식, 두려움, 수치심, 불순종으로 즐겼던 교제 끊음. 또 책임전과를 했다. 그것이 더 비극이다.
여인에게는 임신과 출산의 고통(16) 남편에게 복종할 것(딤전2:8-15), 또 그들이 산 땅이 살벌해지고(18), 평생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을 것이다.(17)
그러나 이곳에서 최초의 복음이 주어진다. 여자의 씨(그리스도)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갈4:4-5) 하나님께서 그들 사이에 대립하게 하여 결국 사탄이 지옥에 던져지게 한다.(계20:10)

3. 구원
유일한 복음(3:15)을 그들은 믿었습니다. 무엇이 증명하는가? 아담이 아내의 이름을 하와(EVe)라 지은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이브란: “생명” 또는 “생명수 여자”(Lief giver)란 의미임. 하나님을 그들은 영생하지 못하게 했고 930년 후에 육신이 죽었다. 죄 때문에 하나님과 분리됨으로 영적으로 죽었으나 구세주가 탄생할 것을 약속하여 믿어 구원받게 했다.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죄 없는 생명의 희생을 의미하며 선한 행위로 죄와 수치를 가릴 수 없음(3:7)을 말해주고 있다. 성경에서 옷은 구원의 상징이다. 탕자의 옷(눅15:22), 사(61:10, 슥3:참조) 하나님께서 저희를 가리워주신 것은 그들의 수치에 대한 감정을 인준하셨다. 거꾸로 나체로 돌아가려는 것은 타락의 징표다. 하나님의 표준은 항상 “품위있는 복장”이다.
-. 22-24절은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이다. 동산에서 몰아낸 것은 불순종하므로 생명나무에 대한 권리를 상실한 것이다. 불칼을 두어 생명나무를 지키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말해주며 그들을 쫓아낸 것은 은혜와 자비를 나타낸 것이다.
첫 아담마지막 아담(그리스도)①흙으로 지음
②완전한 동산에서 시험받음, 배부름
③사탄에게 짐
④낙원에서 쫓겨남-불순종(도둑)
⑤죄, 죽음, 심판초래
⑥아내를 사랑하여 고의로 죄 지음①하늘로부터 오신 주
②광야에서 시험받은-배고픔
③사탄을 이김
④죽어가는 도둑에게 낙원을 엶
⑤의, 생명, 평화를 가져옴
⑥교회를 사랑하여 고의로 죽음(독죄)

4장. 가인의길
1. 예배자(1-5)
하와가 가인을 낳고 착각했다(3:15과 3:20절에 eve라는 이름을 지은대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인줄 알았다. 그래서 “얻었다”는 이름을 지었다. 하나님께 선물 받은 것으로 알았고 “아벨”은 “헛됨, 부질없음”이라 불렀다. 혹 가인이 그 씨가 아니었음을 알고 하와가 실망하여 “아벨”이라 지었을 것이라 본다. 가인과 아벨은 처음부터 일을 분할한다. 가인은 땅에 헌신, 아벨은 예배에 헌신했다. 하나님은 앞서 땅을 저주하셨다.(3:17) 가인은 그 저주와 동일시 되었다.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예배드리는 지정된 장소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고 그렇다면 3:21절에 나오는 피의 희생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대속의 희생을 의존하지 않았다. 가인은 경건함과 신앙에 대한 형식은 갖추고 있었으니 그 능력은 부정했다.(딤후3:5) 그는 거짓된 의(요1서 3:12)에 속했고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의가 아니었다.(육에 속한 거짓된 의)
※오늘의 세계는 두 가지 종교만 있다. ①그리스도와 그가 완성하신(work) 것을 의존하는 아벨의 신앙  ②선한 행위(works): 그리고 인간을 기쁘게 하는 종교적 행위다. 프로그램에 의존하는 가인의 종교, 결과는 천국과 지옥이다.

2. 살인자(4:6-8)
욕심이 잉태한 것이 문제다(약1:15) 가인도 실망-화가났고-질투하고-결국 살인에 이르렀다. 하나님은 믿음 없는 마음과 타락의 안색을 보았다. 죄가 문앞에 엎드려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7) 3장에서 불순종한 인간이 나왔고 4장에서 살인자가 나왔다.

3. 방랑자(9-16)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12) 가인은 회개하지 않고 대신 자책과 실의에 빠졌다. 가인이 다른 사람이 죽일 것이라는 공포에 쌓였을 때 하나님은 가인에게 표를 주어 죽임을 면케 했다.. 여기 표(mark)는 무엇일까? 그것은 문자가 아니라 확신이다 .놀라운 은혜다 .오늘날도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휴식이 없고, 절망하고 좌절한다.

4. 건축가(17-26)
가인은 놋(흩어지는 것, 방랑하는 것) (16절) 거하며 아내와 동침하여 에녹을 낳았는데 아마 누이 중 하나와 결혼 했을 것이다. 그때는 아담의 자손이 많았다.(5:3, 130년이 지났다) 이곳에서 분명이 기원을 본다. 농업기술 발견(20), 음악창시(21), 금속산업(22) 을 볼 때 가인의 도시 (피의 종교가 필요 없었음)는 성공했으나 하나님은 거절하셨다.
※25절에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새로운 씨 “셋”을 주셨는데 아벨을 대신했다. 가인 족속을 개조시키려 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예배와 멀어갔고 셋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돌아와 예배를 시작했다(26절). 아담은 930세에 죽었다(5:5)

5-8장 홍수
 이곳은 홍수 심판과 노아의 신앙을 따른다.
1. 홍수의 사실성
-창세기 기록, 그리스도(마24:37-39절), 선지자들(사54:9) 그리고 사도들(벧전3:20절이하), 벧후 2:5, 3:6에도 입증됨)
2. 홍수의 목적
6:5-13 인간의 타락과 죄악의 관영 새로운 시작에 앞서 반드시 심판과 죽음이 있기 마련.
3. 홍수의 순서
아담 창조를 1년으로 하면 노아는 1056년에 출생. 6:3절에 보면(20년 전도하며 방주 제작 벧전3:20) 그가 일을 시작할 때 480세(7:11) 그 해가 1656년 되는 셈이다. 대 홍수는 노아 600세에 닥쳤으며 1656이 된 셈이다. 1657년 둘째 달 마른 땅 밟음(8:13이하) 방주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놀라운 구원이다. 옛 세상은 장사 지냈으나 노아는 새 생명으로 부활했다. 방주가 7개월 째 17일 아라랏 산에 머물렀고 히브리인의 달력은 첫 달이 10월이다. 따라서 7개월째라면 4월이 되는데 우리 주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날이다. (유월절 후 3일 출12:1-3)
노아와 에녹은 모두 이스라엘과 교회를 나타낸다. 노아는 심판을 통하여 안전하게 보호 되었고, 이와 마찬가지로 144,000명과 유대인의 남은 자들은 환난을 통하여 이땅에 왕국이 세워질 것이다. 에녹은 심판이 임하기 전에 휴거되었고(5:21-24, 히11:5)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는 7년 대 환란 전에 휴거될 것이다.

※홍수 사건이 주는 교훈
①하나님은 반드시 벌하신다(새것 세우기전에 옛것 청산)
②경고하심
③구원 방법은 동일(은혜를 통해서만 가능 6:8, 믿음 통하여 히11:7)
④진실한 믿음이 있으면 적극적인 순종을 한다.(6:22, 7:5)
⑤노아의 가족이 사악한 세상에서 분리되어 살기가 어려웠다.(그러하는 도우셨고, 보상했다)⑥6:1-4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 셋의 자녀를 뜻한다. 하나님은 타협과 반역을 문책하시며 구별된 성도에게 상을 주신다.

9-11장 노아의 언약
1. 노아와의 약속(9:1-7)
언약(covenant) 이란 단어는 “자르는 것”이란 뜻이다. 서약의 행위는 제물을 자르는 일로 성립 되기 때문. (창15:9절 이하) 언약의 근거는 희생제물의 흘린 피에 두었다 (8:20-22) 이는 새로운 언약이 그리스도의 흘린 피에 근거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그 향기를 받으시고 언약하셨다.
①홍수로 멸망시키지 않을 것(무지개로 증거 13절)
②동물의 고기를 먹어도 좋으나(9:3) 피체 먹지 말 것(레17:10이하)
③인간과 짐승들 사이에 두려움과 공포가 없을 것(9:2)
④주요한 형벌의 원리로서 인간의 정부(政府) (롬13:1-5절 참조)를 보여주었다.
하나님은 무지개로 증거의 도장을 찍으셨다.(13절) 이 맹세는 노아 후에 오는 노아의 씨와 맺은 것임(오늘날 우리도 포함)

2. 가나안에 대한 노아의 저주(9:18-29)
600살이 넘은 단련된 성도가 이 죄와 수치에 빠졌다. 노아가 포도 농사의 창시자였다. 그는 기후의 변화로 포도가 발효된 것을 잘 모르고 마시다가 취했던 같다. 그러나 그 행위가 잘 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성경은 성도들이 죄를 변명하는 것을 용납지 않는다. 옷을 벌거벗을 정도로 취했다면 지나친 복용이며 술주정 상태였으리라. 노아는 함의 한 일을 저주 했다. 그것은 창세기의 세 번째 저주다. (3:14-17, 4:11) 그가 함의 막내아들 가나안을 저주한 사실로 보아 (9:25, 10:6) 아버지의 죄가 아들에게 씌어 진 것을 볼 수 있다. 아마 이소년도 관련되었을지 모른다. 함이 아버지를 존중 못하고 경솔하게 떠벌렸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 가나안의 자손들은 형제들의 종의 종이 되었다.(10:15-20)
셈족은 유대인이며 그 종족이 10:21-32절에 열거되었고, 11:10-26절에서 아브라함까지 이어간다. 야벳의 후손은 이방인들이다.(10:2-5) 그러나 성경은 여러 종족이 구분됨을 보이려는 것이 아니고 한 혈통으로 지으셨음을 말하고 있다.(행17:26절)

3. 하나님께 대항한 니므롯(11:1-9)
니므롯은 구스의 아들이며 함의 손자다.(10:8-9) 세상에 첫 용사요, 용감한 사냥꾼이라고 했다. 니므롯은 “반역자”란 뜻이며 하나님 앞에서 굉장한 폭군이며 최초의 독재자였다. 바벨론 제국의 창시자이며 인간 사냥꾼이다.
Hislop 이 지은 “두 바벨탑”이란 책을 보면 니므롯과 그 아내가 “어머니와 아이로” 둘러싼 새로운 종교를 창설했다고 한다. 성경에서 “바벨론”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과 종교적 혼란을 상징한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바벨론(17-18장)은 사탄의 집단 세력임을 말해주고 있다.
바벨탑을 쌓은 그들은 바벨론 지역인 시날 평지에 정착하여 앗수르를 포함한 큰 성을 이루었다.(10:10-11) 적 그리스도인들은 그들대로 연합했고 바벨탑을 쌓아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흩어짐을 면하게 하자고 했다(11:4) 바벨(Babel)이란 히브리어 Balal이란 단어에서 유래되었는데 (섞는다, 또는 혼합시킨다)는 뜻이다. 오순절은 바벨 사건을 역전시킨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공사를 중단시켰고 지면에 흩어지게 하셨다.

4.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심(11:10-22)
10:21-32절에 셈의 가계가 나옵니다. 여기서 데라에게까지 계보를 이끌어갑니다. (11:26절) 하나님은 그의 은혜로 아브라함을 선택했습니다. 셈의 다섯 아들 중에서 아르박삿을 택했으며(11:10) 데라의 세 아들 중에서 (11:26)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이것이 히브리 민족의 시작입니다.

12장-  13:4절 아브라함의 소명(召命)
본래 이름은 아브람(높으신 아버지)인데 아브라함(열국의 아버지)로 잘 알려져 있다 .창3:15절 약속을 성취 시키기 위해 먼저 한 사람을 부르셨다. 물론 셈의 혈통에 속했고(11:10이하) 유대 민족의 아버지였다. 이 한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은 온 세상을 축복하려고 계획하셨다.

1. 믿음으로 순종한 아브라함(12:1-9)
아브라함은 갈대아우르에서 나와 아버지가 죽기까지 하란에서 지체했다(11:27-32) 하나님은 왜 자녀가 없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선택하셨을까요? 그러나 결국 그것이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었고 세상에 큰 축복이 되었다. 하나님은 완전한 분리를 요구하신다. 순종한 아브라함과 하나님을 신뢰했으므로 큰 이름을 주셨고 바벨 사람은 스스로 이름을 얻고자 했으나 실패했다.(11:4)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내가 하겠다(I will) 라는 말이 반복됨을 유의하자 그대로 믿은 아브라함에게 그대로 하셨다.(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p2) 4-6절을 보면 하란의 아들(11:28) 롯을 데리고 갔는데 그것이 어떻게 보면 실수였다. 후에 문제꺼리만 만들다 결국 분리된다. 아브라함은 후에 부요한 사람이었으나 그 부(富)가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순종은 언제나 더 큰 축복으로 인도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순례자였다. 그래서 가는 곳 마다 장막을 치고 제단을 쌓았다.(13:3-4, 13:18, 12:8,9) 또 제단은 제물을 가져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자 였음을 말해준다. 유의할 것은 동쪽에 있는 아이(페히더미)로 가지 않고 벧엘(하나님의 집)을 향하고 여행했다(12:8). 롯은 하나님의 집을 등지고 동쪽으로 향하여 돌아갔다.(13:11)

2. 아브라함이 믿음에서 퇴보하다(12:10-20)
실망(10): 기근이 들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갔다. 실망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시험이셨다. 아마도 롯이 제안했을 것이다.(13:10) 애굽은 세상을 상징한다. 아브라함은 장막과 제단을 버리고 세상을 신뢰했다.(사31:1절 참조)
속임(11-13): 하나의 죄는 또 다른 죄로 이끌어간다. 사라에게도 똑같이 죄를 범하게 했다.(20:13) 그것은 반(半) 진실은 되지만 장막과 제단이 없는 아브라함은 세상 사람들처럼 행동했다(시1:1-3)
징계(14-20): 거짓말이 폭로되자 불신자 왕에게 문책당하고 떠날 것을 요청받았다. 세상과 타협하려는 그리스도인에게 얼마나 비참한 선언인가?

※믿음이란
3. 믿음으로 돌아온 아브라함(13:1-4)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행복할 수 없다. 하나님을 저버린 바로 그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장막과 제단의 장소로 돌아가야 한다. 주님을 부를 수 있는 곳, 축복을 받을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용서하고 교제를 회복했지만 손해가 너무도 컸다.
①시간 낭비-다시 얻을 수 없다
②간증 잃음-부끄러운 간증보다 자랑스런 간증거리가 많아야 한다.
③하갈을 얻었다-애굽에서 따라옴(16:1) 결국 애굽에서 가져 온 것들은 괴롬의 원인이 된다.
④부의 증가가 롯의 목자와 다툼 일으킴
⑤롯-롯은 애굽의 맛을 보았다(13:10) 애굽에서 롯을 데려 오긴 했지만 롯에게서 애굽을 빼낼 수 없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젊은 그리스도인을 잘못 인도하는 것은 비극이다.
애굽에서 나올 때 장막만 있었지 제단을 없었다.(5절)

13장 5절-14장 24절 롯의 선택
여기서 우리는 롯의 타락과 실패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다룬다. 벧후 2:7-8절이 없다면 롯이 구원받지 못했을지 의심된다.
1. 대결(5-7): 롯은 육으로 행하고 아브라함은 영으로 행했다. 이것은 항상 갈등을 일으켜 외적인 원인은 증가된 부에 있었고, 참된 원인은 롯의 불신앙과 육욕에 있었다. 그리스도는 분리하시는 분이라(요7:43, 9:16, 10:19) 그가 오심은 같은 가족 사이에도 다툼이 일어난다.(눅12:49-53)

2. 선택-(13:8-18)-그의 선택은 곧 자신의 모습을 나타낸다.
①교만(8-9)- 젊은이는 손위 사람에게 순종해야 한다(벧전5:5) 그런데 롯은 자신을 아브라함보다 앞세운다. 아브라함과 비교 해 보라(9)
②불신앙(10절상)-그는 자신의 통찰력만 믿고 부유하고 사악한 도시를 택했다.
③이기심(11절)-삼손을 떠나 자신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얻으려 했다.
④그의 경솔(12절)-요단에서 소돔으로 경솔히 이동했다.(12)
이곳에서 주는 교훈은 롯은 주께로부터 멀어져갔고 아브라함은 반대로 하나님의 벗이 되었다.(약2:23)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눈을 들어 온 땅을 보라 하셨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것을 요청한다. 롯은 제단을 잃었고 머지 않아 장막도 잃는다.

3. 포로(14:1-12)
이 전쟁은 성경상의 최초의 전쟁기사이다. 롯이 소돔의 옮겨 갔을 때 땅의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자리였다. 누구든 세상과 짝하고(약4:4) 세상을 사랑했다. (요일2:15-17) 또 세상에 순응하고(롬12:2) 마지막으로 세상과 함께 심판을 받게 된다.(고전11:32) 롯은 소돔이 평화롭고 자신을 보존해 줄 수 있는 장소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그곳이 가장 위험한 장소였다.

4. 정복(14:13-24)
이 장에서 아브라함은 검으로 롯을 구하며 19:29절에서는 기도로 구한다.(18:23-33)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적을 정복했으며 이 일을 위해 가신 380명을 거느리고 193km갔다.(14) 승리한 후에 소돔 왕을 만나 큰 유혹을 받는다.(14:21) 사탄은 영적승리를 거둘 때 즉시 유혹 해 온다. 예수님도 세례 받을 후 광야에서 만났다. 엘리야가 갈멜산 승리 후 도망쳤다.(왕상19장) 아브라함이 부와 타협했다면 모든 영광을 빼앗겼을 것이다. 돈 때문에 롯을 구한 결과가 되었을 것이요. 소돔의 상품을 즐겼을 것이다. 이럴 때 성도는 자기 간증을 잃는다. 아브라함은 소돔왕은 무시했으나 살렘(평화) 왕은 존중했다. 멜기세덱(의로운 왕)은 하늘의 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모형이다.(히5:-7장) (히5:6) 반차:왕과 제사장과 동급. 솔롬왕의 유혹을 받을 때 멜기세덱을 만나다. 오늘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신다.(히4:16)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먹이고 축복하셨다.(14:18) 얼마나 놀라운 구세주인가? 아브라함은 그에게 십일조를 바치고 그를 높였다.(20)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십일조에 대한 첫 번째 예증이다. 모세의 율법에 제시된 십일조보다 훨씬 전 일이다.
십일조가 그리스도 모형에게 바쳐졌음을 시사하고(히7:4-10) 오늘날 신자들이 아브라함의 본을 따를 것을 암시한다. 아브라함은 세상의 부를 거절했으나 자신의 부를 주님과 나누었다. 롯은 이 일로 정신을 차렸습니까? 슬프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9:1절에 보면 그는 즉시 소돔으로 갔습니다.(행4:23) 사도들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갔다. 롯의 마음이 소돔에 있었으므로 그의 몸도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15장-17장 이삭에 대한 약속
이 장은 신약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도달하는 영적인 진리를 풍성하게 케어 낼 보고(寶庫)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언약을 하신다. 그것은 아들과 오래 전 약속된 씨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으며 가나안 땅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세우신 놀라운 계획이다.

1. 언약의 내용(15장)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필요로 할때 우리에게 오신다(14:18)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와 상급이시다.(15:1)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아브라함은 상을 원하지 않고 상속자를 원했다.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받은 지(12:7) 지금은 10년이 지났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다메섹에서 온 노종 엘리에셀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 몸에서 낳은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고 밖으로 데리고 나가 하늘의 뭇 별을 셀 수 있느냐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4-5) 말씀하시자 당시 85세 된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6절이 바로 성경의 핵심구절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며 이것이 죄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he said Amen to the Lord, and He put it to his account fo righteousness 갈3:16, 롬4:3, 약3:32)
※아브라함은 어떻게 구원 받았습니까?
율법을 지켜서인가? 그때는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다. 할례를 행함으로 받은 것도 아니다. 그는 99세 때 할례를 받았다.(17:24)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끌어낸 이유를 말씀하시고 이 땅을 줄 것을 확실히 말씀하셨다.(6절) 그 시대의 관습으로는 계약하는 쌍방이 제물로서 죽은 동물을 쪼개어 시체 사이를 걸어감으로 협정이 이루어졌다. 9절의 희생제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하고 있다. 언약은 피를 요구한다. 아브라함이 제물에 내린 새를 쫓다 잠이 들었을 때 고난 후 축복이 올 것을 말씀 해 주셨다.(15:12-21절) 이것은 전적인 은혜이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도와야 할 아무 일도 안 했다.

2. 언약의 시험(16장)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성취하실 것이고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음으로 기다릴 뿐이었다. (히6:12) 그러나 아내의 말을 듣고 성령으로 행하기를 멈추고 육신으로 행하기 시작했다. “믿음은 꾀를 부리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아마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성취를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위해서 여는 먼저 자신들이 죽어야 했다.(히11:1-12) 모든 꾀는 실패한다. 여종 하갈을 통해 낳은 아들 때문에 곧 질투, 원한, 증오, 교만, 다툼이 나타났다. 사래는 그 고통의 책임을 아브라함에게 전과한다.(5절) 육신이 지배하도록 허락할 때 그 가정은 무서운 분위기가 조성된다. 하나님은 그 결합을 인정치 않으시고 하갈을 “사래의 여종”으로 부르셨다.(8) 구약의 천사(여호와의 사자)가 언급된 것은 이곳이 처음이다. 이 분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이시다. 하갈은 사라의 학대를 받아 광야의 샘물 곁에서 도망할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사라에게 복종할 것을 지시하시고 태어날 아이의 이름과 장래를 말씀해 주셨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뜻임(11) 이삭이 태어나자 이스마엘은 쫓겨나게 되었다.(21:9이하) 곧 하갈은 옛 언약의 상징이고(하갈은 노예였고 옛 언약은 인간을 노예로 만든다. 행15:10) 사라는 새 언약의 상징으로 자유로운 여인이었고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다.(갈5:1절이하) 이스마엘은 육신으로 낳았으며 이삭은 성령으로 태어났고 약속의 자녀이다.(갈4:23) 자유를 즐겼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앞서 갈 때는 반드시 문제거리가 생긴다.
육신은 하나님 돕기를 좋아하나 참된 믿음은 인내를 나타낸다.(사28:16) 믿음과 육신을, 율법과 은혜를, 약속과 자기 노력을 섞어서는 안 된다.

3. 언약의 상징(17장)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 아브라함은 86세였다.(16:16) 이 사건과 이스마엘의 출생사이에 13년의 침묵이 흐른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신에 대해 죽음으로 부활의 능력이 그들의 삶 가운데 나타나도록 기다리셨다.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 나타나신 하나님은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God almight- shaddai) 모든 것에 넉넉하신 분(The all-sufficient one)으로 소개하셨습니다.(1,2) 이때 하나님은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을 개명시킵니다. (5절 ,15절) 아브람은 “높으신 아버지”(higt father) 아브라함은 “대중의 아버지”(father of multitude)란 뜻입니다. 사래는 “다투기를 좋아하는” 뜻인데 사라(공주)를 의미합니다. 그들의 새 이름은 새 집에 입주하게 되는 새로운 축복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은 “내 언약”이란 말을 반복하는데 언약의 성취는 하나님께 달려 있지 인간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겠노라”(I will)는 문장이 반복되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 할례에 대한 언급(9절이하)
이곳이 할례에 대한 첫 번째 언급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어느곳에도 할례가 인간을 구원한다는 언급은 없다. 할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진 언약의 외적인 증표이나 이것은 마음의 내적인 하례를 받은 사람들을 상기시킨다.(신10:16, 30:6, 렘4:4, 롬4:10, 갈5:6) 이 의식은 생후 제8일에 실시되며(12절) 8은 부활의 수이다. 유대인들은 육신의 의식을 의존했고 내적인 실제를 의존하지 않았다.(행15:5) 오늘날 신자들은 새 언약안에 있으며 참된 할례를 행하는데(빌3:1-3)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영적인 체험인 것이다.(골2:9-15) 죄의 몸(옛 본성)은 제거했으며 이제는 육체로 살지 않고 성령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
17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웃음은 믿음의 즐거운 웃음이고, 사라(18:12)의 웃음은 불신의 웃음이었다. 이삭은 “웃음”이란 뜻이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물리치고 이삭과 그의 씨로 더불어 언약을 세운다. 그러나 은혜로서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위한 특별한 축복을 정해두셨다.(16:12)

소돔과 죄(창18:1-20:18절)
이곳에는 세 가지의 방문이 나옵니다.
1. 아브라함을 방문한 세 사람(18장)
17-22절에 보면 하늘에서 온 세 사람의 방문객 중 한분은 예수그리스도였다는 것이 명백하다. 3절에 아브라함의 고백은 귀한 신앙이다. 이 장의 주제는 그리스도와 신자의 사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친구” 였기 때문이다.(악2:23) 19장에서 우리는 세상의 친구인 롯을 볼 수 있다.
(1) 그리스도와 아브라함의 친교(1-8)
이 구절은 그리스도와 신자간의 교제를 나타낸다. 아브라함은 마므레에 있었는데 그 말은 비옥(肥沃:fatness)란 뜻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충만한 축복을 즐기고 있었다. 장막은 그의 순례의 생애를 말해주며 “오정 즈음”이란 그가 빛 가운데 행하고 있음을 말해준다.(요일1장) 아브라함이 서두름은 주님을 기쁘게 하려는 사랑의 열정을 증명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편안히 모시기 위해 아낌없이 제공한다.(엡3:17절 참조) 엡3:17절을 직역하면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That christ may dwell in your hearts  through faith..." 라고 바울은 기도한다. 그리스도를 집에 계시듯 친히 모신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교제하시기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모른다.
(2) 사라의 불신앙의 고백(9-15)
이삭의 출생은 웃음과 관계있다. 이삭(Isaac은 웃음)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실 것이라고 했을 때 신앙으로 즐겁게 웃었으나(17:15-18) 사라는 육적인 불신앙으로 웃었다.(12절)
우리는 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는가? 하나님께서 하시기에 어려운 일이 있단 말인가?
“내게 어찌 이런 일이 있으니까?” (How shall this be?" 그러나 사라는 “내게 어찌 ....있으리요”(how can it be?)라고 했습니다. why did sarah laugh shall l indeed bear a chid, now that I am old? 이삭이 출생했을 때에야 사라는 영적인 즐거움 가운데 웃었습니다.(21:6-7절)
(3)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을 신뢰하심(16-22절)
천사들은 소돔으로 떠나갔으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기 위하여 뒤에 남으셨다(20). 그리스도는 그의 친구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요15:14-15절에 보면 그의 친구에게 자기의 뜻을 나타나겠다고 약속했다.) 시25편 9-14절을 읽고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곳에 주어진 모든 환경에 대처하는 지 보자. 아브라함은 소돔에 살고 있는 롯보다도 소돔에 대하여 더 잘 알고 있었다.
※구별되어 성경을 읽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무신론적인 고수보다 세상에 대하여 더 많이 알고 있다.
(4) 롯을 위한 아브라함의 관심(23-33)
롯의 세속성과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롯에게 놀라운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에 변론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공의를 변론하고 있음에 유의하자. 즉 하나님이 사악한 사람들과 함께 의인을 멸망시킬 수 있으신가? (갈보리에서 하나님은 사악한 사람들 대신 의인을 벌하셨다) 아브라함은 신자 열 명만 찾아도 하나님은 온 성을 용서하실 것을 믿었다. 19장에서 롯의 가족은 정혼한 사위들까지 6명이었다. 최소한 4명만 더 찾을 수 있었다면 하나님은 온 성을 남겨 주셨을 것이다. 롯이 얼마나 큰 실패를 범하였는가?

2.  아브라함을 방문한 천사들(19장)
그리스도는 저들과 같이 가지 않았다. 세상으로 타락한 사람의 집에서 그는 "집 같은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다. 벧후 2:7-8절은 롯은 구원받은 사람이었고 주님과 연합하였으나 교제가 없었고 아들은 되었지만 친교는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그는 ”불 가운데 얻을 것“처럼 구원받았다.(고전3:14-15) 롯이 이제는 장막이 아닌 집에서 살고 있는데(3절)  제단에 대한 언급은 없음에 유의하자. 천사가 도착한 것은 저녁이고(1절) 이 장의 대부분은 밤에 발생한 사건이다. 그것은 롯이 빛 가운데 행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롯은 그의 장막과 제단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영적인 기준도 없었다. 왜냐하면 군중의 육욕을 만족시켜주기 위하여 결혼하지 않은 자기의 딸들을 거리로 내 보내겠다고 감히 제안했기 때문이다.(8) 그리고 자기 가족에 있어서 조차 그의 말은 신뢰받지 못하고 있었다.(12-14) 이 모든 일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롯이 눈을 들어...”(13:10) 믿음으로가 아니라 보이는 것으로 행하기 시작했고, 세상에 속한 것들을 위하여 살기 시작했다. 그는 세상적인 여인과 결혼 한 것이 틀림없다.(26절) 심판은 언제 임했나요?(아침, 히 23절) 일상 업무를 시작하려고 했을 때였다. 사악한 도시는 완전히 멸망했으며 롯과 결혼하지 않은 두 딸만 피했다. 이것은 앞으로 임할 진노의 상징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평화롭고 완전하다고 생각할 때 멸망이 닥칠 것이다.(살전5장)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을 위해 롯을 구해주셨다.(19:29) 그리스도를 위해 장차 올 진노에서 그의 교회를 구하실 것이다.(살전1:8, 5:9) 롯은 하나님이 진노를 퍼붓기 전에 그의 교회를 휴거하시는 일의 예증이다. 롯의 말년은 흑암과 음탕으로 가득 찼다. 동굴에서 근친 상관을 저 지른다. 그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도시의 집을 위해 장막을 잃었다. 그런데 마침내 동굴에서 살면서 자기 딸들로 말미암아 술에 취하게 되었다. 이 끔찍한 사건의 자녀들이 모압과 암몬 족속이다. 그들은 유대인의 적이 되어왔다. 육이 영에 대항하여 싸운다.
※놋이 그릇된 곳을 택한 결과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파멸시켰다.

3. 아브라함의 그랄 방문(20장)
롯은 이제 잊혀 졌으나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리로다” 불행이도 이 장은 옛 죄의 반복이다. 아브라함은 또 다시 그의 아내에 대하여 거짓말을 한다.(12:10-20참조) 가장 신앙적인 성도라고 해도 사탄이 그를 넘어지게 하지 못하도록 깨어 있어야만 한다. 이 죄가 반복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브라함이 자기 생활에서 이 일을 심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주님께 이 일을 고백하고 용서받았지만 죄를 고백하는 것과 심판과는 다르다.
※우리 죄를 심판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참된 빛 가운데서 그의 죄를 본다는 뜻이다.
죄를 미워하고 우리 생활에서 밀어 낸다는 것이다. 13절에서 아브라함은 이 죄가 갈대아 우르에서 따라다녔으며 “옛 생활”로부터 왔음을 시인한다. 신자가 비록 죄에 빠졌다 할지라도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이방인의 법정(法廷)을 괴롭히셨고 아브라함을 보호하셨다. 하나님은 통치자에게 “네가 죽으리니(너는 죽을 사람이다)”라고 하셨으나(3절) 아브라함은 선지자라고 불렀다.(7절) 이 말은 믿는 사람이 죄를 지어도 좋도록 허용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비록 신실하지 못할 때에라도 하나님은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딤후2:12-13) 물론 아브라함은 그 죄로 인하여 수치와 비난의 괴로움을 당했으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보호하신다. 실제로 아비멜렉이 사라(Sarah)를 취했더라면 바로 그 다음해에 이삭을 출생시킬 하나님의 계획이 깨졌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기심과 불신앙은 자기 자신의 생명과 유대민족의 장래를 거의 파면 시킬뻔 했다. 불행이도 그들의 아들 Isaac은 후에 이와 똑같은 속임수를 사용했고 (26:6) 똑같이 쓰라린 아픔을 당했다. “믿음이란 꾀를 부리지 않고 사는 것이다”

※18장 19장에 나오는 두 가지 방문을 비교 해 보면 흥미있다.
아브라함롯①그리스도께서 친히 방문①두 천사만 방문②축복의 멧세지(이삭)②죄를 설교하는 메세지③빛 가운데(정오)③그늘이 질 때(저녁)④장막 문에서④성문에서(소돔)⑤AV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힘을 얻음⑤못이 하나님께 아무 영향력이 없었음⑥소돔이 멸망하는 것을 보나 아무것도 잃지 않음⑥생명은 구했으나 그 밖의 모든 것을 잃음⑦세상에 축복을 끼침⑦슬픔을 가져옴(암몬과 모압)


이삭의 출생과 아브라함에게 임한 시험(21-22장)

이 두 장은 아브라함의 생애에 찾아왔던 세 가지 시험에 관한 기록임. 참된 신앙은 언제나 시험을 받는다. 왜냐하면 시험을 통해서만 우리가 어떤 종류의 믿음을 갖고 있는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시험은 성장과 승리의 기회이다.

1. 가족에게서 온 시험(21:1-21)
가정생활 중에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 힘든 때가 있다. 아브라함은 이미 그의 아버지와 (11:27-32) 조카 롯과(12-13장) 그의 아내로 말미암아(16장) 가족에게서 시험을 받았다. 여기서는 그의 두 아들 즉 십대 후반이었을 이스마엘과(16:16) 겨우 젖을 떼었을 세 살 가량의 이삭간의 갈등을 보게 된다. 처음에 이삭의 출생은 기쁨과 웃음을 가져왔다.(21:6, 17:17, 18:12절을 비교) “이삭”이란 이름이 바로 “웃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후 오래지 않아 이스마엘이 계속 그의 동생을 핍박함으로 대립이 생겼다. 몇 가지 교훈을 보자.
(1) 육과 영- 이스마엘은 육의 자녀(16장)인 반면, 이삭은 기적적으로 출생한 약속의 자녀였다. 이삭이 그 가정에 나타난 것은 아브라함에게 힘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이미 그는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였다.(롬4:19-20) 이는 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으로 된 것이다. 육과 영, 옛 본성과 새로운 성품은 언제나 대립되기 마련이다.(갈5:16-24) 구원은 옛 본성을 변화시키지 않으며 옛 본성이 향상되거나 길들여지지 않는다.(롬6-7장 참조)
옛 본성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이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사랑했고 그를 곁에 붙들어 두고 싶어 했다.(21:11, 17:18절 참조) 그러나 하나님은 “내어 쫓으라”고 말씀하셨다. 로마서 6장은 육신을 이기는 유일한 승리는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 곧 자신이 죽었다고 간주하는 것임을 알려준다. 옛 본성과 연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롬13:14) 반드시 갈등과 문제를 일으킨다.
(2) 옛 언약 대 새 언약- 갈4:21-31절은 이 사건이 곧 하나님의 이스라엘과의 옛 언약과 교회와의 새 언약을 상징하는 비유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중심 사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하갈은 율법이라는 옛 언약의 상징으로서 바울시대의 지상적 예루살렘과 동일시되었으며, 사라는 은혜의 새 언약의 상징으로 천상적 예루살렘과 동일시되었다. 이스마엘은 육으로서 태어났으며 노예의 아들이었다.
Isaac은 영으로 태어났으며 자유로운 여인의 아들이었다. 이 두 아들은 율법의 노예로 있는 유대인과 은혜의 자유 아래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각각 상징한다.
하  갈사  라율법, 옛 언약새 언약(은혜)지상적 예루살렘천상적 예루살렘이스마엘이삭율법으로 태어난 노예의 아들영으로 태어난 자유로운 여인의 아들율법의 노예인 유대인은혜의 자유아래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 바울의 논점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갈(옛 언약)을 내어 쫓으라고 명령하신데에 있다.
이는 하나님의 축복이 이삭에게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갈라디아서 3-4장에 기록된 바울의 논증은 이 모든 사실에 적중한다.
(3) 인간의 방법 대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방법이 정확해 보이지 않을지라도 가족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은 바로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었다. 하갈은 16:10절에서의 하나님의 약속을 잊었다. 다시 말하면 상한 심령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붙으셨으며 말씀대로 지키셨다. 이것은 우리가 순종한다면 언제나 약속대로 문제를 해결해 주심을 증거 한다.

2. 이웃에게서 온 시험(21:22-24)
그리스도인들은 외인들(Those that are without)과의 관계를 주의해야 한다.(골4:5, 살 전4:12, 딤전3:7)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뺏는 문제로(25절) 충돌이 있었으나 좋은 방법으로 해결된 것을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은 지극히 사무적인 방법으로 해결했다. 고전14:40절에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했다. 아브라함과 그 이웃들은 적절한 선물을 교환했다. 언약에 조인하기 위하여 적합한 제사를 드렸다(30절). 이 계약이 이루어진 곳을 브엘세바(맹세의 우물)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우물은 아브라함에게 기도와 친교의 장소가 되었다. 우리가 이웃 간에 또는 사업상 직면하게 되는 시험을 그리스도인의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은 중요하다.(롬12:18절 참조)

3. 여호와로부터의 시험(22:-14)
사탄의 시험- 유혹(나쁘게 만들기 위함)
하나님의 시험-가장 좋은 것을 나타내도록 돕기 위함
그래서 가장 극렬한 시험은 사람으로부터 오지 않고 주께로부터 온다.(약1:12-15절 참조) 참고 이기면 언제나 가장 큰 축복이 따른다. 하나님은 결코 이런 방식으로 롯을 시험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롯은 소돔과 세상이 그를 시험하는 낮은 수준에 살았기 때문이다.
주님과 가장 가까이 동행하는 성도를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위하여 시험하신다.
(1) 모형적 교훈-이삭은 그리스도의 놀라운 모형이다.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놓은 독생자(only son), 이삭과 그리스도는 둘 다 약속된 아들 둘다 기적으로 태어났음.
이삭그리스도독생자독생자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생명 내놓음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생명 내놓음두 종 이삭과 동행순종, 두도둑 사이에서 십자가 짐형제들에게 박해순종

(2) 실천적인 교훈
진실한 신앙은 반드시 시험을 받기 마련이다. 물론 하나님이 이삭의 생명을 원하신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을 원하셨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귀중한 존재였다. 하나님은 이삭이 아브라함의 우상인 것을 시험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삭이 약속을 쟁취할 것을 신뢰하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 시험을 통과했습니까? 단 한 가지 방법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한 것이다.(히11:17-19) 하나님께서 이삭을 살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빛 데 말씀하신 것을 어두움 가운데서 의심”하지 말라. 아브라함은 지체 없이 순종했다. 순종할 때 다음 단계로 넘어가신다. 응답은 단 몇 분이라도 때늦게 오는 법이 없다.(요7:17절) 꼭 필요할 때 하나님은 수양을 공급하셨다.(13절) 이로 인해 아브라함은 그곳을  “여호와 이레(주께서 틀림없이 하시리라)”라고 이름을 지었다.
(3) 예언적 교훈
이 사건은 모리아 산에서 일어났으며(22:2) 이곳은 성전이 세워진 곳이다.(대하3:1) 이삭은 “양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었고 하나님은 수양을 공급하셨다. 그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통하여 왔다.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요1:29절)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친히 준비하시리라”(8절)고 대답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일러주신 한 산(2절)거기서 번제를 드렸다. 그리스도는 갈보리 산에서 죽임을 당했다.(요8:56)
(4) 교리적 교훈
약2:14-26절은 믿음과 행위 사이의 관계를 논한다. 그가 주장한 요점은 참 믿음과 반드시 순종으로 입증된다. 약2:21절의 정확한 번역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의로워진 것이 제단에 그의 아들을 바친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가?” 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칠 때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전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을 때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이다.(창15:6) 아고보가 말하려는 것은 “우리의 행위로나 희생을 바침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생활이 곧 구원받은 믿음을 증거하는 것”이라는 것이다.(롬4:1-5, 갈3:6절 이하 참조)

사라의 죽음과 이삭의 결혼(창23장-24장)

이 두장은 서로 대조적입니다. 한 장(23장)은 장례식, 다른장(24장)은 결혼식이 나옵니다. 가나안은 산골짜기 땅이었던 것처럼 (신11:11절)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도 기쁨과 슬픔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떤 경우에도 믿음으로 행했습니다.(히11:13-17)
23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슬퍼하며 애곡하는 상주였지만(23:2절) “소망없는 다른이”와 같지 않았습니다.(살4:13절이하) 사라의 장사지냄은 이방인과 아주 다른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처음 소유한 땅이 무덤이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이상하게 보입니다. 창49장 31-32절은 여섯 사람이 여기에 장사되어 있다고 밝히는데, 복음의 맷세지가 빈 무덤을 전하는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그의 사무적인 문제에 있어서 조심성 있게 다루고 있으며 모든 일이 “관대하고도 질서있게” 행해지는 것을 주목합시다. 믿는 사람들이 사무상 업무를 처리함에 있어서, 특히 불신자와의 거래에서 탐탁치 않게 의문의 여지를 남기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24장에서 영적인 풍성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종과 리브가를 통해서 세가지 훌륭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아브라함(24:1-9절)
아브라함은 이제 140세였습니다.(25:20, 21:5) 하나님은 그에게 영적으로, 또 물질적으로 축복하셨으나 아브라함은 이삭의 신부를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서 확인하고 싶어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그의 아들(그리스도)을 위하여 신부(교회)를 선택하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그 아들을 위해 하나님이 적절한 여인을 만나게 해 주실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이미 하나님께 바쳐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6-7절) 그에게는 “여호와이레”의 신앙이 확고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나안에도 문필좋고, 학벌좋고, 아릿다운 처녀가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친척중에서 이삭의 베필을 선택할 수 있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는 세상에 살고 있었지만 그들과의 동화(同和)는 피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에셀에게 환도뼈 아래 손을 넣고 맹세(盟銴) 하게 했는데 환도뼈는 “야레크”로 넓적다리를 말하며 주권과 권위의 상징이었습니다. 주인에 대한 절대 복종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2. 충성된 종(10-49절)
영적인 의미에서 보면 종은 잃어버린 자를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신부로 삼게 하는 일을 수행하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여기에 종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것은 그는 오직 주인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종은 얼마나 자주 그의 주인과 주인의 아들을 언급했습니까? 본장에서만 22번이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이 땅에서 구세주의 뜻을 행하기 위해 보냄 받았습니다. 종은 주인의 소유를 한 몫 가지고 갔는데 이는 마치 성령께서 오늘날 우리의 보증이 되사(엡1:13-14) 우리가 어느 날 영광중에 누리게 될 거대한 부요의 작은 몫을 우리와 함께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그 종은 주인의 임무를 완수 하는데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식사조차 사양했습니다.(33절, 요4:31-32) 우리는 육체의 일들을 영적인 일들보다 앞세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종은 주인으로부터 명령을 받았고 조금도 변경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함으로 믿었고(사65:24절참조, 창24:12절이하)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기 위해 주님을 기다리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섬김에 있어 성급하고 참지 못하는 성격은 마땅치 않습니다. 종은 여호와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순종하는)길에서 나를 인도하사”(27절, 요7:17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되자, 그는 미루지 않았고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일을 서둘렀습니다.(17절) 그 가정의 친절은 호의적이었으나 그는 자기 주인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었으므로 다른 모든 일들을 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46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적중했고(하나님은 사자를 앞서 보내셨음, 24:7절) 하나님은 종의 기도대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리브가는 종에게 뿐 아니라 낙타에게도 물을 마시게 하겠다고 했습니다.(46절) 하나님은 리브가의 봉사와 헌신하는 정신을 벌써 아셨고 이삭의 아내를 예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3. 리브가의 결단(24:50-76절)
종에게 자초지종의 설명을 듣고 라반은 여호와의 명령대로 하라고 허락했으나 리브가의 오라버니와 어머니는 며칠 또는 열흘만이라도 더 있다 떠날 것을 권유했습니다.(55절) 리브가는 서둘렀으나(58절) 그들은 늑장 부리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지체하다가 병통이 납니다. 그 안에 심기가 변할 수도 있고 마귀에게 제2의 작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리브가의 결단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녀의 결단이 그녀의 생애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녀는 이삭을 본 일도 없고, 또 신랑감의 집이 얼마나 부요한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종의 말을 듣고 믿었습니다. 오늘날도 성령님은 우리 가운데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구원받을 사람은 말씀을 듣고 바른 결정을 내리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조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고전2:14)라고 했습니다.
※24장은 곧 종(성령)이 신부를 찾으러 갑니다. 이제 신부는 그녀를 영접하려고 나타난 이삭에게 수줍음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65절)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그때는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신부를 취하려 돌아오실 때 세상은 어두울 것입니다. 신랑을 만나기 위하여 결단을 내렸던 리브가의 믿음은 보상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었고 이삭의 사랑을 받았고 그의 부(富)를 함께 누렸습니다. 만약 그녀가 거절했다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신랑 예수를 향한 믿음의 결단은 우리에게 어떤 축복을 가져오게 한다는 것을 본문은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그와 함께 거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삭과 하나님의 시험(창21장-22장)

이 두 장은 아브라함의생애에 찾아왔던 세가지 시험에 대한 기록이다. 참된 신앙은 언제나 시험을 받는다.(히12:5-6) 왜냐하면 시험을 통해서만 우리가 어떤 종류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신앙의 시험은 성장과 승리의 기회이다.

1. 가족에게서 온 시험(21:1-21절)
가정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가 가장 힘든때가 있다 .아브라함은 이미 그의 아버지와 (11:27-32절), 조카롯과(12-13장), 그의 아내로 말미암암(16장) 가족에게 시험을 받았다.
여기서 그의 두 아들, 즉 10대 후반 이었을 이스마엘과(16:16) 겨우 젖을 떼었을 세 살 가량의 이삭간의 갈등을 보게 된다. 처음에는 이삭의 출생은 기쁨과 웃음을 가져왔다. (21:6, 17:17, 18:12절을 비교바람) “이삭”이란 이름이 바로 “웃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후 오래가지 않아 이스마엘이 계속 그의 동생을 핍박하므로 대립이 생겼다. (9절)

-. 여러 가지 귀중한 교훈들
(1) 육 대 영- 이스마엘이 육의 자녀(16장)인 반면에, 이삭은 기저적으로 출생한 약속의 잔였다. 이삭이 그의 가정에 태어난 것은 아브라함이 힘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이미 그는 죽은 사람과 마차가지였다.(롬4:19-20절) 이는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으로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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