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손 (눅24:39) 김영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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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손 (눅24:39) 김영수목사
테레사 수녀(Mother Teresa)가 어떻게 30년 동안을 인간 지옥이라고 불리우는 칼카타 빈민굴에서 일할 수 있었을까요? 엄청난 고생과 노동, 가난과 질병, 계속되는 문제 속에 살면서도 테레사 수녀는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따뜻한 미소를 풍겨 주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그 온화하고 잔잔함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그 대답은 테레사 수녀 자신의 간증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수녀가 되어 예수님의 종으로 봉사하며 살 것을 결심하고 고향 유고슬라비아의 집을 떠난 것은 18세 소녀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께서 “예수님의 손을 꼭 잡고 있어야 한다. 네 손도 예수님의 손처럼 되도록 노력하여라” 하는 당부의 말씀을 해 주었답니다. 순진한 믿음을 가진 어머니의 이 충고 한마디가 테레사 수녀를 큰 빛의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그녀는 평생을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희생하는 손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톨스토이의 동화 중에 「황제와 청소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번은 임금이 잔치를 베풀고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이날 참석자 중 한 명을 뽑아 왕과 왕후 사이에 앉게 하고 푸짐한 상품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손님들이 궁전에 도착하자 왕의 신하들은 손님들의 손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날 왕의 옆자리에 앉도록 당선 된 사람은 궁전의 청소부 할머니였습니다. 그 할머니는 보기 민망할 정도로 거칠어진 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손을 가진 할머니가 임금님의 옆자리에 앉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적격자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믿지 못하는 도마에게 무엇으로 자신을 증명하였습니까? “내 손과 발을 보라”(눅24:39)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마 너를 구원하기 위하여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바로 그 흔적을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대개 사람을 식별하려면 얼굴을 보게 하는 것이 상식인데 예수님은 손과 발에 있는 못 자국을 자신의 신분증으로 제시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발라주어 눈을 뜨게 하셨던 자비의 손이었습니다.(요9:6)
죽은 회당장의 딸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 하시며 살려내신 생명의 손이었습니다.(막5:41) 예수님은 친히 우리를 대신하여 해골(골고다)이라는 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손을 가지셨습니다. (눅23:23) 그렇게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시면서도 또 불의를 보고는 못 참으시는 공의로운 손을 가지신 분입니다. 한번은 성전에 들어가시다 매매(賣買)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자는 들의 상(床)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마21:12) 예수님은 말씀하시고 손수 행하셨습니다. 또 손으로 행하시며 말씀하셨기에 그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의 확신을 주는 것이며 말씀한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진리인 것입니다. 말만하고 손으로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허상(虛像)일 뿐입니다. 우리가 정치하는 사람들을 못 믿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말은 많이 해 놓고 실천의 의지가 빈약하기 때문에 불신의 대명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며칠 전(06. 10. 14) 우리 지방 출신 (신안 암태)으로 법무부 장관을 지낸 천정배 의원과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무척 겸손하고 신중한 성품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안산제일교회(고훈목사) 안수집사라고 하니 그래서 그런지 나이보다 더 포근하고 완숙한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인물이 차세대의 지도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기대감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느낀 점이 손이 너무 부드럽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공부만 했고 바로 사시(司詩)에 합격하여 공직(公職) 생활을 했으니 손이 부드러울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도 흙을 뒤집고 김을 매여 손가락 마디가 굵어진 농부들의 고충을 얼마나 알 수 있을까? 무거운 쇠를 다루며 상처 받고 찢겨지고 기름이 묻어 뒤틀어진 산업 전사들의 애환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는 점을 나름대로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물론 더 잘 알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내가 직접 체험 한 것과는 전달(傳達) 농도(濃度)가 같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예수님의 손을 만져 봅시다. 예수님의 손은 우리의 아픔을 다 느끼십니다. 죽음도 느끼십니다. 사람을 치료하는, 살리는 능력이 있는 손입니다. 예수님의 손을 꼭 잡으시고 여러분의 볼에 슬며시 대어 보십시오. 온화하고 포근한 감촉이 느껴지실 것입니다. 영혼이 치료되실 것입니다. 육신의 질병이 물러갈 것입니다. 정신이 평안해지며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고 기쁨이 온 몸 전체에서 솟아 나옴을 느끼실 것입니다. 우리도 테레사 수녀처럼 예수님의 손을 꼭 잡고 삽시다. 예수님의 손처럼 되도록 노력합시다. 미얀마에 가서 초창기 선교사로 헌신했던 저드슨목사(Adoniram Judson)의 일화가 있습니다. 미얀마에 도착하여 왕에게 기독교 선교 신청서를 냈더니 왕이 저드슨 목사의 손을 보고 “그런 손으로는 무슨 말을 해도 내 백성이 듣지 않을 거요. 먼저 내 백성의 손과 비슷해지시오” 하더랍니다. 그래서 저드슨 목사는 일체의 선교 활동을 잠시 보류하고 농촌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살며 원주민처럼 힘든 농사일을 2년간 종사하여 그의 손이 농부의 손과 같이 거칠어진 뒤에 선교를 시작했답니다. 이 일화는 동고동락(同苦同樂)하는 손을 가질 때 마음이 통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우리와 그러한 관계를 가진 손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손을 붙잡는다는 것은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그러한 손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곧 긍휼과 자비와 사랑과 헌신을 직접 몸으로 실천하는 그러한 사람의 손을 말하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Mother Teresa)가 어떻게 30년 동안을 인간 지옥이라고 불리우는 칼카타 빈민굴에서 일할 수 있었을까요? 엄청난 고생과 노동, 가난과 질병, 계속되는 문제 속에 살면서도 테레사 수녀는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따뜻한 미소를 풍겨 주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그 온화하고 잔잔함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그 대답은 테레사 수녀 자신의 간증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수녀가 되어 예수님의 종으로 봉사하며 살 것을 결심하고 고향 유고슬라비아의 집을 떠난 것은 18세 소녀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께서 “예수님의 손을 꼭 잡고 있어야 한다. 네 손도 예수님의 손처럼 되도록 노력하여라” 하는 당부의 말씀을 해 주었답니다. 순진한 믿음을 가진 어머니의 이 충고 한마디가 테레사 수녀를 큰 빛의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그녀는 평생을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희생하는 손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톨스토이의 동화 중에 「황제와 청소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번은 임금이 잔치를 베풀고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이날 참석자 중 한 명을 뽑아 왕과 왕후 사이에 앉게 하고 푸짐한 상품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손님들이 궁전에 도착하자 왕의 신하들은 손님들의 손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날 왕의 옆자리에 앉도록 당선 된 사람은 궁전의 청소부 할머니였습니다. 그 할머니는 보기 민망할 정도로 거칠어진 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손을 가진 할머니가 임금님의 옆자리에 앉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적격자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믿지 못하는 도마에게 무엇으로 자신을 증명하였습니까? “내 손과 발을 보라”(눅24:39)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마 너를 구원하기 위하여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바로 그 흔적을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대개 사람을 식별하려면 얼굴을 보게 하는 것이 상식인데 예수님은 손과 발에 있는 못 자국을 자신의 신분증으로 제시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발라주어 눈을 뜨게 하셨던 자비의 손이었습니다.(요9:6)
죽은 회당장의 딸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 하시며 살려내신 생명의 손이었습니다.(막5:41) 예수님은 친히 우리를 대신하여 해골(골고다)이라는 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손을 가지셨습니다. (눅23:23) 그렇게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시면서도 또 불의를 보고는 못 참으시는 공의로운 손을 가지신 분입니다. 한번은 성전에 들어가시다 매매(賣買)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자는 들의 상(床)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마21:12) 예수님은 말씀하시고 손수 행하셨습니다. 또 손으로 행하시며 말씀하셨기에 그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의 확신을 주는 것이며 말씀한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진리인 것입니다. 말만하고 손으로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허상(虛像)일 뿐입니다. 우리가 정치하는 사람들을 못 믿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말은 많이 해 놓고 실천의 의지가 빈약하기 때문에 불신의 대명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며칠 전(06. 10. 14) 우리 지방 출신 (신안 암태)으로 법무부 장관을 지낸 천정배 의원과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무척 겸손하고 신중한 성품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안산제일교회(고훈목사) 안수집사라고 하니 그래서 그런지 나이보다 더 포근하고 완숙한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인물이 차세대의 지도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기대감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느낀 점이 손이 너무 부드럽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공부만 했고 바로 사시(司詩)에 합격하여 공직(公職) 생활을 했으니 손이 부드러울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도 흙을 뒤집고 김을 매여 손가락 마디가 굵어진 농부들의 고충을 얼마나 알 수 있을까? 무거운 쇠를 다루며 상처 받고 찢겨지고 기름이 묻어 뒤틀어진 산업 전사들의 애환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는 점을 나름대로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물론 더 잘 알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내가 직접 체험 한 것과는 전달(傳達) 농도(濃度)가 같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예수님의 손을 만져 봅시다. 예수님의 손은 우리의 아픔을 다 느끼십니다. 죽음도 느끼십니다. 사람을 치료하는, 살리는 능력이 있는 손입니다. 예수님의 손을 꼭 잡으시고 여러분의 볼에 슬며시 대어 보십시오. 온화하고 포근한 감촉이 느껴지실 것입니다. 영혼이 치료되실 것입니다. 육신의 질병이 물러갈 것입니다. 정신이 평안해지며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고 기쁨이 온 몸 전체에서 솟아 나옴을 느끼실 것입니다. 우리도 테레사 수녀처럼 예수님의 손을 꼭 잡고 삽시다. 예수님의 손처럼 되도록 노력합시다. 미얀마에 가서 초창기 선교사로 헌신했던 저드슨목사(Adoniram Judson)의 일화가 있습니다. 미얀마에 도착하여 왕에게 기독교 선교 신청서를 냈더니 왕이 저드슨 목사의 손을 보고 “그런 손으로는 무슨 말을 해도 내 백성이 듣지 않을 거요. 먼저 내 백성의 손과 비슷해지시오” 하더랍니다. 그래서 저드슨 목사는 일체의 선교 활동을 잠시 보류하고 농촌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살며 원주민처럼 힘든 농사일을 2년간 종사하여 그의 손이 농부의 손과 같이 거칠어진 뒤에 선교를 시작했답니다. 이 일화는 동고동락(同苦同樂)하는 손을 가질 때 마음이 통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우리와 그러한 관계를 가진 손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손을 붙잡는다는 것은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그러한 손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곧 긍휼과 자비와 사랑과 헌신을 직접 몸으로 실천하는 그러한 사람의 손을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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