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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이 생각난다(빌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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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영수
댓글 0건 조회 17,562회 작성일 02-09-28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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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이 생각난다(빌3:7)
 
꼭 가을이 아니더라도, 고독한 밤이 아니라도 나의 인생에서 잊어 버릴 수 잇는 몇 분이 있습니다.  그 중에 이 가을에 지금처럼 피곤하고 고달플 때 너무 생각나는 그 분은 나와 함께 본 교회를 개척하셨던 박홍근 장로님이십니다.  희안하게도 내가 아홉 살 때 별세하신 나의 아버님 함자와 이름이 같아서 나는 가끔 하나님께서 부성애에 굶주린 나에게 보내주신 어른이라고 위안을 받곤 했었습니다.  지난 9월 17일은 그 분의 3주기 추도예배일이어서 대구 아들집까지 가서 예배를 인도하고 왔습니다. 자녀들도 목사 이전에 동기간처럼 여기고 아버님 추도 예배만은 꼭 내가 인도해 주어야 한다고 부탁하는 것 같습니다.
양노원을 건축하려고 허가 신청을 해 놓고 또 여러 가지 기도하며 계획한 일들이 많아 그런 것일까 오늘밤 따라 유난히 장로님 생각이 더 간절합니다.
교회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이것 좀 해야겠다고 말만 꺼내면 어린 목사에게 한번도 거절 하시지 않고 "잘 생각해서 하십시오" 하시던 장로님은 지금 생각해 보면 "아멘" 장로님이셨습니다.  그랬기에 우리 교회는 본당 증축 뿐 아니라 그 악조건 속에서도 완도에 오봉산 기도원을 세울 수 있었고 목포 근교에 엘림수양관도 마련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땅에 양노원을 건축하고 공원 묘지를 조성하려고 하니 장로님 생각이 더욱 납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사셨기에 86세의 천수를 누리시고 돌아 가실 때도 그렇게 불가 몇분의 고통도 없이 잠 주무시듯 소천 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광주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을 때 3년간이나 거르지 않으시고 봄 가을로 찾아와 함께 개척하자고 하셨는데 80년도 5,18 광주사태를 계기로 의원(意願) 면직하고 일하시던 정미소 공장에서 처음 뵈었을 때 적잖이 으아(suspicion) 했었던 일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쥐 구멍이 뚫린 가마니 열장을 사러 온 사람이 500원(지금은 약5,000원 가치나 될까)만 에누리 하자고 하니까 비싸면 그냥 가라고 야멸차게 거절하시는 광경을 목격하고 함께 개척할 일이 걱정 되어었습니다.  그만큼 물질관리에 철저하고 분명하셨습니다.
그런 장로님이 어떤 교회나 목사님들이 좀 보조해 달라고 하면 한번도 거절하시는 것을 못 보았습니다.  하루에도 열두번씩 공장을 돌아보시며 쌀겨를 하얗게 뒤짚어 쓴체 그렇게도 바쁘게 움직이시던 분이셨습니다.  재래식 부엌 그대로 왕겨를 태워서 밥을 지어 공장 가족을 먹이셨다는 부인 고(故) 민재련 집사님과 꼭 정부미만 고집하고 잡수셨던 장로님의 땀방울로 이름 없이 구석구석에 주의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딸 일곱 중 맨끝으로 아들 하나가 태어났으니 얼마나 소중했겠습니까?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로는 아들을 낳자 너무도 기뻐 신발도 신지 않은체 친구집으로 달려가 나도 아들을 낳았다고 소리치셨다고 합니다.
그 아들 경춘 선생의 이야기입니다.  그런 아들이 미국(샌프란시스코)에 가서 공부할 때 돈을 보내 주시지 않아 흑인 촌에서 150$짜리 셋방을 살면서 부인과 함께 밤거리에서 옷을 팔고 주일 오후는 식당에 serving을 하면서 고생했는데 그때 미국을 방문하셨답니다.
오셔서 용돈을 한푼도 주시지 않아 아마 돈을 안 가져 오셨는가 보다 추측했는데 다른 목사님들에게는 후하게 주시더랍니다. 그래서 너무 어려우니 여유 있으시면 조금 달라고 하자 다 써버리고 없다고 남의 이야기하듯 하시더랍니다.  그분은  항상 자신에게는 인색했고 남에게는 베푸셨던 분입니다.  나도 같은 식구로 생각하셨기에 자녀들 학비 하라고 봉투 한번 안 주시더라구요.  그런데 나의 결혼한 딸집에 방문하셔서는 안권사님에게 돈 좀 더 주라고 하시는 것을 보고 눈시울이 뜨거웠었습니다.
아들 고3때 공장이 몽땅 불타버렸었는데 이제 영풍은 재기불능이라고 생각하며 어떻게 하실거냐고 묻는 기자에게 불탔다고 하나님이 떠나신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되묻더랍니다.
그 와중에도 타다 남은 안채에서 어머님은 손님을 접대하고 장로님은 오신 손님들에게 교통비를 챙겨 드리더랍니다.  그리고 아들을 모퉁이로 부르더니 너와 우리 세 식구(딸들은 출가 했었음)가 길거리에다 자판을 놓고 장사한들 못 먹고 살겠느냐고 위로하시더랍니다.
그 장로님은 곧 다시 재기했고 또 주를 위해 일하시며 베푸셨습니다.
故 박홍근 장로님이야말로 진정한 부자이셨습니다.  실로 받은 은혜를 감사하며 나누는 삶을 사셨던 분입니다.  바울사도처럼 일체의 자족을 배운 거짓 없는 신자요, 마음의 부자였습니다.  그랬기에 노년에 안영옥권사님 같으신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후처를 보내주셨고 그렇게도 평안히 소천 하셨던 것 아니겠습니까?  권사님 집사님들이 다 된 딸들과 중국에 가서 도자기 공장을 경영하는 경춘선생도 모두 의인의 후손답게(시37편 25-26절참조) 살아가고 있음을 감사합니다. 그 분의 일화와 에피소드는 너무도 많지만 지면 관계상 다 소개해 드리지 못합니다.  평안 할 때도 힘들때도 그분이 생각납니다.  대구를 다녀온 후 유난히도 금년에는 더 생각납니다.  그만큼 내가 철이 더 든 탓인지 하려는 일이 짐이 무거운 탓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음 주일이 우리교회 창립 22주년 기념 주일이기에 더더욱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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