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노하여 빼앗자(마11:12) 김영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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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노하여 빼앗자(마11:12) 김영수목사
예수님께서 우리가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천국을 놓고 서로가 싸워야 한단 말씀입니까? 아니면 고지를 점령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군인들처럼 돌격해야 한단 말입니까? 마귀의 저지선을 뚫고 나가지 못하면 불가능하다는 기(氣)를 죽이는 말씀입니까?
일단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은혜 되는 쪽으로 수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어에 보면 “침노 당한다”는 말은 “비아제타이”로 “힘차게 나아가고 있다”는 뜻이며 곧 “힘쓰는 사람들이 차지하게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천국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어떤 목적 달성이나 축복을 받게 되는 일도 사실 자신의 노력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물론 노력하지 않고 거져 얻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감나무 밑에서 떨어지는 홍시를 받아먹는 사람처럼 자기 입으로 들어가는 양보다는 얼굴에 뒤범벅되는 낭패를 당하는 결과가 많은 경우를 봅니다.
축복도 침노하는 자들의 전리품이라는 실례를 성경에서 생각해 봅시다. 마가복음 2:1-12절에서 중풍병자가 어떻게 고침 받았습니까?
참으로 고군분투(孤軍奮鬪)하여 얻어낸 결과였던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 앞에 나아가면 자기 병이 고침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었다고 해도 이 중풍병자는 도저히 실행이 불가능한 형편이었습니다. 네 사람의 벗들이 들 것을 매고 오기는 했지만 그야말로 문제투성이였습니다. ①전혀 일어날 수 없는 병자 ②입추의 여지가 없는 인파 ③지붕까지 올라간 들 어찌 뚫고 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결코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았습니다. 안 되는 것 속에서 안 된다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정말 안 되는 것입니다. 침노하는 자는 걸림돌을 디딤돌로 만드는 적극적 사고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뱅겔은 “믿음이란 모든 장애물을 뚫고 예수님께로 나가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침노하는 자는 목표를 보지 문제를 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남이 생각지 못하는 기발한 지혜를 얻어냅니다.
떨어지는 사과에서 남다른 만유인력을 찾아내는 뉴톤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무슨 일이든 무심히 보고 넘어가지 않습니다.
삭개오는 키가 작다는 문제, 사람들이 운집해 있다는 문제가 예수님을 만나려는 목적에 조금도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악 조건 때문에 뽕나무에 올라갔고 누구보다 높이 올라갔기에 예수님의 눈에 띄어 예수님을 만나서 운명이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조건이 좋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는 것으로 끝났지만 삭개오는 조건이 나빴기에 오히려 예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2장에 나오는 중풍병자는 다행히 좋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한 가지라도 좋은 조건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조건을 최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는 법입니다. 모세에게는 아론과 훌이란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바울에게는 바나바와 누가가, 루터에게는 멜란크톤이, 웨슬레에게는 찰스가, 무디에게는 센키란 동역자가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습니다. 중풍병자를 옮긴 4명의 동역자는 열심 있는 동역자, 협력하는 동역자, 사랑하는 동역자, 끝장내려는 동역자, 믿음이 보이는 동역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내려놓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들은 다른 병자들도 많았지만 새치기라도 해서 기어코 병을 고침 받고 말겠다는 “거룩한 뻔뻔히”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축복은 침노하자는 자들의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천국을 예비해 두었다고 해도 그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힘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의 선하신 목적 성취도, 그렇게 받고 싶은 축복도 힘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매사에 열심을 가집시다. “열정은 곧 활력”이라는 어느 회사의 사훈을 보았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마음의 치아로 질근질근 깨물어(chewing)보시는 시간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천국을 놓고 서로가 싸워야 한단 말씀입니까? 아니면 고지를 점령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군인들처럼 돌격해야 한단 말입니까? 마귀의 저지선을 뚫고 나가지 못하면 불가능하다는 기(氣)를 죽이는 말씀입니까?
일단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은혜 되는 쪽으로 수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어에 보면 “침노 당한다”는 말은 “비아제타이”로 “힘차게 나아가고 있다”는 뜻이며 곧 “힘쓰는 사람들이 차지하게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천국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어떤 목적 달성이나 축복을 받게 되는 일도 사실 자신의 노력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물론 노력하지 않고 거져 얻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감나무 밑에서 떨어지는 홍시를 받아먹는 사람처럼 자기 입으로 들어가는 양보다는 얼굴에 뒤범벅되는 낭패를 당하는 결과가 많은 경우를 봅니다.
축복도 침노하는 자들의 전리품이라는 실례를 성경에서 생각해 봅시다. 마가복음 2:1-12절에서 중풍병자가 어떻게 고침 받았습니까?
참으로 고군분투(孤軍奮鬪)하여 얻어낸 결과였던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 앞에 나아가면 자기 병이 고침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었다고 해도 이 중풍병자는 도저히 실행이 불가능한 형편이었습니다. 네 사람의 벗들이 들 것을 매고 오기는 했지만 그야말로 문제투성이였습니다. ①전혀 일어날 수 없는 병자 ②입추의 여지가 없는 인파 ③지붕까지 올라간 들 어찌 뚫고 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결코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았습니다. 안 되는 것 속에서 안 된다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정말 안 되는 것입니다. 침노하는 자는 걸림돌을 디딤돌로 만드는 적극적 사고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뱅겔은 “믿음이란 모든 장애물을 뚫고 예수님께로 나가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침노하는 자는 목표를 보지 문제를 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남이 생각지 못하는 기발한 지혜를 얻어냅니다.
떨어지는 사과에서 남다른 만유인력을 찾아내는 뉴톤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무슨 일이든 무심히 보고 넘어가지 않습니다.
삭개오는 키가 작다는 문제, 사람들이 운집해 있다는 문제가 예수님을 만나려는 목적에 조금도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악 조건 때문에 뽕나무에 올라갔고 누구보다 높이 올라갔기에 예수님의 눈에 띄어 예수님을 만나서 운명이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조건이 좋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는 것으로 끝났지만 삭개오는 조건이 나빴기에 오히려 예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2장에 나오는 중풍병자는 다행히 좋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한 가지라도 좋은 조건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조건을 최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는 법입니다. 모세에게는 아론과 훌이란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바울에게는 바나바와 누가가, 루터에게는 멜란크톤이, 웨슬레에게는 찰스가, 무디에게는 센키란 동역자가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습니다. 중풍병자를 옮긴 4명의 동역자는 열심 있는 동역자, 협력하는 동역자, 사랑하는 동역자, 끝장내려는 동역자, 믿음이 보이는 동역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내려놓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들은 다른 병자들도 많았지만 새치기라도 해서 기어코 병을 고침 받고 말겠다는 “거룩한 뻔뻔히”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축복은 침노하자는 자들의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천국을 예비해 두었다고 해도 그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힘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의 선하신 목적 성취도, 그렇게 받고 싶은 축복도 힘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매사에 열심을 가집시다. “열정은 곧 활력”이라는 어느 회사의 사훈을 보았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마음의 치아로 질근질근 깨물어(chewing)보시는 시간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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