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 굶주림(skin-hu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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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 굶주림(skin-hunger) 김영수 목사
요즈음 심리적 치료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말 에 "피부 굶주림"(skin hunger)란 단어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접촉 결핍증에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도 부모도 이웃도 이 피부 접촉 결핍증에 걸려 있는 것이 암병 못지 않는 현대인의 심리병증이라고 합니다.
미국을 여행하다 보면 젊은 남녀가 거의 노출된 상태에서 공원에 뒹굴고 있거나 공공 장소인데도 포옹하고 오랜 시간 떨어질 줄 모르는 모습들이 종종 눈에 띕니다. 그래서 그들은 피부 굶주림이 없기에 그렇게 밝고 생동감있게 사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육신적인 그러한 접촉보다 더 진하고 진실한 접촉을 요구하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이며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그러한 접촉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가복음 5장에 12년간이나 혈루병으로 고생했던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여인은 많은 무리에게 에워싸인 예수님에게 필사적으로 접근하여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누가 나를 만졌느냐?"고 물으시며 접촉된 그 한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에워싸고 미닥질하고 있는데 어찌 누가 만진 줄을 알 수 있단 말씀입니까?" 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많은 사람들의 손들 가운데서 오직 한 사람의 접촉만을 감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기어이 그 여인을 찾아냈고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막5:34)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군중의 운집과 환호성보다는 오직 한 개의 접촉(contact), 진정한 믿음과 사랑이 들어있는 그 한 사람의 접촉을 더 만족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가지신 부족한 것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에 굶주리고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진정한 접촉을 기다리는 굶주립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고 기다리시고 굶주려 하시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그 혈루병든 여인의 접근처럼 진정한 접촉을 원하시는 skin hunger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어제는 우리교회 부흥성회 기간이어서 목사님들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던 중 95년도인가? 해남에 여객기 추락사건 때의 슬픈 이야기 한 토막을 들었습니다. 사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어머니와 아이가 함께 붙들고 죽었는데 얼마나 꼭 달라붙어 있던지 압축기로 분리 해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죽어가면서도 내 자식을 놓을 수 없어, 어머니의 품을 떠날 수 없어 얼마나 꼭 포옹했으면 그처럼 압축되어 버렸겠습니까?
가슴이 찡하고 눈물나는 이야기였습니다.
정과 사랑의 뜨거운 접촉을 넘어 결단코 떨어질 수 없는 필사적인 접촉이었던 것입니다. 아 예수님과 나 사이에 이러한 접촉이 있어야 할텐데.....! "그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곧 이러한 접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접촉한 자에게는 질병의 치료가 문제가 아니라 죽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부활의 생명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세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눅18:8) 하신 것도 곧 예수님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그러한 접촉을 아쉬워하신 예수님의 "피부 굶주림"의 독백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죄인 아닌 죄인으로 대 제사장 가야바의 종교 법정, 본디오 빌라도의 정치 재판에 끌려 다니면서도 거의 대답이 없이 침묵 뿐이셨습니다. 죄 없는 예수님이 왜 억울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왜 십자가의 처형이 무섭지 않으셨겠습니까?
변명할 자료가 없으셔서, 말씀을 할 줄 몰라서 안 하신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대답을 해 주셨던 것입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성도들의 몸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모두 초자연적 현상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대답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의 상대는 인간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직결된 생애였습니다. 그것이 곧 신앙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위로가 필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로 충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온전히 접촉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대답이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를 대변하는 오직 한 단어는 접촉(contact)입니다. 포도나무인 예수님에게 가지인 나는 1미크론(1/1000mm)도 떨어져 있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의 접촉에 굶주려 계십니다.
인간 상호간에 껴안는 (Hug) 치료법이 필요하듯이 우리도 나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그리스도를 껴 안으로만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즈음 심리적 치료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말 에 "피부 굶주림"(skin hunger)란 단어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접촉 결핍증에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도 부모도 이웃도 이 피부 접촉 결핍증에 걸려 있는 것이 암병 못지 않는 현대인의 심리병증이라고 합니다.
미국을 여행하다 보면 젊은 남녀가 거의 노출된 상태에서 공원에 뒹굴고 있거나 공공 장소인데도 포옹하고 오랜 시간 떨어질 줄 모르는 모습들이 종종 눈에 띕니다. 그래서 그들은 피부 굶주림이 없기에 그렇게 밝고 생동감있게 사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육신적인 그러한 접촉보다 더 진하고 진실한 접촉을 요구하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이며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그러한 접촉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가복음 5장에 12년간이나 혈루병으로 고생했던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여인은 많은 무리에게 에워싸인 예수님에게 필사적으로 접근하여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누가 나를 만졌느냐?"고 물으시며 접촉된 그 한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에워싸고 미닥질하고 있는데 어찌 누가 만진 줄을 알 수 있단 말씀입니까?" 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많은 사람들의 손들 가운데서 오직 한 사람의 접촉만을 감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기어이 그 여인을 찾아냈고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막5:34)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군중의 운집과 환호성보다는 오직 한 개의 접촉(contact), 진정한 믿음과 사랑이 들어있는 그 한 사람의 접촉을 더 만족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가지신 부족한 것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에 굶주리고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진정한 접촉을 기다리는 굶주립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고 기다리시고 굶주려 하시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그 혈루병든 여인의 접근처럼 진정한 접촉을 원하시는 skin hunger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어제는 우리교회 부흥성회 기간이어서 목사님들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던 중 95년도인가? 해남에 여객기 추락사건 때의 슬픈 이야기 한 토막을 들었습니다. 사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어머니와 아이가 함께 붙들고 죽었는데 얼마나 꼭 달라붙어 있던지 압축기로 분리 해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죽어가면서도 내 자식을 놓을 수 없어, 어머니의 품을 떠날 수 없어 얼마나 꼭 포옹했으면 그처럼 압축되어 버렸겠습니까?
가슴이 찡하고 눈물나는 이야기였습니다.
정과 사랑의 뜨거운 접촉을 넘어 결단코 떨어질 수 없는 필사적인 접촉이었던 것입니다. 아 예수님과 나 사이에 이러한 접촉이 있어야 할텐데.....! "그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곧 이러한 접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접촉한 자에게는 질병의 치료가 문제가 아니라 죽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부활의 생명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세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눅18:8) 하신 것도 곧 예수님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그러한 접촉을 아쉬워하신 예수님의 "피부 굶주림"의 독백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죄인 아닌 죄인으로 대 제사장 가야바의 종교 법정, 본디오 빌라도의 정치 재판에 끌려 다니면서도 거의 대답이 없이 침묵 뿐이셨습니다. 죄 없는 예수님이 왜 억울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왜 십자가의 처형이 무섭지 않으셨겠습니까?
변명할 자료가 없으셔서, 말씀을 할 줄 몰라서 안 하신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대답을 해 주셨던 것입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성도들의 몸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모두 초자연적 현상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대답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의 상대는 인간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직결된 생애였습니다. 그것이 곧 신앙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위로가 필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로 충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온전히 접촉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대답이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를 대변하는 오직 한 단어는 접촉(contact)입니다. 포도나무인 예수님에게 가지인 나는 1미크론(1/1000mm)도 떨어져 있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의 접촉에 굶주려 계십니다.
인간 상호간에 껴안는 (Hug) 치료법이 필요하듯이 우리도 나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그리스도를 껴 안으로만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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