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려 드린 배(눅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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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려 드린 배(눅5:3)
누가복음 5장은 예수님의 12제자중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는 결코 우연이 아닌 기적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호수(예수님 초기 사역의 중심지로 갈릴리 바다. 디베랴 바다로도 불림) 가에서 옹위한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계실 때 어부인 베드로는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헛탕을 치고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시몬 베드로의 배에 오르사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셨다고 했습니다. 곧 배를 좀 빌려 사용하자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베드로는 전혀 불만 없이 선뜻 예수님께 배를 빌려 드렸던 것입니다.
여기서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녁 내내 그물을 던졌으니 베드로 일행은 얼마나 허기가 졌겠습니까? 또 피라미 한 마리 잡지 못하고 헛 탕쳤으니 더욱 맥 빠지고 짜증이 났을 것입니다. 이미 그물을 다 씻어 챙겼고 이제 집으로 돌아 갈려고 하는 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설교가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기약도 없습니다.
전혀 초면 부지의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대여비를 톡톡 주겠다는 아무런 언질도 한마디 없습니다. 무턱대고 허락도 없이 배 위로 올라와 명령합니다.
얼마나 짜증날 일입니까? 대단히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축복이었습니다. 도저히 빌려 드릴 수 없는 형편인데도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유없이 조건없이 빌려 드렸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았고 순종하여 시키는 데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더니 고기를 애운 것이 심히 많아 자기 배 뿐 아니라 동무의 배까지 잠길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는 사람 낚는 어부로 예수님의 대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베드로가 배를 빌려 드리지 않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렇습니다. 빌려 드릴 수 없을 때 우리가 주님 앞에 선뜻 내놓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공짜를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무엇이 부족하여 우리에게 손해 보게 하시겠습니까? 어린아이의 5병2어의 사건도 자기가 먹고 싶어도 이 작은 것이지만 예수님께 드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드렸을 때 5천명이 먹고 열두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산출했던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예수님에게 빌려 드린다는 말 자체가 어패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것처럼 착각하고 얼마나 아까워하고 인색합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제자들에게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며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고 말씀했습니다(마21:3).
그러므로 우리는 이유 없이 빌려 드려야 합니다. 빌려드릴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베드로에게 빌려 탄 빈 배에 고기가 가득 채워졌습니다.
빌려 탄 당나귀 !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빌려 쓸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빌려 탄 당나귀 앞에 호산나 찬송의 개선가가 울렸고, 빌려 쓴 다락방에서는 장엄한 최후의 만찬이 벌어지고, 빌려서 묻힌 예수의 무덤에서는 생명의 약속이 꽃피는 부활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비린내 나는 빈배, 보잘 것 없는 어린아이의 도시락, 초라한 다락방, 음산한 무덤까지도 예수께 바쳐질 때 찬란한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 사순절(Lent)을 보내면서 나는 무엇을 예수님께 빌려드릴까?
도저히 빌려드릴 형편이 못 되는데도 선뜻 빈배를 내어드린 베드로처럼 이유 없이 무조건 주님을 위해 무엇이나 내어 드릴 수 있는 내가 될 수 는 없을까요?
이 사순절에 여러 가지 깊은 상념(想念)으로 나 위해 피 흘려 돌아가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그 옆에 한편 강도처럼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싶습니다.
그 강도는 온 세상이 불신으로 꽉 차 있을 때 단 혼자서 예수님을 인정하고 믿었습니다.
그는 기사와 이적도 보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달려있는 예수님만 보고 그를 따랐습니다.
관권(官權)과 교권(敎權)의 압력이 있고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죽이라고 외치고 심지어 베드로까지 자취를 감춘 그 한복판에서 이 한사람만이 예수님이 옳다고 증거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죄를 인정할 줄 알았고 죽는 순간까지 친구 강도의 영혼을 걱정할 줄 알았습니다. 이 구원 받은 강도야말로 최후의 제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나도 피라미 한 마리 못 잡은 한낱 빈배 같은 존재인데 주님앞에 모두 내어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강도처럼 그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싶습니다.
이 사순절에 갈보리 산상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경건히 두 손을 모읍니다.
주님 돌아 보시옵소서!
누가복음 5장은 예수님의 12제자중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는 결코 우연이 아닌 기적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호수(예수님 초기 사역의 중심지로 갈릴리 바다. 디베랴 바다로도 불림) 가에서 옹위한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계실 때 어부인 베드로는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헛탕을 치고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시몬 베드로의 배에 오르사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셨다고 했습니다. 곧 배를 좀 빌려 사용하자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베드로는 전혀 불만 없이 선뜻 예수님께 배를 빌려 드렸던 것입니다.
여기서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녁 내내 그물을 던졌으니 베드로 일행은 얼마나 허기가 졌겠습니까? 또 피라미 한 마리 잡지 못하고 헛 탕쳤으니 더욱 맥 빠지고 짜증이 났을 것입니다. 이미 그물을 다 씻어 챙겼고 이제 집으로 돌아 갈려고 하는 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설교가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기약도 없습니다.
전혀 초면 부지의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대여비를 톡톡 주겠다는 아무런 언질도 한마디 없습니다. 무턱대고 허락도 없이 배 위로 올라와 명령합니다.
얼마나 짜증날 일입니까? 대단히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축복이었습니다. 도저히 빌려 드릴 수 없는 형편인데도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유없이 조건없이 빌려 드렸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았고 순종하여 시키는 데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더니 고기를 애운 것이 심히 많아 자기 배 뿐 아니라 동무의 배까지 잠길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는 사람 낚는 어부로 예수님의 대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베드로가 배를 빌려 드리지 않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렇습니다. 빌려 드릴 수 없을 때 우리가 주님 앞에 선뜻 내놓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공짜를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무엇이 부족하여 우리에게 손해 보게 하시겠습니까? 어린아이의 5병2어의 사건도 자기가 먹고 싶어도 이 작은 것이지만 예수님께 드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드렸을 때 5천명이 먹고 열두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산출했던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예수님에게 빌려 드린다는 말 자체가 어패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것처럼 착각하고 얼마나 아까워하고 인색합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제자들에게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며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고 말씀했습니다(마21:3).
그러므로 우리는 이유 없이 빌려 드려야 합니다. 빌려드릴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베드로에게 빌려 탄 빈 배에 고기가 가득 채워졌습니다.
빌려 탄 당나귀 !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빌려 쓸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빌려 탄 당나귀 앞에 호산나 찬송의 개선가가 울렸고, 빌려 쓴 다락방에서는 장엄한 최후의 만찬이 벌어지고, 빌려서 묻힌 예수의 무덤에서는 생명의 약속이 꽃피는 부활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비린내 나는 빈배, 보잘 것 없는 어린아이의 도시락, 초라한 다락방, 음산한 무덤까지도 예수께 바쳐질 때 찬란한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 사순절(Lent)을 보내면서 나는 무엇을 예수님께 빌려드릴까?
도저히 빌려드릴 형편이 못 되는데도 선뜻 빈배를 내어드린 베드로처럼 이유 없이 무조건 주님을 위해 무엇이나 내어 드릴 수 있는 내가 될 수 는 없을까요?
이 사순절에 여러 가지 깊은 상념(想念)으로 나 위해 피 흘려 돌아가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그 옆에 한편 강도처럼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싶습니다.
그 강도는 온 세상이 불신으로 꽉 차 있을 때 단 혼자서 예수님을 인정하고 믿었습니다.
그는 기사와 이적도 보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달려있는 예수님만 보고 그를 따랐습니다.
관권(官權)과 교권(敎權)의 압력이 있고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죽이라고 외치고 심지어 베드로까지 자취를 감춘 그 한복판에서 이 한사람만이 예수님이 옳다고 증거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죄를 인정할 줄 알았고 죽는 순간까지 친구 강도의 영혼을 걱정할 줄 알았습니다. 이 구원 받은 강도야말로 최후의 제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나도 피라미 한 마리 못 잡은 한낱 빈배 같은 존재인데 주님앞에 모두 내어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강도처럼 그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싶습니다.
이 사순절에 갈보리 산상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경건히 두 손을 모읍니다.
주님 돌아 보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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