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일꾼(요1:39) 김영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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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순절(Lent 四旬節) 기간입니다. 사순절이란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속량(贖良)의 제물(祭物)이 되어 십자가에 위에서 대신 죽으신 그 폭발적인 사랑을 생각하면서 경건하게 지키자는 절기로 그 날을 기준으로 40일 전기간(全期間)을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인상적으로 우리의 머릿속에 다음 세 장면의 그림은 그려져 있어야 할 것입니다.
①마굿간 구유에 뉘여 있는 예수
②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예수
③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이 사순절 기간에 고난당하신 예수님에 관해 많은 것을 생각 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오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생각 해 봅시다.
나귀에 탄 예수님의 모습은 실로 진풍경(珍風景) 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어른이 발이 땅에 끌리는 조그만 조랑말을 타고 뒤뚱 뒤뚱 행진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눈앞에 예루살렘 성문이 보입니다. 그 속으로 들어가면 끝장입니다. 그곳에는 모략과 질투와 독선과 부패한 정치와 엉터리 재판과 피와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예루살렘 대문은 호구(虎口)입니다. 인간적인 생각하면 그것을 피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만약 꼭 들어가야만 한다면 창검에 갑옷을 입고 완전 무장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끼나귀를 타고 빈손으로 터벅터벅 들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될 일을 훤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진했습니다. 문제 속으로 뛰어드는 예수, 아픔을 감수하려는 예수, 시간 속으로 돌격하는 용감한 예수의 모습이 나귀를 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동네 아이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잠잠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흐르는 예루살렘 성 밖이었습니다. 오히려 질투와 증오에 사로잡힌 권력자들이 외쳤습니다. “예수여 아이들이 당신을 향하여 저렇게 야단들인데 한마디도 할 말이 없소” 예수님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이 아이들의 입을 막으면 길바닥의 돌멩이들이 일어나 소리를 지를 것이요” 아이들이 하나님의 침묵을 응답하는 가운데 주님은 묵묵히 예루살렘, 그 악과 고통의 도가니 속으로 돌격해 들어갔습니다. 실로 용기있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은 희생도 동반하지만 사랑하면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반사적으로 몸을 던집니다. 우리를 타락시킨 사단은 우리를 영원한 형벌의 세계로 이끌고 갔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자기 생명보다도 우리의 생명을 더 사랑하시는 예수님이셨기에 죽기 위하여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나귀를 타고 가시는 초라한 입성이었지만 예수님은 원수가 들끓는 예루살렘, 고통과 죽음의 마지막 길을 그렇게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하게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토마스 아켐프스(중세기의 신학자)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남을 사로잡을 수는 없다. 당신이 사랑으로 소유될 때, 즉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 자신을 주어 버릴 때 비로소 하나님은 말씀을 시작하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그 모습은 곧 살아있는 말씀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웅변하셨습니다. 크리스챤의 언어는 행동 그 자체입니다.
사순절을 맞이하며 여러분은 무슨 고백을 하시겠습니까?
무슨 기도를 하시겠습니까?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셨기에 묵묵히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던 그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무슨 언어가 필요하겠습니까?
나귀를 타고 터벅터벅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신 그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 크리스챤의 웅변이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말의 종교가 아니라 행동하는 종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행동으로 표현된다는 깊은 진리를 이 사순절에 다시 한번 터득합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인상적으로 우리의 머릿속에 다음 세 장면의 그림은 그려져 있어야 할 것입니다.
①마굿간 구유에 뉘여 있는 예수
②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예수
③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이 사순절 기간에 고난당하신 예수님에 관해 많은 것을 생각 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오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생각 해 봅시다.
나귀에 탄 예수님의 모습은 실로 진풍경(珍風景) 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어른이 발이 땅에 끌리는 조그만 조랑말을 타고 뒤뚱 뒤뚱 행진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눈앞에 예루살렘 성문이 보입니다. 그 속으로 들어가면 끝장입니다. 그곳에는 모략과 질투와 독선과 부패한 정치와 엉터리 재판과 피와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예루살렘 대문은 호구(虎口)입니다. 인간적인 생각하면 그것을 피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만약 꼭 들어가야만 한다면 창검에 갑옷을 입고 완전 무장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끼나귀를 타고 빈손으로 터벅터벅 들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될 일을 훤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진했습니다. 문제 속으로 뛰어드는 예수, 아픔을 감수하려는 예수, 시간 속으로 돌격하는 용감한 예수의 모습이 나귀를 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동네 아이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잠잠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흐르는 예루살렘 성 밖이었습니다. 오히려 질투와 증오에 사로잡힌 권력자들이 외쳤습니다. “예수여 아이들이 당신을 향하여 저렇게 야단들인데 한마디도 할 말이 없소” 예수님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이 아이들의 입을 막으면 길바닥의 돌멩이들이 일어나 소리를 지를 것이요” 아이들이 하나님의 침묵을 응답하는 가운데 주님은 묵묵히 예루살렘, 그 악과 고통의 도가니 속으로 돌격해 들어갔습니다. 실로 용기있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은 희생도 동반하지만 사랑하면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반사적으로 몸을 던집니다. 우리를 타락시킨 사단은 우리를 영원한 형벌의 세계로 이끌고 갔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자기 생명보다도 우리의 생명을 더 사랑하시는 예수님이셨기에 죽기 위하여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나귀를 타고 가시는 초라한 입성이었지만 예수님은 원수가 들끓는 예루살렘, 고통과 죽음의 마지막 길을 그렇게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하게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토마스 아켐프스(중세기의 신학자)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남을 사로잡을 수는 없다. 당신이 사랑으로 소유될 때, 즉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 자신을 주어 버릴 때 비로소 하나님은 말씀을 시작하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그 모습은 곧 살아있는 말씀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웅변하셨습니다. 크리스챤의 언어는 행동 그 자체입니다.
사순절을 맞이하며 여러분은 무슨 고백을 하시겠습니까?
무슨 기도를 하시겠습니까?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셨기에 묵묵히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던 그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무슨 언어가 필요하겠습니까?
나귀를 타고 터벅터벅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신 그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 크리스챤의 웅변이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말의 종교가 아니라 행동하는 종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행동으로 표현된다는 깊은 진리를 이 사순절에 다시 한번 터득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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