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크리스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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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크리스챤인가?
술 취한 사람이 가로등 밑에서 무엇을 열심히 찾고 있었습니다.
이때 지나가던 사람이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하고 묻자 "안경이요" 하더랍니다. "어디쯤에서 떨어 뜨렸습니까?" "택시에서 내릴 때 저어기서 떨어졌어요" "아 그럼 거기에 가서 찾으셔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도 여기가 가로등이 있어 밝으니까 찾기 쉽잖아요" 하더랍니다.
한참 생각해 보면 배꼽잡고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어리석은 농담이 우스운 이야기는 술 취한 사람이 문제의 초점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8:33-34절에 보면 죄인 아닌 죄수로 체포된 예수님을 앞에두고 로마제국을 상징하는 독수리 깃발 아래서 준엄하게 심문하는 총독 빌라도와 예수님이 주고 받은 짤막한 대화가 나옵니다.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고 질문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고소한 내용이었으므로 빌라도 자신이 확인하려는 심문이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직답을 하시지 않고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하고 반문하셨습니다.
이것은 피고가 재판관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인간 빌라도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어째서 너는 남의 이야기나 듣고 호기심 정도로 나를 대하느냐? 재판관으로서 형식적인 만남이 아니라 너 자신이 이 예수가 누구인지 바로 알고 싶지 않느냐?" 하는 깊은 의미가 이 반문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빌라도형 크리스챤이 아닙니까?
에수님이 나의 주님이 아니라 소문만 듣고 따르고 있지 않는가?
내 문제를 놓고 씨름하는 신앙이 아니라 겨우 동참하는 교인은 아닌가?
교회에 나가서 해롭지 않다. 알아두어서 나쁠 것 없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 않는가? 그래도 사람을 사귀는데는 좋은 사교단체가 아닌가? 하는 정도의 그리스도인은 아닐까?
이 사순절 기간동안에 자신에게 다시 한번 냉철한 질문을 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정작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조차 모른다면 엉뚱한 곳에서 안경을 찾고 있는 술취한 사람보다도 더 웃기는 내가 아닌가?
술 취한 사람은 찾는 위치만 빗나갔지만 나는 찾아야 할 목적물조차 모르고 산다면 얼마나 넌센스(nensense) 인생인가?
정말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별하며 사는가? 정말 필요한 것과 덜 필요한 것을 알고 뛰는가? 주어와 보어의 구별도 제대로 못한 체 인생을 내 멋대로 해석하며 살고 있지는 않는지?
가야 할 길과 곁길을 구별 못하고 살고 있다면 그래도 났습니다.
나는 길인지 아닌지 조차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골이 서늘 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반성을 촉구 하셨듯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을 소문의 대상, 호기심의 대상, 역사의 인물정도로 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신앙이란 깨달음이 아니라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인생을 가르쳐 주는 선생이 아니라 나의 신앙의 고백의 대상입니다. 나의 주님으로서 나의 인생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부딪쳐야 합니다.
술 취한 사람이 가로등 밑에서 무엇을 열심히 찾고 있었습니다.
이때 지나가던 사람이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하고 묻자 "안경이요" 하더랍니다. "어디쯤에서 떨어 뜨렸습니까?" "택시에서 내릴 때 저어기서 떨어졌어요" "아 그럼 거기에 가서 찾으셔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도 여기가 가로등이 있어 밝으니까 찾기 쉽잖아요" 하더랍니다.
한참 생각해 보면 배꼽잡고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어리석은 농담이 우스운 이야기는 술 취한 사람이 문제의 초점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8:33-34절에 보면 죄인 아닌 죄수로 체포된 예수님을 앞에두고 로마제국을 상징하는 독수리 깃발 아래서 준엄하게 심문하는 총독 빌라도와 예수님이 주고 받은 짤막한 대화가 나옵니다.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고 질문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고소한 내용이었으므로 빌라도 자신이 확인하려는 심문이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직답을 하시지 않고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하고 반문하셨습니다.
이것은 피고가 재판관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인간 빌라도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어째서 너는 남의 이야기나 듣고 호기심 정도로 나를 대하느냐? 재판관으로서 형식적인 만남이 아니라 너 자신이 이 예수가 누구인지 바로 알고 싶지 않느냐?" 하는 깊은 의미가 이 반문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빌라도형 크리스챤이 아닙니까?
에수님이 나의 주님이 아니라 소문만 듣고 따르고 있지 않는가?
내 문제를 놓고 씨름하는 신앙이 아니라 겨우 동참하는 교인은 아닌가?
교회에 나가서 해롭지 않다. 알아두어서 나쁠 것 없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 않는가? 그래도 사람을 사귀는데는 좋은 사교단체가 아닌가? 하는 정도의 그리스도인은 아닐까?
이 사순절 기간동안에 자신에게 다시 한번 냉철한 질문을 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정작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조차 모른다면 엉뚱한 곳에서 안경을 찾고 있는 술취한 사람보다도 더 웃기는 내가 아닌가?
술 취한 사람은 찾는 위치만 빗나갔지만 나는 찾아야 할 목적물조차 모르고 산다면 얼마나 넌센스(nensense) 인생인가?
정말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별하며 사는가? 정말 필요한 것과 덜 필요한 것을 알고 뛰는가? 주어와 보어의 구별도 제대로 못한 체 인생을 내 멋대로 해석하며 살고 있지는 않는지?
가야 할 길과 곁길을 구별 못하고 살고 있다면 그래도 났습니다.
나는 길인지 아닌지 조차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골이 서늘 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반성을 촉구 하셨듯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을 소문의 대상, 호기심의 대상, 역사의 인물정도로 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신앙이란 깨달음이 아니라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인생을 가르쳐 주는 선생이 아니라 나의 신앙의 고백의 대상입니다. 나의 주님으로서 나의 인생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부딪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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