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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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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659회 작성일 17-10-04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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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자본주의, 진화론의 가교 역할을 한 맬더스 

진화론은 오늘날 진지한 과학이론으로 대접받고 있지만 과연 일이백년 뒤에도 그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실상은 과학보다 종교적 담론에 가깝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종교는 기독교도 이슬람도 아닌, 바로 이 진화론(혹은 다윈주의)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반박을 하려 들지 모르겠다. “진화론이 종교적 담론이란 건 당신의 독특한 해석일 뿐이고, 그냥 하나의 과학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진화론을 과학이라 철석 같이 믿고 있는 분들은 이 글을 꼭 읽어보시기 바란다. 결론부터 말하면 진화론은 과학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창조론이 과학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과학으로 오해받고 있는 이 담론이 모계제로 넘어가야 할 인류의 발목을 잡는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진화론은 성격이 이질적인 세 개의 퍼즐 조각으로 엉성하게 짜맞춰진 이론이다. 

1. 무생물에서 생물이 생겨났다. 
2. 단순한 생물이 점차 진화해 다양하고 복잡한 생물들이 탄생했다. 
3. 약육강식과 경쟁의 원리 속에서 적자만이 생존할 수 있다.

일단 1과 2가 합당한지의 여부는 차후에 살펴보도록 하겠다. 여기서 언급하려는 것은 1과 2로부터 과연 3이 도출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다양하게 개량된 비둘기 품종들 


다윈은 그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비둘기의 종자 개량을 취미로 삼고 있었다. 아득한 옛날부터 농부들은 가축이나 농작물을 기를 때 좋은 품종끼리 교배시켜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 내는 일을 해왔다. 그처럼 오랜 노하우가 집약되어 나타난 게 바로 비둘기의 종자 개량이었다. 개량된 비둘기들 중에는 공작을 닮은 녀석도 있었고, 핀치새를 닮은 녀석도 있었다. 일반적인 비둘기와 전혀 다른 생소한 울음소리를 내는 녀석들도 있었다. 이 모두가 평범한 야생 비둘기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었다. 

다윈이 ‘진화’를 비둘기의 품종 개량과 비슷한 현상으로 봤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는 공작새와 비슷해진 비둘기를 보면서 오랜 세월이 흐르면 진짜 공작이 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가정할 경우 선택을 하는 존재가 무엇이냐는 점이었다. 가축의 인위적인 선택은 농부들이 하지만 자연 상태에서 살아가는 동물은 어떤 존재가 선택을 하는 것일까? 다윈은 맬더스(Thomas Robert Malthus)의 <인구론>을 읽다가 답을 찾아냈다. 

맬더스는 인구와 식량의 관계에 대한 암울한 설명을 시도했다. 인구가 늘어나는 빠른 속도를 식량이 늘어나는 완만한 속도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식량이 부족해지는 시점이 오게 되는데, 다행스럽게도(?) 전쟁이나 전염병, 천재지변 등이 일어나 인구와 식량 사이의 불균형이 가까스로 해소된다는 논리였다. 

다윈은 맬더스의 논리를 진화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자연계의 동물들도 인간처럼 강력한 번식력이 있는데 포식자나 자연재해, 질병, 먹이부족 등으로 일정수 밖에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환경이 아주 불리해질 경우, 그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변이를 일으킨 녀석들만 살아남는데, 다윈은 이러한 현상을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라고 불렀다. 자연으로부터 선택받은 이 특성은 유전되어 새로운 종의 탄생으로 이어지며, 이것이 바로 진화라는 것이었다. 

관념 속의 자연과 달랐던 실제의 자연 

다윈이 전개한 논리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진화론의 ‘동물’이 실제 자연 상태의 동물과 다르다는 데 있었다. 동물의 세계에선 ‘공생’과 ‘협력’이 ‘경쟁’보다 훨씬 보편적인 가치로 자리매김해 있다. 같은 종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종들 사이에서도 그렇다. 크로포트킨도 <만물은 서로 돕는다>에서 이 문제를 거론한다. 수많은 학자들이 다윈이 말한 ‘경쟁’의 실제 사례를 찾기 위해 북아시아와 동러시아의 야생 지대를 헤집고 다녔지만 단 한 건도 관찰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동물들이 엄청나게 무리지어 사는 아무르나 우수리 지역에서도 동물 사이에 경쟁이나 투쟁이 벌어지는 사례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오히려 학자들은 동물들이 서로 협력하고 공생하는 현상만 무수히 관찰할 수 있었을 뿐이다. 

다윈도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가장 협력을 잘 하는 구성원들이 가장 번창하고 가장 많은 수의 자손을 부양한다”는 말을 남겼다. 다시 말해 가장 적응을 잘 하는 종들은 육체적으로 사납고 교활한 종들이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는 종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윈의 글은 어느 과학평론가의 말 맞다나 모호하고 장황하기로 유명했다. 그의 저술을 읽다보면 요점이 뭔지를 파악하기 힘든 경우가 많은데, 어떤 식으로도 해석될 여지를 남겨 놓는 불분명한 습성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다윈의 이론을 그의 추종자들이 특정한 의미로 좁혀 놓는 일이 일어났다. 자연을 “피에 굶주린 개체들이 벌이는 무자비한 투쟁의 장”으로 규정지어 버린 것이다. 다윈을 잇는 가장 뛰어난 진화론자라 불리는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1825~1895)는 한 논문에서 “동물의 세계는 검투사들이 보여주는 쇼와 거의 같은 수준이다... 가장 강하고 빠르며 교활한 놈이 살아남아 그 다음 날에도 싸우게 된다. 패자에게는 아무런 자비도 베풀지 않으므로 관객들은 굳이 엄지를 아래로 내릴 필요도 없다”면서 이는 원시인들도 예외가 아니라고 쓰고 있다. “삶은 끝없이 계속되는 싸움이며... 각자가 만인에 맞서 벌이는 홉스적인 의미의 전쟁이야말로 정상적인 존재의 상태이다.”

다윈이 모호하게 얼버무린 부분을 헉슬리가 깔끔하게 정리한 이 대목이 진화론의 기본 관점으로 대중의 인식에 깊이 각인됐다. 그러나 크로포트킨은 이것이 사실에 근거한 과학적 추론이 아님을 강조한다. 물론 자연계에서 루소적인 의미의 조화와 평화만을 보게 되지는 않지만, 도살장 같은 투쟁만 존재할 뿐이라는 주장은 더더욱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서로 싸우는 종들이 아니라 상호부조의 습성을 가진 동물들이야말로 자연의 적자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엿볼 수 있듯이 진화론은 초창기부터 과학적인 객관성에서 한 발짝 벗어나 있는 상태였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이론을 만들었다기보다 독특한 시대상이 빚어낸 사회적 편견을 색안경처럼 쓰고 자연을 바라봤다. 다윈 자신은 양심을 지닌 과학자로서 어느 정도 객관성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사회적 편견에 일정 부분 영향을 받은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열광적인 그의 추종자들에겐 최소한의 객관성마저 담보되어 있지 못했다. 

맬더스가 인구론을 집필하던 시대엔 자본주의가 뿌리를 내리면서 수많은 농부들이 도시로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었다. 귀족과 부르주아가 공유지를 사유화시켰기 때문이다. 근거를 박탈당해 농사를 더 이상 지을 수 없게 된 사람들은 유랑민으로 전락했다. 멀쩡한 농부들이 도시로 들어오면 거지나 매춘부, 도둑으로 변했다. 많은 지식인들이 현실을 개탄하며 공존의 가치를 역설했지만, 정작 목사였던 맬더스는 ‘열등한 인간들은 굶거나 병들어 죽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 그것이 대자연의 이치’라며 구빈활동의 무용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다윈이 맬더스의 글을 읽고 무릎을 치며 ‘열등한 자가 도태되는’ 인간사의 원리를 자연계로확장시켜 보편적인 과학 원리로 다듬어낸 것이 진화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종의 기원>이 나오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책이 맬더스의 <인구론>이었다는 점은 다윈 자신도 인정한 바 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톰 베델(Tom Bethell)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리는 다윈과 월리스(진화론의 공동 창시자)가 각기 갈라파고스 제도와 말레이 군도를 탐험하며 영감을 얻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두 사람에게 영감을 준 것은 디킨스의 작품에 묘사되는 그 시대의 치열한 경쟁, 파산, 빈민굴, 채무자 감옥이었다.” ***

 

동물의 상호 부조와 이타심이 본능에 속한다는 것은 실험을 통해서도 입증됐다. 서로 모르는 두 마리의 쥐를 우리 안에 가두고, 그중 한 마리를 공중에 매달아 놓으면 다른 쥐는 도움을 주려고 애쓰다가 막대기를 이용해 매달린 쥐를 구해준다. 매달린 쥐와 친족 관계도 아니고, 상대방을 도움으로써 생존에 이익을 보는 것도 아니지만 쥐는 동료를 구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실험도 있었다. 줄을 당기면 음식을 받을 수 있도록 훈련시킨 뒤에, 원숭이가 줄을 당길 때마다 다른 원숭이에게 전기충격을 가했던 것이다. 원숭이들은 동료 원숭이가 충격을 받지 않도록 며칠이고 굶는 쪽을 택했다. 

실험실에서 드러난 동물의 본성 

비교적 최근인 2011년에도 인상적인 실험이 사이언스지를 통해 소개됐다. 연구자들은 쥐 한 마리를 비좁은 플라스틱 관 속에 가두고 다른 한 마리는 자유로운 상태로 풀어놓았다. 관의 한 쪽 끝에는 밖에서 열 수 있는 문이 달려 있었다. 풀어둔 쥐는 관 속이 텅 비었을 때와 달리, 다른 쥐가 갇혀 있을 때는 초조해하며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쥐는 끈질긴 시도 끝에 마침내 문을 여는 방법을 알아낸 뒤 갇힌 쥐를 풀어줬다. 

연구자들은 쥐가 그런 행동을 하는 동기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기로 했다. 플라스틱 관 속에 장난감 쥐를 넣었더니 쥐는 문을 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살아 있는 쥐가 갇혀 있을 때는 달랐다. 심지어 문을 열었을 때 풀려난 쥐가 격리된 장소로 들어가도록 했을 때조차 쥐는 문을 열려고 했다. 이것은 쥐들이 어떤 보상을 기대하고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반론이 제기됐다. “풀려난 쥐가 격리된 장소로 가는지를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을 수 있다. 쥐는 그냥 함께 있을 동료가 필요했을 뿐 고통에 공감한 것은 아니다”라는 지적이었다. 

그러자 일본의 간사이 가쿠인대에서 그 부분을 확인하는 실험을 했다. 연구진은 투명 플라스틱으로 만든 두 개의 방에 각각 쥐를 한 마리씩 넣었다. 한쪽 방에는 물이 차 있어 쥐가 겨우 머리만 내밀 수 있었다. 마른 방에 있는 쥐는 두 방 사이의 빗장을 열어 물에 빠진 쥐가 자기 방으로 건너오도록 했다. 그런데 쥐들은 옆방이 물에 잠기지 않았을 때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연구진은 쥐의 행동이 동료의 고통에 반응한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심지어 쥐는 동료를 구하기 위해 먹이의 유혹도 물리쳤다. 연구진은 쥐를 가운데 방에 두고 한쪽 방에는 물에 빠진 쥐, 다른 쪽 방에는 쥐가 좋아하는 초콜릿을 뒀다. 쥐는 대부분 초콜릿이 있는 방문을 열기 전에 물에 빠진 쥐의 방문을 먼저 열었다. 쥐에게 두 개의 관을 보여준 실험도 비슷한 결과로 이어졌다. 한 쪽 관엔 동료 쥐가 갇혀 있고, 다른 쪽 관엔 초콜릿이 들어 있었다. 이때도 초콜릿보다 동료가 갇힌 문을 먼저 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초콜릿을 먼저 챙긴 쥐들조차 다른 쥐가 풀려나 초콜릿을 함께 나눌 수 있을 때까지 먹는 것을 보류했다. 

 
플라스틱 관의 문을 열고 동료를 구하는 쥐 


이러한 실험 결과들은 다윈주의자들의 주장과 모순된다. <이기적 유전자>를 써서 진화론의 아이콘이 된 리처드 도킨스에 따르면 모든 생물은 유전자의 조종을 받는 하수인에 지나지 않는다. 유전자들은 고도의 사기꾼들이어서, 자신들의 유일한 목적인 생존과 자기 복제를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고결한 감정들, 동정심과 사랑, 이타성이 하나 같이 유전자의 목적 달성을 위해 가장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순수한 이타성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타적인 사회를 건설하려 하는 모든 시도는 생물학적 원리에 어긋나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도킨스는 준엄하게 충고하고 있다. 

만일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실험실 속의 쥐는 유전적으로 아무 연관도 없는 동료를 위험 속에 방치함으로써 초콜릿을 독차지해야만 했다. 그러나 쥐들은 도킨스의 예상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행동을 했다. 게다가 이러한 실험 결과는 자연계의 관찰을 통해 알아낸 동물들의 습성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기도 했다. 

생명은 서로 돕는다 

동물계는 하등 동물에서부터 고등 동물에 이르기까지 서로 돕는 습성을 지닌 종들로 넘쳐난다. “앵무새 두 마리가 잡히면 비록 종이 다르더라도 우정을 맺고, 두 마리 가운데 한 마리가 죽으면 다른 녀석도 슬픔을 못 이겨 따라 죽곤 한다.” 눈 먼 사다새 한 마리가 동료들이 48킬로미터 밖에서 구해온 물고기로 연명하는 것이 관찰된 적도 있다. 

같은 종이 아닌 다른 종들 사이도 마찬가지다. 스페인에서는 제비들이 황조롱이나 솔딱새, 심지어 비둘기와도 함께 어울리는 모습이 관찰된다. 아메리카 극서 지방에서는 종이 다른 여러 종류의 새들이 커다란 군집을 이루며 살아간다. 군집에 참가하는 종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보다 고립되어 살아가는 종을 드는 편이 훨씬 쉽고 간단하다. 포유류는 집단을 이루지 않는 소수의 육식 동물보다 사회생활을 하는 종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크로포트킨은 다윈이 ‘개체들 사이의 극심한 생존경쟁’을 설명하면서 그 근거를 제대로 제시하지 않은 점을 지적한다. 같은 종 사이의 투쟁에 대한 사례가 전혀 없는데도 당연한 사실인양 전제하고 이론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밀접하게 연관된 종들 사이의 경쟁은 겨우 다섯 가지 예가 제시되는데, 그나마 그중 하나는 뒤에 가서 의심스러운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여기서 경쟁으로 묘사되는 내용이 사실은 전혀 경쟁이 아닐 수 있다고 말한다. 같은 종의 개체들 사이에서 실제로 경쟁이 벌어진 사례로 건기 동안의 남미 소들이 거론되지만, 이 사례는 길들여진 동물에게서 나온 것이라 자료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야생의 들소들은 똑같은 환경에서 경쟁을 피해 이동한다. 

크로포트킨은 다윈이 맬더스로부터 차용한 논거 자체에 의문을 표한다. 이것은 전혀 입증된 바가 없다는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에 말이나 소가 들어오고, 뉴질랜드에 돼지나 토끼가 건너와 급격히 증가했다는 사실은 맬더스 이론의 정확히 반대 양상을 보여준다. 수백만의 침입자들이 이동해 와서 충분한 먹이를 얻었는데도, 이전부터 살던 개체들은 전혀 굶주리지 않았다. 이는 개체수가 과잉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초원이 감당할 수 있는 수에 훨씬 못 미친다는 뜻이다. 이처럼 동물의 개체수가 부족한 현상은 일시적인 예외는 있겠지만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경쟁은 정상적인 자연 상태의 조건이라 보기 어렵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크로포트킨은 창조론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철저하게 사실에 입각한 과학적 관점만을 강조하며, 진화론을 지지한다. 단지 그는 진화를 왜곡된 관점으로 해석한 “다윈의 진화론”을 문제 삼고 있을 뿐이다.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리처드 밀턴은 <다윈도 모르는 진화론>에서 크로포트킨보다 좀 더 구체적인 반론을 제시한다. “현재 지구상에는 대략 2만 2천 종의 척추동물이 존재한다. 거기에 최소한 100만 종의 곤충들이 추가된다. 이중 수천 종은 생활공간과 식량을 위해 경쟁자를 죽이는 공격적인 경쟁을 벌인다. 특히 인간이 그렇다. 하지만 이런 종의 수는 극히 적다. 압도적인 다수는 싸우지 않고, 먹을 것 때문에 서로를 죽이지 않으며, 생활공간을 위해 패자가 죽어나가는 공격적인 경쟁을 하지 않는다.”

‘생존경쟁’의 용도폐기 

밀턴은 경쟁의 증거로 제시되어 온 사례들 중에 잘못 해석된 것이 많다고 말한다. “수컷 농게의 집게발 중 하나는 엄청나게 크다. 그 큰 집게발은 다른 수컷과 싸워서 짝짓기를 하고, 가장 좋은 영역을 쟁취하기 위한 무기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관찰 결과 큰 집게발은 싸움에 사용되지 않았다. 집게발은 동료 농게에게 먹을거리가 있다는 신호를 보내기 위한 것이었다. 전쟁의 도구와 거리가 먼, 사회적 협력의 도구였던 것이다. 공격적이리라 생각되던 속성과 행동이 나중에 자세히 관찰하면 사실무근인 예는 아주 많다.”

이러한 문제점은 심지어 다윈주의자들 내부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론상의 드라마틱한 반전이 일어나는데, 19세기 진화론의 중심 개념이던 ‘생존 경쟁’이 더 이상 진화에 기여를 못하거나 오히려 불리한 요소라며 거부를 당하게 된 것이다. 하버드 대학교 조지 심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부모가 다른 부모보다 자녀를 많이 낳는다면 진화는 붉은 머리카락 쪽으로 진행될 것이다. 왼손잡이 부모가 더 많은 자녀를 가진다면 진화는 왼손잡이 쪽을 향할 것이다. 특성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것은 누가 세대에 걸쳐 더 많은 후손을 남기는가다. 자연선택에선 후손을 많이 남기는 것이 적응이 된다. 다른 이들을 혼란스럽게 할지도 모르지만 사실상 유전학자들은 그렇게 정의하고 있다. 유전학자에게 적응이란 건강, 힘, 외모와 아무 관련이 없고 번식의 효율성에만 관련이 있다.” 

이렇게 되면 다윈주의는 사실상 동어반복이 되어 버린다. 예를 들어 기린은 목이 긴 특징을 갖고 있는데, 왜 그런 쪽으로 진화되었는지에 대해 진화론은 아무런 설명도 할 수 없다. 그냥 기린이 살아남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영국의 유전학자 워딩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연선택은 초기에는 실험이나 관찰을 통해 확인이 필요한 하나의 가설로 여겨졌지만 이후 면밀한 연구에 의해 일종의 동어반복임이 밝혀졌다. 예전에는 의미를 잘 인식하지 못했지만 자연선택은 불가피한 인과 관계를 서술한 것이었다. 한 개체군 안에서 가장 적응을 잘한 개체들은(즉 가장 많은 후손을 남긴다고 정의된 개체들은) 가장 많은 후손을 남길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렇게 서술을 해놓으면 그것은 명백히 참이다.” 

동어반복은 당연히 참일 수밖에 없지만 이런 식의 논리를 과연 과학이라 부를 수 있는 걸까. “다윈주의는 과학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가 진화론자들의 엄청난 압력을 받고 주장을 철회했던(그러나 죽기 직전 다시 번복을 했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다윈의 이론이 널리 받아들여진 이유가 최초의 무신론적 학설이었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 불교처럼 무신론이긴 하지만 인간의 본질과 기원에 대한 설명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종교성을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자본가들은 왜 진화론에 열광했는가? 

다윈의 시대는 낡은 기독교를 대체할 새로운 사상이 절박하게 요구되는 시기였다. 산업혁명으로 세상이 너무나 갑작스레 변했는데, 왠지 천국보다는 지옥을 연상시키는 분위기였다. 도시 인구가 폭발을 하면서 노동자들은 채광이나 하수도가 전혀 없는 초라한 지하실 방에서 살았다. 수도 시설이 부족한데다 공장의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 등으로 콜레라나 티푸스, 결핵 등이 맹위를 떨쳤다. 

이 당시 노동계급의 비참한 생활상은 ‘올리버 트위스트’ 같은 문학작품을 통해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복지 제도가 전무했던 1840년대 초 영국의 공업도시에서는 성인 남자의 대다수가 실직 상태였다. 인건비가 싸고 통제가 쉽다는 이유로 성인 대신 아동을 채용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공장에서는 6~7세 아이들에게도 하루에 12시간 내지 16시간의 노동을 시켰다. 바쁠 때엔 19시간을 일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새벽 3시에 나가 밤 10시가 넘어서야 퇴근했던 것이다. 당시 국회 청문회 기록을 보자. 

문) 19시간이나 일하는 사이에 휴식시간은 얼마나 주어졌습니까? 
답) 아침 식사에 15분, 점심에 30분, 음료수를 마시는 시간 15분입니다. 
문) 그렇게 극단적인 노동을 하는 아이들을 아침에 깨우는 게 힘들지 않았나요? 
답) 그렇습니다. 애들을 일터로 보내기 전에 몸단장을 시키기 위해 침대에서 내려오게 하려면 잠자고 있는 것을 안고 흔들어야 했습니다. 
문) 만약 그 애들이 조금이라도 지각을 하면? 
답) 노동시간이 가장 긴 때에도 짧은 때와 마찬가지로 쿼터를 당했습니다. 
문) 쿼터란 무엇입니까? 
답) 임금의 4분의 1을 깎는 것입니다. 
문) 얼마나 지각하면 쿼터를 당하나요? 
답) 5분입니다.
문) 아이들 중 누군가 이런 노동 때문에 사고가 일어난 일이 있나요?
답) 있습니다. 저의 큰딸이 처음 공장에 간 때였습니다. 그 애가 취직하고 나서 5주 정도 되었는데 프레임이 움직이고 있을 때 그 안을 치워내는 게 일이었습니다. … 감시인이 말을 걸었을 때, 톱니바퀴에 그 애의 집게손가락이 걸려 손가락 마디 아래서부터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 애는 5일 동안 진료소에 있었습니다. 
문) 손가락이 잘렸나요? 
답) 두 번째 마디까지 잘렸습니다. 
문) 그 동안 임금이 지불됐습니까? 
답) 사고가 일어난 뒤 임금은 정지됐습니다. 그날 임금은 4분의 1일치를 받았습니다. 
< 아동노동의 실태 조사를 위한 새들러 위원회 보고서> (1832) 

이러한 환경에 자본가들이라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을 리 없다. 그들이 다윈의 이론에 열광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기독교가 엉터리 신화였음을 암시함으로써 자본가들을 죄책감의 지옥에서 구원할 수 있었다. 잔인하고 냉혹한 투쟁이 생태계의 본질이며, 인간 또한 그러한 질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주장은 일종의 복음처럼 다가왔을 것이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 같아 찜찜했던 생활양식이, 섭리를 충실히 따르는 칭송 받아 마땅한 삶으로 새롭게 의미를 부여 받았던 것이다. 자본가들의 입장에서 볼 때 다윈의 진화론은 기독교를 너무도 멋들어지게 대체하는 담론이 될 수 있었고, 또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

 

다윈주의를 비판하면 어김없이 듣게 되는 소리가 있다. "그럼 창조론이 맞다는 건가?" 이 말과 동시에 창조론자로 낙인이 찍히기도 한다. “종교에 미친 광신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다윈의 이론을 비판할 수 있겠는가?”란 오만함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문제의 본질을 흐려놓을 뿐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창조의 진위 여부와 무관하게 과학으로서의 결격 사유를 갖고 있다. 

학문의 가부장적 질서 

원래 과학은 모계제적인 방식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었다. 이것은 매우 이채로운 현상이었는데, 학문이란 것 자체가 감성이나 직관보다 이성을 중시하는 부계제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부장적인 속성을 띨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활동이 스승과 제자의 수직적 상하관계를 통해 이뤄진다. 가르침은 쌍방향이 아닌 일방향으로 전수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런데 과학은 이러한 틀을 깨고 만민 평등의 개방성을 기치로 삼았던 것이다. 초창기의 과학자들이 수학과 실험을 중시한 이유도, 수학이나 실험은 간명한데다 일체의 권위도 개입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논리만 타당하면 누가 어떤 결론을 내리든 인정해 줘야 했다. 반면에 실험이나 관찰을 통해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지도 못하고 논리의 비약마저 심하다면, 아무리 권위 있는 존재의 주장이라도 수용이 되지 않았다. 이것은 지식의 유통 방식에 있어서 일종의 혁명적인 전환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전환은 “생산성”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이어졌다. 

이 점에서는 학문도 종교와 다를 것이 없었다. 모계제적인 원리를 도입하자마자 창의력과 잠재력이 폭발하면서 엄청난 에너지가 창출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과학을 위대하게 만들어 준 밑바탕으로 작용했다. 자연스레 과학은 인문과학과 사회과학 등으로 영역을 넓혀가게 됐다. 그러나 과학저술가인 마거릿 버트하임이 지적했듯이 과학은 점차 가부장적인 시스템으로 변질되고 있는 중이다. 대대적인 성공과 함께 모계제적 속성이 소멸되고 가부장적 속성이 빈자리를 대체했던 종교의 전철을 과학 또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자들 중에서도 다윈주의자들처럼 가부장적 성격이 강한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에미상을 수상한 빌 코티(Bill Cote) 감독이 1996년에 만든 <인류 기원의 신비>는 다윈의 이론에 의문을 제기한 다큐멘터리였다. 이 작품이 NBC에서 방영되었을 때 엄청난 비난이 방송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과학적인 논점에 대한 반박은 거의 없었다. ‘반지성적인 쓰레기’ ‘악마적인’ ‘똥 덩어리’ ‘의도적인 사기’ ‘창피한 줄 알아라, 거짓말쟁이 기회주의자들아!’ 이 말들은 모두 대학 교수를 포함한 중진 과학자들로부터 나왔던 것들이다. 

이 정도의 해프닝은 차라리 애교로 넘어갈 수도 있다. 리처드 밀턴은 <다윈도 모르는 진화론>에서 진화론을 비판한 과학자들이 얼마나 심한 불이익을 당하는지 구체적인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격하고 비이성적인 반응 때문에 다윈주의에 의문을 표하는 콘텐츠를 제작하는 것 자체가 방송이나 언론에서는 금기시 되어 있는 상태다. 

과연 이런 일들이 과학의 본연에 어울리는 것일까?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천동설을 믿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인신공격을 가하는 사람은 없다. 왜 천동설이 잘못된 주장인지를 조목조목 설명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 기원의 신비>가 공중파를 탔을 때 논리적이고 성의 있는 반론 대신, 감정적인 인신공격만 난무했던 이유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상대방을 납득시킬만한 반론을 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할 때, 인간은 분노하고 공격성을 드러낸다. 

증거가 될 수 없는 “증거”들 

아마 독자들은 다윈의 진화론이 무수한 과학적 근거를 갖고 있다느니 하는 식의 주장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을 것이다. “설령 이론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있어도, 엄청나게 많은 증거들로 뒷받침되기 때문에 이론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는 식의 주장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소위 “증거”들의 대부분은 사실상 증거가 될 수 없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진화에는 ‘소진화’와 ‘대진화’가 있다. 늑대는 인간과 살면서 개로 변했지만, 늑대와 개는 서로 교배가 가능하다. 이처럼 일정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작은 변화를 소진화라 한다. 반면에 대진화는 어류가 양서류로 변한다든지 하는, 다른 차원으로의 변화를 말한다. 애초에 다윈이 소진화를 관찰하다가 진화론을 창안한 것이므로, 진화론의 증거로 소진화 현상을 제시하는 것은 중언부언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소진화가 아니라 대진화라 할 수 있다. 진화론자들은 “소진화가 쌓이고 쌓이다 보면 대진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해왔지만, 그런 식의 막연한 주장을 ‘과학’의 이름으로 하려면 마땅한 근거가 필요하다. 그런데 진화론자들이 ‘증거’로 제시하는 것들의 대부분이 소진화의 증거들이다. 정작 중요한 대진화의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1세기가 넘게 숱한 실험들이 거듭됐음에도 불구하고 대진화를 입증할 만한 결과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지난 수천 년 동안 가축의 종자개량이 무수히 시도되어 왔음에도, 종을 뛰어넘는 개량이 성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검은 색 꽃을 만들면 일확천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200년 넘게 교배를 거듭해 왔지만, 아무도 그 일을 해내지 못했다. 개도 인간의 요구에 따라 극도로 다양하게 개량되어 왔지만, 아무리 변신을 거듭해도 개는 개일 뿐이었다. 자연의 세계에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변화를 차단하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새롭게 제시된 돌연변이 카드 

다윈도 이러한 장벽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인간이 키우는 동식물과 달리 야생 상태의 종은 장벽을 충분히 뛰어 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진화론자들은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진화론은 20세기 초에 내용을 대폭 수정하게 된다. 종전의 일반적인 변이로 진화를 설명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 무렵 발견된 ‘돌연변이’ 현상을 끌어들여 새로운 설명을 시도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생명체가 돌연변이를 통해 자연의 선택을 받으며 진화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생각만큼 간단치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만일 어떤 과학자가 돌연변이 실험을 통해 진화를 입증해낸다면, 과학계의 영웅으로 부상하는 것은 따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었기에 수많은 이들이 이 야심찬 과업에 뛰어들었다. 실험 대상으로 인기 있는 동물은 초파리였다. 초파리는 수명이 2주 밖에 안 되는데다 수백 개의 알을 낳는다. 염색체도 겨우 4쌍 밖에 되지 않아서 이런 실험을 하기엔 이상적인 동물이었다. 초파리 실험은 100년 전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온갖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되어 왔다. 

1926년에 엑스선이 유전자의 돌연변이를 유발한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실험은 한층 탄력을 받게 됐다. 초파리에게 엑스선을 쪼이면 돌연변이가 자연 상태보다 150배나 빨리 유발됐기 때문이다. 초파리가 아닌 새로운 종이 탄생하면서 진화가 입증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돌연변이가 된 초파리들은 대부분 금방 죽어버렸다. 어렵사리 돌연변이를 유전시켜도 돌연변이끼리 교미시키면 다시 정상적인 초파리들이 부화되곤 했다. 초파리를 이용한 실험은 모두 그렇게 실패로 끝났다. 

중간 단계는 있는 건가, 없는 건가? 

그뿐이 아니었다. 화석의 발굴 또한 다윈의 예상과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다. 다윈은 진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수많은 중간 단계의 화석이 발견되어야만 했다. 

예를 들면 어류(의 전 단계)에서 작은 변화들이 무수히 축적되어 양서류로 진화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사실 어류와 양서류 사이에는 메우기가 만만치 않은 간극이 존재한다. 일단 척추의 구조 자체가 다르고, 어류에 없는 골반이 양서류에겐 있다. 또 지느러미가 변해 손가락과 발가락을 가진 팔다리로 변해야 하고 아가미는 폐로 변해야 한다. 

다윈의 주장은 이 모든 변화가 느린 속도로 아주 조금씩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론상으로는 어류도 양서류도 아닌 어중간한 생명체가 다양하게 나와 양쪽의 간격을 자연스레 메워줘야 한다. 어류를 90%, 양서류를 10% 닮은 어떤 동물이 시간이 가면서 ‘어류 80 양서류 20’으로 변하고, 이게 다시 ‘어류 70 양서류 30’, ‘어류 60 양서류 40’… 하는 식으로 나가다가 마침내 ‘어류 0 양서류 100’에 이르면 완전한 양서류가 탄생한다는 논리이므로, 어류와 양서류 사이에 수많은 중간 종들이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단 현존하는 생태계에선 이처럼 어중간한 생명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어류면 어류고 양서류면 양서류지 ‘어류 같기도 하고 양서류 같기도 한’ 동물은 없다. 어느 것 하나도 연속적이지 못하고 죄다 단절되어 있다. 화석을 보면 단절은 더욱 심해진다. 모든 게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것처럼 보인다. 

< 종의 기원>에서도 이 문제에 관한 다윈의 고민이 토로된다. “발견된 모든 화석을 모아도 생물의 변화와 점진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그런 증거가 없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내 이론을 압박하는 수많은 반대 의견 중에서 가장 명백하고 강력한 것이다. (중략) 지질학적 기록은 대부분의 지질학자들이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불완전하다고 가정하는 것만이 이러한 질문과 엄청난 반대에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때만 해도 발굴의 초창기여서 다윈은 자신의 이론을 입증할 화석들이 결국 언젠가는 쏟아져 나오리라 믿고 있었던 것이다. 

< 종의 기원>이 나온 지 이제 150년이 지났고 그동안 발굴이 줄기차게 시도되었지만 다윈의 기대는 끝내 충족되지 못했다. 이 와중에도 “중간 단계 화석은 존재한다!”고 외치는 진화론자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중간 단계 화석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진화론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돌이킬 수 없는 증거”가 존재한다고 강변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패턴은 거의 비슷하다. 논란의 여지를 줄이는 의미에서 진화론자들의 견해만 인용해 보겠다) 

이 경우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보면 어느 쪽이 진실을 말하는지를 알 수 있다. 다윈주의자들이 증거로 제시하는 “중간 단계의 화석”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희귀하다. 게다가 그 얼마 안 되는 사례들 중에 어느 것 하나도 논란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없다. 예를 들어 오리너구리는 한때 조류와 포유류의 중간 단계로 간주됐지만, 진화론자들도 더 이상 진화의 증거로 제시하지 않는다. 오리너구리의 화석은 포유류 중에서도 늦은 시기에, 완전히 진화된 상태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다윈에 따르면 현존하는 종의 수보다 훨씬 많은 중간 단계 화석들이 나왔어야 한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화석 몇 점을 궁색하게 주워들고 중간 단계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한 마디로 낯간지러운 일이다. “중간 단계 화석은 존재한다!”는 말 자체는 진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종합적인 사고력이 부족해 핵심이 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경우가 아니라면, 알고도 모르는 척 양심을 저버린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진실성이 결여된 태도에 진화론자들 사이에서도 반발 기류가 조성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윈을 포기한 진화론자들 

1980년 10월에 160명의 고생물학자, 해부학자, 유전학자 및 발생생물학자들이 시카고에 모여 다윈의 진화론을 포기하고 새로운 진화론인 ‘단속평형(斷續平衡 Punctuated equilibrium)설’을 받아들이기로 결의한 적이 있었다. 

‘단속평형’이란 말은 생물이 오랜 기간 평형 상태를 유지하다가 어느 순간 밸런스가 급격히 무너지면서 대진화가 일어났다는 뜻이다. 진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났다고 보는 다윈의 주장을 결국 뒤집은 것이다. 이러한 이론이 나온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종과 종 사이의 중간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적 이유 때문이었다. 

단속평형설의 주창자인 엘드리지는 “고생물학자들이 그동안 점진적 진화를 거친 화석 종들을 찾고자 노력했으나 대부분 실패했으며, 반박의 여지가 없는 놀라운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화석에 나타난 종들은 여러 시대의 지질연대를 거치면서도 종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속평형설의 또 다른 주창자인 굴드도 1993년 <내추럴 히스토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대부분의 종은 불변하며, 진화를 하지 않는 이러한 현상이 오랜 기간의 지질연대 층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은 모든 고생물학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다만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을 뿐이다. 그 이유는 화석종의 불변성이 진화가 일어나지 않았음의 증거가 되기 때문에 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다윈의 이론과 상반되므로 흥미 없는 연구결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단속평형설은 중간단계 화석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설명 말고도 또 다른 이점을 갖고 있다. 만일 다윈의 진화론이 옳다면 진화는 지금도 진행이 되어야 하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관찰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오지를 샅샅이 뒤져도 중간 단계의 동물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 진화는 현재 완전히 중단된 상태다. 바로 이 점에 대해서도 단속평형설은 해답을 제시할 수 있다. 지금은 진화가 “평형”을 이룬 정지 상태라는 것이다. 

단속평형설의 문제점은 “급작스러운” 진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현대 진화론의 권위자인 에른스트 마이어(E. Mayr)는 “과격한 돌연변이에 의한 유전적 괴물들이 살아남을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이 괴물은 자기한테 맞는 짝을 찾아 번식을 함으로써 독자성을 확립해 나가야 하는데, 이는 극복이 거의 불가능한 장애요소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저명한 생물학자인 린 마굴리스도 “돌연변이의 축적으로는 새로운 생물 종은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장기나 조직조차 만들어낼 수 없다.”는 말을 했다. 결국 다윈의 진화론은 진퇴양난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

 

이제 진화론의 가장 아이러니하면서도, 좀처럼 공론화가 되지 못했던 부분을 살펴볼 때가 됐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진화론은 이질적인 세 개의 퍼즐 조각을 엉성하게 끼워 맞춘 이론이다. 

1. 무생물에서 생물이 생겨났다. 
2. 단순한 생물이 점차 진화해 오늘날의 다양하고 복잡한 생물들이 됐다. 
3. 인간은 약육강식의 원리 속에서 적자만이 생존할 수 있다. 

2와 3이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는 설명했으니 마지막으로 1을 보도록 하자. 얼핏 1은 진화론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치명적인 부분처럼 보인다. 1이 통과가 안 되면 2와 3은 하나마나 한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중매가 들어왔는데, 학벌, 집안, 외모 모두 출중하지만 성별만 아직 확인이 안 되고 있다.. 뭐 이런 한심한 얘기와 비슷한 형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에 관한 연구는 진화론의 역사에서 아주 뒤늦게야 시도됐는데, 그 이유는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고 우선 1이 안고 있는 문제점부터 살펴보자. 

생명의 기원 문제 

현대 과학에서 생명은 오직 생명체에 의해서만 생겨나는 것으로 정의되어 있다. 무생물에서 생명이 생겨나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화론은 이러한 원리에 상반되는 주장, 즉 최초의 생물이 무생물에서 생겨났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까마득한 태고의 원시 대기는 지금과 전혀 달랐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실험을 통해 생명의 탄생이 가능함을 ‘입증’했다고 주장한다. 수증기와 수소, 메탄, 암모니아 등을 적절히 섞어 원시 대기와 비슷한 상태를 만들고 전기 방전을 일으켰더니 생명의 기본 물질인 아미노산이 생성됐다는 것이다. 

이 실험이 과연 적절한지에 대해 수많은 의문점들이 지적됐다. 일례로 번개를 재현했다는 방전의 경우 2백도의 열이 발생했는데, 자연 상태의 번개는 열이 3만도에 이른다. 생명은 아주 민감해서 미세한 온도 차이로도 생존의 여부가 갈리곤 한다. 2백도와 3만도의 차이는 분명히 지나친 면이 있다. 게다가 번개는 순간적으로 작용하지만 실험실 속의 방전은 지속적으로 행해졌다. 

설령 원시대기에서 아미노산이 우연히 생성됐다 쳐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아미노산이 서로 결합해 단백질 분자가 생겨나야 하는데, 이 일은 실험실에서 재현된 적이 없고, 어떤 과정을 거쳐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설명되지 못했다. 또 단백질 분자가 형성됐다 해서 생명체가 저절로 탄생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성격이 전혀 다른 문제다. 

생명체는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고, 단백질은 다시 아미노산으로 구성되어 있다. 실험실에서 아미노산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해서, 그런 아미노산들이 저절로 뭉쳐 단백질을 이뤘을 거라고 가정하는 것은 비약이다. 아미노산이 벽돌이라면 단백질은 건물처럼 복잡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얼마나 무리한 가정인지 리처드 밀턴이 <다윈도 모르는 진화론>에서 설명한 내용을 간추려 보자. 

MIT의 머레이 이든 교수는 단백질 분자의 크기와 복잡성을 고려할 때, 하나의 간단한 단백질이 우연히 합성될 가능성은 10억년에 한번 꼴이라고 계산했다. 지질학자들이 말하는 지구의 역사는 46억 년이니, 얼핏 보기엔 단백질이 우연히 생겨났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46억 년 중에 생명체 탄생의 전제 조건인 바다의 생성이 38억 년 전에 있었다. 생명체가 처음 생겨난 것은 32억 년 전이므로 결국 6억년 정도의 시간이 남는 셈이다. 게다가 최근에 발굴이 진행되면서 생명체의 최초 탄생 시기를 38억 년 전까지 앞당겨야 한다는 연구 결과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38억 년 전에 바다가 생겨난 뒤 곧바로 생명체가 탄생했으니 아미노산이 모여 단백질을 이룰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는 얘기다. 

정보이론 과학자인 허버트 요키는, 100개의 아미노산을 가진 하나의 단백질이 자생적으로 합성될 확률이 분의 1에 불과하다는 계산을 내놓았다. 메사추세츠 공과대학교의 로버트 사우어와 그 연구진도 역시 이 확률을 분의 1이라고 확인했다. 분의 1이란 확률은, 길 가다 주운 복권이 1등으로 당첨되는 일이 천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되풀이 될 확률과 같다. 

설령 이런 일이 기적적으로 일어나 단백질 분자 하나가 기어이 합성됐다 치자. 이것이 간단한 원시 세포를 이루려면 더 험난한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분자 하나만 가지고는 세포를 구성할 수 없고, 우연히 여러 개의 분자들이 생겨나 뭉쳤다 해도 거기에서 저절로 생명이 탄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DNA 구조를 밝혀 노벨상을 수상한 프랜시스 크릭이 “화학진화에 의해 생명체가 자연 발생할 확률은 전혀 없다”는 이유로 생명의 외계기원설을 주장했겠는가. 

다윈은 창조론자였다? 

이 문제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는 것은 다윈이 공식적으로 창조주의 개입을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종의 기원>의 마지막 결론 부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생명은 최초의 창조주에 의해 (by the Creator) 소수의 형태로, 또는 하나의 형태로 모든 능력과 함께 불어 넣어졌다...” 

왜 진화론이 생명의 기원이란 결정적인 문제를 가장 뒤늦게 다뤘는지 이 대목에서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다윈은 최초의 생명이 “창조주에 의해 창조됐다”고 말하고 어물쩍 넘어갔던 것이다. 오늘날의 시각에선 납득이 참 안 가는 일이지만, 다윈은 진화론자인 동시에 창조론자이기도 했던 셈이다. 

이 부분에 대한 진화론자들의 입장은 어떨까? <종의 기원>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성직자들의 압력을 견디다 못한 고육지책이었다고 항변하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역사적으로 진리를 발설한 과학자들은 화형을 면치 못했다. 다윈도 화형을 피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이 문구를 삽입했다.”는 어느 열성 진화론자의 주장도 블로그를 통해 볼 수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화형을 당한 과학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 브루노라는 사상가를 떠올린 것 같은데, 브루노의 직접적인 죄목은 신학적이고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계몽주의가 휩쓸고 지나간 이후 세대의 인물인 다윈이 화형을 걱정을 했을 리는 만무하다. 게다가 이 시기는 지성인들 사이에 자유주의 신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기독교의 창조설화를 문학적 은유로 여기는 분위기가 대세였다. 자유사상가들은 반기독교적인 주장을 거침없이 하고 다녔다. <종의 기원>이 나오고 이듬해에 있었던 윌버포스 주교와의 논쟁에서 다윈의 대변자였던 헉슬리가 일약 스타로 부상하고, 1년 동안 영국의 <더 타임스>에 두 사람의 진화-창조 논쟁이 연재됐으며, 결과를 헉슬리의 승리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있었다는 점 등은 다윈이 성직자들의 눈치를 볼 이유가 과연 있었는지를 의심케 한다. 

다윈이 동료 과학자에게 보낸 편지를 “압력”의 근거로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1863년에 다윈이 “창세기적 관점을 이용해 여론의 비위를 맞추었던 것을 오랫동안 후회해왔다.”고 말한 편지 구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도 부적절하긴 마찬가지다. 다윈은 그 뒤로도 <종의 기원> 수정판을 계속 냈지만 후회했던 그 문구를 끝내 손보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무려 20년의 시간이 있었는데도 계속 방치를 했던 것이다. “창세기적 관점을 이용해 여론의 비위를 맞추었다.”는 구절은 약간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다윈이 눈치를 본 대상은 통설처럼 기독교 성직자들이 아니라, 동료 과학자들이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성직자들보다 두려웠던 과학자들 

다윈이 ‘창조주’ 문구를 삽입한 건 <종의 기원> 2판부터였으며 마지막 6판까지 그 상태를 유지했다. 문제의 2판은 1860년에 나왔는데, 이 무렵 프랑스에선 이른바 자연발생설 논쟁이 여론의 뜨거운 조명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 논쟁은 <종의 기원>의 내용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으므로 다윈이 어떤 식으로든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파스퇴르의 유명한 백조의 목 플라스크. 구부러진 관으로 공기는 유입됐지만 미생물은 통과하지 못했고, 멸균된 수프는 변질되지 않았다. 이 실험을 통해 파스퇴르는 기나긴 자연발생설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자연발생설’이란 생명이 무생물에서 생겨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유물론적 과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프랑스에서는 가톨릭을 부정하는 공화주의자들의 견해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당시 프랑스에서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루이 나폴레옹이 가톨릭과 보수 세력의 지원을 받아 공화주의자들을 탄압하고 있었다. 게다가 프랑스는 과학자들을 정부에서 조직적으로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가 과학에 적잖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종의 기원>은 유물론적 관점이어서 프랑스에 소개됐을 때 자연발생설 지지자들로부터 우군의 대접을 받았다. 이 분위기를 타고 생물학자였던 펠릭스 푸셰가 자연발생설을 지지하는 실험 결과를 발표하는데, 이 책이 격렬한 비난의 타겟이 되고 말았다. 결국 <종의 기원> 2판이 나오던 해에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논란을 종식시킬 논문을 현상 공모하게 된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이 죄다 자연발생설의 비판자들이었으므로 결론은 미리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고, 유명한 “백조의 목” 실험을 소개한 파스퇴르의 논문이 당선작이 됐다. 

다윈은 자연발생설이 과학계의 거센 반발에 직면한 상황을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적 관점을 이용해 여론의 비위를 맞추었다”는 말에서의 “여론”은 성직자들이 아니라, 프랑스의 과학자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생명의 기원처럼 정확한 과정을 파악하기 어려운데다, 정치적으로 민감하기까지 한 사안은 과학 외적인 요인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순수한 과학 이론으로 남기가 그만큼 어렵고, 유사 과학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훗날 자연발생설을 부활시키면서 진화론의 기초가 된 오파린의 가설도 처음부터 끝까지 정치적인 수사로 가득 차 있다. 

창조와 진화는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다윈이 ‘창조주’ 문구를 삽입한 뒤 방치한 것은, 그 부분을 그만큼 대수롭잖게 생각했다는 뜻도 된다. 진화론자들 중에선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이 애초부터 생명의 기원과 무관한 이야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찌 보면 이 주장이 가장 합리적이고 냉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진화론이 발표됐을 때 영국의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이 환영의 의사를 밝혔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윈이 창조의 섭리를 밝혀낸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졌던 것은 창조론과 진화론 모두 하나의 단일한 관점이 아닌 탓이 크다. 창조론의 경우를 보자. 기원전 4004년에 흰 수염을 기른 백발의 창조주가 6일에 걸쳐 세상만물을 만들었다고 보는 극단적 창조론은 주류 이론이 아니었다. 지구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대격변이 일어났으며, 그때마다 모든 생물이 멸종된 후에 다시 창조가 되풀이됐다는 연속 창조론이 주류에 가까웠다. 태초에 단 한 번의 창조가 있었으며 나머지는 다윈의 원리에 의해 진화를 거듭했다고 보는 창조론자들도 있었는데, 이 경우 다윈의 입장과 사실상 별다른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처럼 다윈이 활동하던 시절엔 창조론과 진화론을 적절히 뒤섞은 타협적 이론이 인정을 받았었다. 

그뿐 아니라 진화론자들 중에서도 유신론적 진화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신이 최초의 생명체에 진화의 능력을 부여해서, 지금의 다양한 생명체들이 생겨났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의 ‘신’이란 수염 기른 백발의 노인이 아닌, 우주의 섭리나 생명력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 경우 과학과 크게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양쪽 진영에는 목소리가 큰 극단주의자들이 득세를 하게 됐고, 지금처럼 소모적이고 부적절한 진화-창조 논쟁이 촉발되었던 것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사실상 이 두 부류는 편협한 관념의 틀에 갇힌 나머지 합리성과 객관성을 상실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광 조지 부시와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마치 기독교와 이슬람을 대표하는 인물인 양 대립했지만 사실은 둘 다 권력에 굶주린 속물들이었던 것과 비슷한 양상이라 하겠다. 

기독교에 극단적 창조론자들이 있다면 진화론에는 도킨스로 대표되는 환원주의자들이 있다. ‘환원주의’란 세상 만물을 분자와 세포 같은 물질로 모조리 환원시켜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일종의 철학적 관점이다. 인간의 정신세계나 영적인 현상도 모두 물질의 작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환원주의는 유물론과 동전의 앞뒷면 같은 관계를 이루며 과학의 가부장적 속성을 대표한다. ‘영혼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물질만이 전부이며 정신은 물질의 작용일 뿐이다!’ 같은 주장들은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독단적이기 때문이다. 

물질이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들은 너무나 많이 존재해서, 소위 과학자란 사람들이 어떻게 이 많은 연구 사례들을 모른 척 외면할 수 있었는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대표적인 사례로 장(field)을 들 수 있다. 장이란 개념은 19세기 중반에 전기와 자기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원래 과학자들은 물질이 당구공처럼 서로 부딪혀 영향을 미친다는 뉴턴의 역학적 세계관을 신봉하고 있었다. 사실은 뉴턴이 발견한 중력도 자신의 역학적 세계관에 딱 들어맞지는 않는 것이었다. 중력은 물질이 서로 부딪혀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을 통해 전달되는 힘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창기에 중력은 마술적인 세계관이란 이유로 과학자들의 비판을 많이 받았었다. 

환원주의로 설명되지 못하는 장 

19세기가 되어서야 전기와 자기의 관계를 연구하던 마이클 패러데이가 빈 공간을 통해 영향력이 전달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장이란 개념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전자기장이나 중력장 등은 모두 물체의 주변에서 영향력이 행사되는 영역을 말한다. 그런데 미국의 물리학자인 데이비드 봄(David J. Bohm)이 전자기장을 완전히 제거한 공간에 전자를 보냈을 때 놀랍게도 이 전자가 휘어지는 현상을 관찰했다. 이는 전자기장보다 미세하고 근본적인 또 다른 장이 존재함을 암시했다. 텅 빈 공간이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가득 차 있다는 얘기였다. 처음에 과학자들은 이 실험 결과를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그 뒤로도 비슷한 실험들이 계속 재현에 성공했다. 이러한 장은 생명체의 주변에도 당연히 존재하며, 정보로 가득 차 있어 세포의 활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실험 결과가 1세기 전부터 수많은 과학자들에 의해 계속 발표되어 왔다. (이 부분은 뒤에 가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이제 과학자들은 물질이 생성되기 이전에 먼저 에너지의 장이 존재했다는 이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에너지장의 정보에 의해 물질이 창조됐다는 것이다. 진화는 물질이 아닌 장의 차원에서 이뤄지며, 종의 완성된 형태가 물질로 표현되기 때문에 당연히 물질계에서는 중간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물리학과 생물학에서 얻어진 연구 결과들은 창조와 진화의 이분법적 사고가 역시 부적절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관점이 창조론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에너지장이 물질을 창조한다고 할 때의 ‘창조’는 창세기에서 언급되는 ‘창조’와 의미가 다른데다, 에너지장 자체도 진화의 산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창조와 진화의 구분이 사실상 무의미해지며, 생명은 창조와 진화가 복잡하게 뒤얽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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