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 싸움(삼상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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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 싸움(삼상4:7-8)
성경 사무엘상 4장부터 6장 가운데 기록된 내용 중에 실로 답답하고 웃기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은 상자(the ark)이야기입니다. 그 상자의 이름은 법궤입니다.
이 상자는 하나님께서 제작하라고 명하셨고(출25:10이하) 그 속에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광야에서 사용하던 만나 항아리 또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계명이 새겨진 두돌비를 넣어 두게 했던 것입니다. 상자의 재료는 조각목(the chest of acacia wood)에 금도금이었으며 크기는 장이 2,5규빗(약1m 25㎝) 광이 1.5규빗(약67.7㎝) 고가 1.5규빗 인 별로 크지 않은 상자에 불과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과 역사(歷史)속에 개입(介入)하신 상징으로 하나님의 실존과 도우심의 역사(役事)을 잊지 말라는 산 증거물로 삼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4장부터 6장에 보면 웃지 못할 상자 뺏기 싸움이 벌어지고 있으니 넌센스(nonsense)한 인간들의 코미디(comedy)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상자 싸움의 발단은 블레셋의 침공을 받은 이스라엘이 전세가 불리하여지자 실로의 성전에 안치되어 있는 언약궤를 전선까지 운반 해다가 원수의 손에서 구원받게 하려는 기발한 발상을 했습니다. 이 정보를 안 블레셋군들은 이스라엘의 신이 진에 이르렀다고 초 긴장하여 결사적으로 진격했고 결과는 이스라엘이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사했고 어이없이 법궤를 빼앗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하나님만 우습게 만들고 만 것입니다. 법궤 속에 하나님이 계신 것으로 그 하나님을 앞장세운 전쟁이었는데 패하고 말았으니 블레셋의 우상 신에게 하나님만 망신당한 꼴이 되고 만 것 아닙니까? 실로 자존심 상하고 창피스런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행히도 5장에 가면 탈취한 언약궤를 블레셋의 다곤 신전에 두었더니 이상하게도 밤마다 다곤신이 여호와의 궤인 상자(법궤) 앞에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신은 몸뚱이만 남아 있었습니다.
또 그 성읍 사람들이 독종에 걸려 고통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사정사정하여 법궤는 암소 두 마리에 실려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왔다는 내용입니다. 상자 뺏기 싸움의 일막은 이렇게 결론이 났던 것입니다. 실로 웃지 못할 희극이요 가슴 아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문제의 촛점은 상자 자체에 하나님이 계셔서 전쟁을 이기게도 하고 패하게도 하는 줄로 알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범죄와 불 경건했던 과오는 아랑곳없이 하나님은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무조건 자기들 편이라고 생각하고 그 상자(법궤)만 앞세우면 승리하리라 믿었던 것이다. 오늘날도 우리들은 이러한 독선과 편견과 아집으로 하나님을 우습게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러한 잘못된 고정관념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선민 사상으로 얼마나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고 있습니까? 그들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시내 광야를 40년간 베회 하면서도 늘 선두에 이 상자(법궤)를 모시고 다녔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실존과 임재를 믿은 것 까지는 좋지만 하나님이 그 속에 계시는 것으로 착각하여 그 상자를 뺏긴 것은 하나님을 뺏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웃긴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노아 홍수 이야기가 나옵니다(창7,8장).
그때 노아가 만든 배를 Ark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단순히 상자라는 뜻입니다.
대홍수의 혼돈에서 하나님은 노아의 작은 방주(상자)속에만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우주와 그 속의 모든 역사의 주인공이 되신 하나님(神)을 보여준 것이 바로 홍수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상자 속에 가두지 말아야 합니다. 나 라는 상자 속에, 우리 교회라는 상자 속에, 이스라엘처럼 자기 민족이라는 상자 속에 가두어서는 안됩니다.
제가 개척교회를 시작했을 때 시내 모 교회에서 성도 한 분이 옮겨왔는데 그 교회 전도사 역할을 하는 권사가 왜 영(靈)이 산 교회에 다녀야지 죽은 교회에 가느냐고 야단을 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척 가슴 아파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와 교인들이 하등 종교 사상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아픔이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신앙이란 곧 순종이며 인간의 겸손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시고 책망의 촛점으로 삼았던 것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교만이었고 편협 된 독선이었습니다. 그러한 고집불통이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3:9)고 야단 치셨겠습니까?
자기들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선민이라고 같잖게 큰소리치며 하나님의 깊고 깊으신 뜻을 깨달으려고 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일찍이 일러주신 말씀도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왜곡 되이 해석하고 판단하는 그들의 두뇌는 분명 오작동(誤作動)되고 있는 기계와 다를 바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옹졸하고 편협한 상자 뺏기 싸움 같은 것일랑 더 이상하지 맙시다. 하나님을 알되 힘써 압시다(호6:3). 우리는 그 넓이와 길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엡3:19)
성경 사무엘상 4장부터 6장 가운데 기록된 내용 중에 실로 답답하고 웃기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은 상자(the ark)이야기입니다. 그 상자의 이름은 법궤입니다.
이 상자는 하나님께서 제작하라고 명하셨고(출25:10이하) 그 속에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광야에서 사용하던 만나 항아리 또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계명이 새겨진 두돌비를 넣어 두게 했던 것입니다. 상자의 재료는 조각목(the chest of acacia wood)에 금도금이었으며 크기는 장이 2,5규빗(약1m 25㎝) 광이 1.5규빗(약67.7㎝) 고가 1.5규빗 인 별로 크지 않은 상자에 불과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과 역사(歷史)속에 개입(介入)하신 상징으로 하나님의 실존과 도우심의 역사(役事)을 잊지 말라는 산 증거물로 삼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4장부터 6장에 보면 웃지 못할 상자 뺏기 싸움이 벌어지고 있으니 넌센스(nonsense)한 인간들의 코미디(comedy)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상자 싸움의 발단은 블레셋의 침공을 받은 이스라엘이 전세가 불리하여지자 실로의 성전에 안치되어 있는 언약궤를 전선까지 운반 해다가 원수의 손에서 구원받게 하려는 기발한 발상을 했습니다. 이 정보를 안 블레셋군들은 이스라엘의 신이 진에 이르렀다고 초 긴장하여 결사적으로 진격했고 결과는 이스라엘이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사했고 어이없이 법궤를 빼앗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하나님만 우습게 만들고 만 것입니다. 법궤 속에 하나님이 계신 것으로 그 하나님을 앞장세운 전쟁이었는데 패하고 말았으니 블레셋의 우상 신에게 하나님만 망신당한 꼴이 되고 만 것 아닙니까? 실로 자존심 상하고 창피스런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행히도 5장에 가면 탈취한 언약궤를 블레셋의 다곤 신전에 두었더니 이상하게도 밤마다 다곤신이 여호와의 궤인 상자(법궤) 앞에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신은 몸뚱이만 남아 있었습니다.
또 그 성읍 사람들이 독종에 걸려 고통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사정사정하여 법궤는 암소 두 마리에 실려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왔다는 내용입니다. 상자 뺏기 싸움의 일막은 이렇게 결론이 났던 것입니다. 실로 웃지 못할 희극이요 가슴 아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문제의 촛점은 상자 자체에 하나님이 계셔서 전쟁을 이기게도 하고 패하게도 하는 줄로 알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범죄와 불 경건했던 과오는 아랑곳없이 하나님은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무조건 자기들 편이라고 생각하고 그 상자(법궤)만 앞세우면 승리하리라 믿었던 것이다. 오늘날도 우리들은 이러한 독선과 편견과 아집으로 하나님을 우습게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러한 잘못된 고정관념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선민 사상으로 얼마나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고 있습니까? 그들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시내 광야를 40년간 베회 하면서도 늘 선두에 이 상자(법궤)를 모시고 다녔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실존과 임재를 믿은 것 까지는 좋지만 하나님이 그 속에 계시는 것으로 착각하여 그 상자를 뺏긴 것은 하나님을 뺏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웃긴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노아 홍수 이야기가 나옵니다(창7,8장).
그때 노아가 만든 배를 Ark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단순히 상자라는 뜻입니다.
대홍수의 혼돈에서 하나님은 노아의 작은 방주(상자)속에만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우주와 그 속의 모든 역사의 주인공이 되신 하나님(神)을 보여준 것이 바로 홍수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상자 속에 가두지 말아야 합니다. 나 라는 상자 속에, 우리 교회라는 상자 속에, 이스라엘처럼 자기 민족이라는 상자 속에 가두어서는 안됩니다.
제가 개척교회를 시작했을 때 시내 모 교회에서 성도 한 분이 옮겨왔는데 그 교회 전도사 역할을 하는 권사가 왜 영(靈)이 산 교회에 다녀야지 죽은 교회에 가느냐고 야단을 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척 가슴 아파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와 교인들이 하등 종교 사상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아픔이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신앙이란 곧 순종이며 인간의 겸손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시고 책망의 촛점으로 삼았던 것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교만이었고 편협 된 독선이었습니다. 그러한 고집불통이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3:9)고 야단 치셨겠습니까?
자기들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선민이라고 같잖게 큰소리치며 하나님의 깊고 깊으신 뜻을 깨달으려고 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일찍이 일러주신 말씀도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왜곡 되이 해석하고 판단하는 그들의 두뇌는 분명 오작동(誤作動)되고 있는 기계와 다를 바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옹졸하고 편협한 상자 뺏기 싸움 같은 것일랑 더 이상하지 맙시다. 하나님을 알되 힘써 압시다(호6:3). 우리는 그 넓이와 길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엡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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