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잠자코 들어주세요(요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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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잠자코 들어주세요(요8:9)
왜 사람들이 남의 결점이나 잘못을 열을 올려가며 지적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상대방이 「역시 내가 잘못했다. 미안하다」고 솔직하게 자기의 잘못을 인정해 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성인(聖人)일 것입니다. 아무리 미국 사람들이 정직하다고 해도 그들도 역시 마찬가지더랍니다.
저희 아들이 타고 가던 차를 미국 사람이 받아 놓고도 말이 안 통하는 줄 알고 오히려 호통을 치더랍니다. 그래서 경우를 따지면서 한참 싸웠더니 그때야 얼굴이 붉어지며 미안하다고 하는데 진정으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여서 경찰을 불러 기어코 사과를 받아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미국사람이나 한국사람이나, 좋은 사람이나 고약한 사람이나, 오십보 백보의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상대의 잘못을 노골적으로 지적하여 승인을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당치 않습니다. 도리어 상대방은 자기의 지능 ,긍지,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마음의 문을 조개껍데기처럼 닫아 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설령 플라톤의 변증법을 가지고 설득하려고 해도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상처를 입은 것은 논리(論理)가 아니라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옳다는 판단이 섰다고 해도 그것을 설명하려고 접근했다가 오히려 내가 더 큰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때 상대는 「자기가 나보다 머리가 좋다. 잘 설득해서 자기의 마음을 바꾸어 보겠다」는 의도가 있다고 느껴져서 오히려 도전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태도는 상대방에게 반항심을 갖게 하고 전투 태세를 갖추게 만들어 주기 쉽습니다. 진정 남을 설득하고 싶으면 전혀 상대방이 눈치채지 않게 해야 합니다.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재치있고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 또 한가지 잊어서는 안될 점은 상대가 마음속으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이에 대한 변명을 늘어 놓을 때의 처신입니다. 대개 변명에는 과장과 거짓이 섞여 있는 법입니다. 그래도 변명을 듣고 즉시 반박하면서 화를 내어서는 안됩니다. 「아, 그런가」하고 잠자코 듣고 있노라면 상대는 마음속으로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자기의 체면 때문에 변명을 늘어놓을 것입니다. 그래도 잠자코 들어 주십시오. 그때 상대방은 「그 사람은 이해하더군」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말할 것이고 이쪽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는 감사와 호의를 갖게 될 것입니다. 한번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율법에는 돌로 치라(신22:23,24, 레20:10) 명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는가?"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것은 "치라" 하면 율법을 지키되 "사랑하라"한 법을 어기는 것이요, "치지 말라" 하면 율법을 범하는 것이므로 이래저래 궁지에 몰아 넣으려는 좋지 못한 음모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삼단논법으로 그들을 설득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요8:7) 하시고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다고 했습니다. 그때 저희가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다 물러가고 예수님과 여자만 남았습니다(요8:9). 예수님은 그들에게 애써서 설득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거기에 모인 많은 군중들이 얼마나 떠들었을지 안 보았어도 훤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묵묵히 다 듣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단 한마디 하셨을 뿐입니다.
우리는 나의 현명함을 과시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장 남을 설득시키고 잘못을 알게 하여 굴복시키려고 말아야 합니다. 만약 감정에 상처를 받으면 그때는 어떠한 논리로도 설득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상처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을 찾아가 설득시키려고 하지말고 그들에게 말하게 하고 되도록 말을 많이 들어 줍시다. 그것도 잠자코 들어줍시다. 그것이 바로 치유의 은사인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남의 결점이나 잘못을 열을 올려가며 지적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상대방이 「역시 내가 잘못했다. 미안하다」고 솔직하게 자기의 잘못을 인정해 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성인(聖人)일 것입니다. 아무리 미국 사람들이 정직하다고 해도 그들도 역시 마찬가지더랍니다.
저희 아들이 타고 가던 차를 미국 사람이 받아 놓고도 말이 안 통하는 줄 알고 오히려 호통을 치더랍니다. 그래서 경우를 따지면서 한참 싸웠더니 그때야 얼굴이 붉어지며 미안하다고 하는데 진정으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여서 경찰을 불러 기어코 사과를 받아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미국사람이나 한국사람이나, 좋은 사람이나 고약한 사람이나, 오십보 백보의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상대의 잘못을 노골적으로 지적하여 승인을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당치 않습니다. 도리어 상대방은 자기의 지능 ,긍지,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마음의 문을 조개껍데기처럼 닫아 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설령 플라톤의 변증법을 가지고 설득하려고 해도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상처를 입은 것은 논리(論理)가 아니라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옳다는 판단이 섰다고 해도 그것을 설명하려고 접근했다가 오히려 내가 더 큰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때 상대는 「자기가 나보다 머리가 좋다. 잘 설득해서 자기의 마음을 바꾸어 보겠다」는 의도가 있다고 느껴져서 오히려 도전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태도는 상대방에게 반항심을 갖게 하고 전투 태세를 갖추게 만들어 주기 쉽습니다. 진정 남을 설득하고 싶으면 전혀 상대방이 눈치채지 않게 해야 합니다.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재치있고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 또 한가지 잊어서는 안될 점은 상대가 마음속으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이에 대한 변명을 늘어 놓을 때의 처신입니다. 대개 변명에는 과장과 거짓이 섞여 있는 법입니다. 그래도 변명을 듣고 즉시 반박하면서 화를 내어서는 안됩니다. 「아, 그런가」하고 잠자코 듣고 있노라면 상대는 마음속으로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자기의 체면 때문에 변명을 늘어놓을 것입니다. 그래도 잠자코 들어 주십시오. 그때 상대방은 「그 사람은 이해하더군」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말할 것이고 이쪽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는 감사와 호의를 갖게 될 것입니다. 한번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율법에는 돌로 치라(신22:23,24, 레20:10) 명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는가?"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것은 "치라" 하면 율법을 지키되 "사랑하라"한 법을 어기는 것이요, "치지 말라" 하면 율법을 범하는 것이므로 이래저래 궁지에 몰아 넣으려는 좋지 못한 음모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삼단논법으로 그들을 설득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요8:7) 하시고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다고 했습니다. 그때 저희가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다 물러가고 예수님과 여자만 남았습니다(요8:9). 예수님은 그들에게 애써서 설득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거기에 모인 많은 군중들이 얼마나 떠들었을지 안 보았어도 훤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묵묵히 다 듣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단 한마디 하셨을 뿐입니다.
우리는 나의 현명함을 과시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장 남을 설득시키고 잘못을 알게 하여 굴복시키려고 말아야 합니다. 만약 감정에 상처를 받으면 그때는 어떠한 논리로도 설득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상처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을 찾아가 설득시키려고 하지말고 그들에게 말하게 하고 되도록 말을 많이 들어 줍시다. 그것도 잠자코 들어줍시다. 그것이 바로 치유의 은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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