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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를 상기하며 뒤늦게 깨달은 은혜 욥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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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회
댓글 0건 조회 17,049회 작성일 07-06-23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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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7월 (음6.6일)에 제일 큰형이 15세이고 제가9세 때 어린 5남매를 남겨두고 아버지께서 아직 젊으신 40나이에 급성맹장염으로 훌훌히 저 세상으로 가 버리셨습니다. 연이어 다음해 3월에 3대 독자 외아들을 잃은 슬픔에 젖어 한숨만 지으시다가 할머니마저 별세하시고 말았으니 아무리 철이 없었던 어린 시절이라고 하지만 저에게는 나름대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지금 광주에서 장로로 교회를 잘 섬기고 있는 막내동생은 유복자로 아버지가 별세하신 지 5개월 후에 세상에 태어났으니 집안이 얼마나 어수선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런 시기에 6.25 사변이 발발했으니 정신 차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러한 고난과 환난가운데서 함께 해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뒤늦게야 깨달았습니다. 그래도 아버지 계실 때는 생활이 굶고 살 정도는 아니었기에 동네 아래쪽에 초가삼간이라도 있었고 바로 집마당 앞에 마을 사람들이 쉬기도 하고 아이들이 뛰어 놀 수 있는 놀이터가 있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일종의 공원이었습니다. 커다란 느티나무들이 서 있었고 한쪽 구석에 열녀각(烈女閣)이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반상(班常)의식이 남아 있을 때인지라 근동에서는 열녀가 난 집안으로 알려졌고 그랬기에 기념각도 쾌 큼직했습니다. 우리들은 달 밝은 밤이면 기념 각을 돌면서 술래잡기와 숨바꼭질을 하면서 밤 가는 줄 모르고 놀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나중에 그 기념각 때문에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습니다. 6.25사변이 발발하여 그 지역은 좌익 세력에 장악되었고 심심찮게 군경의 습격이 있었습니다. 동네 뒷산에서 전투가 있었던 다음 날이면 동네 소년단들을 동원하여 좌익 빨치산들이 탄피를 주워 오도록 했습니다. 물론 그것으로 탄환을 재생하여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때 어떤 개구쟁이 소년단원이 105mm 불발탄을 빨치산 초소의 감시망을 피하여 몰래 가지고 와 신기한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 같습니다. 타 동네 사람들끼리 50여명이 모여들었는데 그 포탄을 만져보고 굴러보고 하다가 누군가가 던졌는데 그때 폭발되어 25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저희 누나 한 사람만 제외하고 전원 중경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저는 저의 형님과 동시에 소변이 보고 싶어 열여각 귀퉁이로 돌아가다가 왼쪽발만 미처 옮겨지지 않은 순간 폭발되어서 저는 왼쪽 발 아홉 군데에 파편을 맞았고 형님은 복숭아 뼈만 날아갔습니다. 실로 앗 차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몇 초만 늦었어도 시체가 산산조각이 날 뻔했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을까 상상이 안 됩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할머니가 돌보아 주셨다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무슨 약이 있었겠습니까? 호박이나 토끼를 잡아 으깨어 상처에 바르고 열기나 뽑아내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런 몸으로 또 피난 생활을 하여야 했으니 어머니 등에 업혀서 낮이면 산으로 갔다 밤이면 돌아오곤 했습니다. 피난을 가지 않으면 정보를 제공한다고 빨치산들에게 조사받고 처형도 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군경에 의하여 수복되던 날이었습니다. 큰 산 밑에 있었던 작은집으로 피난을 갔는데 어머니가 큰 방으로 나를 업고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비좁기도 했지만 그 방에 있고 싶지 않아 쇠죽을 끓여 먹이는 사랑방으로 옮겨 가지고 졸랐습니다. 계속 칭얼거리니까 방안에 있는 사람들이 핀잔을 주었고 어머니도 야단을 치셨습니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졸라 되니 할 수 없이 방을 옮겼습니다. 그러나 그 방은 더 비좁고 더 늙은 분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녁 무렵 난데없이 큰방 쪽에서 따발총(당시 72발이 연속 발사되던 총) 소리가 나자 방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1평 남짓한 광속으로 한꺼번에 몰려갔습니다. 나도 상처 때문에 일어나 앉지도 못했는데 언제 어떻게 그곳까지 왔는지 사람들 머리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리저리 밀어 던지는 바람에 너무도 상처가 아파서 넓은 방으로 기어 나와 어머니를 처량하게 불렀습니다. 아마 어머니는 중간쯤에 깔려 계셨던지 대답소리만 들렸습니다. 그때 석양 무렵이라 종이문 밖으로 총을 겨눈 군인들의 그림자가 비쳤는데 진주되었으니 빨리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업혀 제일 먼저 밖으로 나와 보니 큰 방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피가 문턱을 넘어 마당 쪽으로 냇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아!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끔찍한 기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나서 뒤늦게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나 같은 것이라도 쓰실 데가 있어 아껴두시고 내 생명을 보존시켜 두셨던 것입니다. 욥이 악창으로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나를 보살피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욥10:12) 고백했었는데 욥이 얼마나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달은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실로 그러한 체험들은 나에게 극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나는 불교를 신봉하다 뒤늦게 (대학3년 때) 개종했기에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보존시켜 주셨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그의 섭리하심을 깨닫고 나자 내 생명은 내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살아온 고난의 조각들을 생각 해 볼 때 오늘의 나는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요 보살핌 때문이었습니다.  누가 나의 이 생명이 보존된 것을 우연의 일치요, 조상의 도우심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이 민족이 정신을 바짝 차려서 6.25같은 전쟁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전쟁은 죽이고 죽는 싸움입니다. 또 뒤늦게나마 깨달은 저에게 하나님께서 남은 생애에도 긍휼을 더하여 주시사 주를 위해 이 생명 다하도록 유익하게 쓰여지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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