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
페이지 정보
본문
여러분이 살아오면서, 주변에 못마땅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릴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또 좋은 버릇을 가진 사람들을 보며 본받아야겠다는 충동을 느낀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길들여진 습관은 썩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습관은 제2의 천성”이라고도 하고, “제 버릇 개 못준다”는 말도 있습니다. 성경 예레미야서 22:21절에 보면 유다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왕도 어지간히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는 삐딱한 습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나쁜 습관 때문에, 가족이 흩어졌고 백성이 곤욕을 당해야 했습니다. 나쁜 습관은 자기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까지 피해를 줍니다. 어느 교회에 축도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목사님이 예배가 끝나고 축도할 때 출석했다가 축도를 받고는 제일먼저 교회당을 나가는 버릇이 있어 누가 지적을 했더니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을 늘어놓으면 그때라도 와서 목사님 축도 받고 가니 장하게 여겨 달라고 하더랍니다. 이해는 가지만 이 말에 동의하는 신자는 없으실 것입니다. 꼭 바빠서 그러기보다는 잘못된 습관이 분명합니다. 여호야김 왕에게 불순종을 책망하시며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 (렘22:29) 하고 하나님께서 한탄했습니다. 우리는 나쁜 버릇에 길들여지기 전에 조심해야겠지만, 나쁜 버릇이 있으면 속히 고치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어떤 권사님은 목사님 설교에 살찌게 하는 내용은 별 관심이 없고, 뼈만 추려내 교회에서나 밖에서,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흥집회 때 자기 집에서 식사를 대접하게 되었는데, 자기 아들이 부흥사 목사님을 뻔히 쳐다보면서 “어머니가 이야기한 것보다 목사님이 형편없이 못생기지 않았구만” 했답니다. 얼마나 무안했겠습니까? 그래서 그 권사님은 그런 버릇을 고쳤을까요? 왜 장로님, 권사님의 자녀들중에 신앙이 잘못되고 삐딱한 자녀들이 나올까요? 그것은 부모님들이 믿음의 본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집에 돌아와 밥상머리에서까지 교회에 대한 불평이나 성도 간에 속상한 일들을 말할 때 그 말을 들은 자녀들에게 교회에 대한 호의가 생길 리 없습니다. 은연중에 반항심이 생기고 기피심리가 가랑비에 옷 젖듯이 영혼 속에 스며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나 목사님에 대한 존경심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집안에 무서운 사람이 없으면 아이들이 제멋대로 자랍니다. 어른들이 그 역할을 잘하여 좋은 습관을 들게 하면 그 아이는 어디에 가던지 누구에게나 사랑받게 되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좋은 습관을 길러주는 것이상 자녀를 축복하는 일이 없습니다. 옹야! 옹야! 길러 놓으면 그 아들이 할아버지 수염을 뽑고 상투 끝에 올라앉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여덟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여섯 살 위인 형님이 가장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아버지가 없어, 버릇없다는 말 들어서는 안된다” 고 당부하시며, 형님께 네 동생들 버릇 잘 가르치라고 이르셨기 때문에 형님이 호랑이 같이 무서웠습니다. 간혹 밥상에서 젓가락으로 음식을 뒤적거리다가 된통 혼났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반찬 타박하는 버릇이 없어졌고 지금은 아무 음식이나 잘 먹게 된 것이 그때 나쁜 버릇이 잡힌 덕인 것 같습니다. 어찌 사람마다 나쁜 습관이 없겠습니까마는 더 무서운 습관은, 자기가 자기의 나쁜 버릇을 찾아보려고 않는 습관일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의 모습을 항상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인 성경이 있지 않습니까? 또 교역자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면 그것이 복인 것을 알면서 청종치 않으면 손해는 내가 봅니다. 좋지 않은 습관은 미련 없이 고쳐갑시다. 동화작가 이솝이 어릴 때 어떤 집에서 심부름 일을 했는데 주인이 상당한 학자였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목욕탕에 가서 몇 사람이나 있는지 보고 오라고 일렀습니다. 이솝이 돌아와서 한 보고는 단 한사람 있더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의아해하자 목욕탕 앞에 뾰족한 틈이 있어 드나드는 사람들이 넘어질 뻔하는데 한사람도 치우려 하는 사람이 없더랍니다. 그런데 나중에 한사람이 끙끙거리며 그것을 뽑아 치우고 목욕탕 안으로 들어가더랍니다. 그것을 유심히 본 이솝은 사람다운 사람이 한사람뿐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좀 힘들어도 그 한사람이 되어 봅시다.
그런데 부흥집회 때 자기 집에서 식사를 대접하게 되었는데, 자기 아들이 부흥사 목사님을 뻔히 쳐다보면서 “어머니가 이야기한 것보다 목사님이 형편없이 못생기지 않았구만” 했답니다. 얼마나 무안했겠습니까? 그래서 그 권사님은 그런 버릇을 고쳤을까요? 왜 장로님, 권사님의 자녀들중에 신앙이 잘못되고 삐딱한 자녀들이 나올까요? 그것은 부모님들이 믿음의 본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집에 돌아와 밥상머리에서까지 교회에 대한 불평이나 성도 간에 속상한 일들을 말할 때 그 말을 들은 자녀들에게 교회에 대한 호의가 생길 리 없습니다. 은연중에 반항심이 생기고 기피심리가 가랑비에 옷 젖듯이 영혼 속에 스며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나 목사님에 대한 존경심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집안에 무서운 사람이 없으면 아이들이 제멋대로 자랍니다. 어른들이 그 역할을 잘하여 좋은 습관을 들게 하면 그 아이는 어디에 가던지 누구에게나 사랑받게 되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좋은 습관을 길러주는 것이상 자녀를 축복하는 일이 없습니다. 옹야! 옹야! 길러 놓으면 그 아들이 할아버지 수염을 뽑고 상투 끝에 올라앉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여덟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여섯 살 위인 형님이 가장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아버지가 없어, 버릇없다는 말 들어서는 안된다” 고 당부하시며, 형님께 네 동생들 버릇 잘 가르치라고 이르셨기 때문에 형님이 호랑이 같이 무서웠습니다. 간혹 밥상에서 젓가락으로 음식을 뒤적거리다가 된통 혼났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반찬 타박하는 버릇이 없어졌고 지금은 아무 음식이나 잘 먹게 된 것이 그때 나쁜 버릇이 잡힌 덕인 것 같습니다. 어찌 사람마다 나쁜 습관이 없겠습니까마는 더 무서운 습관은, 자기가 자기의 나쁜 버릇을 찾아보려고 않는 습관일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의 모습을 항상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인 성경이 있지 않습니까? 또 교역자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면 그것이 복인 것을 알면서 청종치 않으면 손해는 내가 봅니다. 좋지 않은 습관은 미련 없이 고쳐갑시다. 동화작가 이솝이 어릴 때 어떤 집에서 심부름 일을 했는데 주인이 상당한 학자였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목욕탕에 가서 몇 사람이나 있는지 보고 오라고 일렀습니다. 이솝이 돌아와서 한 보고는 단 한사람 있더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의아해하자 목욕탕 앞에 뾰족한 틈이 있어 드나드는 사람들이 넘어질 뻔하는데 한사람도 치우려 하는 사람이 없더랍니다. 그런데 나중에 한사람이 끙끙거리며 그것을 뽑아 치우고 목욕탕 안으로 들어가더랍니다. 그것을 유심히 본 이솝은 사람다운 사람이 한사람뿐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좀 힘들어도 그 한사람이 되어 봅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