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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와 엘림(출15: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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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회
댓글 0건 조회 5,257회 작성일 07-08-12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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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사건을 통하여 다시 한번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체험한 이스라엘은 기쁨과 감격에 복받쳐 하나님을 찬양했었습니다.(출15:1-21) 이제 그들은 고난 끝, 행복이 시작되는 줄 알았습니다. 억압의 시대는 가고 자유의 시절이 온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사람의 생존에 제일 요소인 물 문제로 또 다시 죽을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수르광야를 거쳐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22절) 물론 물이 귀한 지역이기 때문에 예상은 했겠지만 불볕에 시달리는 그들에게 마실 물이 없다는 것은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절망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배는 좀 고파도 견딜 수 있지만 우리 몸의 주 구성성분인(70%) 수분이 없으면 말라죽는 식물처럼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6.25 당시 몸에 포탄 파편을 아홉 군데나 맞고 고통당할 때 상처의 고통보다 물을 먹으면 안 된다는 처방 때문에 얼마나 목이 말라 애탔는지 모릅니다. 너무 너무 목이 타 들어가 먼지투성이인 방을 닦아낸 걸레를 몰래 끌어안고 그것을  삼키며 견디어 내 보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목이 말라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을 모릅니다. 저는 광야에서 물이 없어 허덕이던 이스라엘 민족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그러한 고통 중에 발견한 곳이 마라였습니다. 마라란 소태같이 쓰다(Bitter)는 뜻입니다. 물을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달려가서 정신없이 얼굴을 물에 박고 꿀꺽꿀꺽 마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또 웬일입니까? 갈증이 해소되기는커녕 오히려 속에 있는 것조차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너무 써서 구토했을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이스라엘 앞에 또 왜 이런 시련이 왔던 것입니까?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1.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24절)
대부분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당하면 어떻게든 협력해서 극복하려는 생가보다는 서로 원망하며 죽어가면서도 남을 탓하는 삐뚤어진 심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정적 심리가 긍정적 심리로 바뀌어지는 것이 기독교적 인생관입니다. 성공 다음에 실망은 충격이 더 큰 것입니다. 자유의 시절이 왔다고 감격했던 이스라엘에게 이러한 예기치 못했던 생체적(生體的) 고통은 더 참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또 지도자 모세를 향해 원망을 터뜨렸습니다. 오늘날도 대부분 지도자의 고충을 이해하기 보다는 쉽게 트집과 원망을 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상호 이해가 상충될 때 극렬한 노사 분규가 일어나고 군대에서도 하극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들의 성난  감정은 모세를 원망한 것 같으나 사실은 하나님을 향한 화살이었습니다. 그들은 전능자에게 불평과 원망보다는 눈물로 호소(간절한 기도)했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고난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까?(약1:2-11)
(1) 먼저 고난(시련)을 기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오는 시련은 어떠한 시련도 결국 우리에게 유익하게하기 위함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윗도 시험당할 때는 죽을 맛이 있지만 시험 당한 후에 무엇을 깨달았습니까?(시119:71절) 성도의 고난은 운동선수나 군인들이 받는 훈련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2)지혜를 구해야 합니다(약1:5절)
고난당할 때일수록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짜내야 합니다. 지혜란 주신 것을 관리하는 능력이요, 더 받을 수 있는 바탕(그릇)입니다.
(3)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6절)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누구의 도움이 컸습니까? 그렇다면 겸손하게 다시 한번 그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공연한 의심과 불평은 금물입니다. 그런 사람은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 겸손해 집니다. 낮아집니다. 낮아져야 전능하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합니다. 어린아이가 아예 어머니만 의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출애굽기 15장에서 시련과 축복을 받아들이는 삶의 법칙을 깨달아야 합니다.

2. 쓴물을 단물로 바꾸게 하신 하나님
이스라엘은 길을 잘못 들었던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길을 가는 동안 겪어야 했던 고통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라고 그런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행로 자체가 수르광야와 비교되는 무미건조하고 물 없는 사막 길과 같은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런 고통을 통해 하나님과 더욱 접근 되었던 것처럼 우리는 늘 평안만 하면  아마 예수 믿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천국은 아무에게나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라는 일반적으로 인생의 쓴 경험을 상징합니다. 룻기서에 보면 모압에서 고통당했던 나오미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나를 나오미(희락)라 하지 말고 마라(괴로움)라 하라”(룻1:20)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더욱 평탄한 길로 인도하실 수도 있었지만 이러한 길로 인도하신 이유는 그들을 시험코자(훈련코자)함이었다고 말씀했습니다.(25절)) 신약성경에도 보면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기적과 능력을 행하게 하셨습니까? 그러나 바울을 괴롭히는 지겨운 육체적 질병을 치료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이유를 깨달은 바울은 내가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너무 크므로 자고(自高)하지 않게 하시려고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12:7)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런 쓴 훈련을 시키시고 부르짖는 모세의 기도를 들어 주시어 쓴물을 달게 바꾸어 주셨습니다. 어떻게 달게 바꾸어 주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신 나뭇가지였습니다. 실제로 지구상에 쓴 물을 달게 만드는 나무나  식물이 있다고 합니다. 인도에 있는 넬리마라, 페루널리(perru nelli), 미국 플로리다 주에 있는 사사 프라스, 페루 예르바에 있는 카니아니등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떤 나무도 현재 시나이 반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신비주의라고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정결케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한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신앙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고, 모세에게는 다시 한번 순종의 중요함을 일깨워 주셨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의 말씀만 순종하면 쓴 맛의 인생이 단맛으로 변하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6절에서 하나님은 또 무엇을 일깨워 주셨습니까?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인생살이가 왜 이렇게 쓴맛이냐고 실망스러울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에게는 고난 중에도 치료의 역사가 있음을 이 역사적 사건을 통하여 실감하시고  염려하지 마십시요.
우리에게는 육체적인 질병도 문제이지만 영적 질병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병은 예수 안에서만 완전한 치료가 가능한 것입니다.

3. 마라에서 엘림으로(출15:27)
마라의 고비를 겪은 그들은 이제 어디에 도착했습니까?
사막의 오아시스 엘림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물샘 열둘이 있었습니다. 뜨거운 햇볕을 가리워 줄 수 있는 종려 70주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습니다. 그곳에 와서 신선한 물을 실컷 마시고 그곳에 장막을 치고 머물 때 얼마나 평안했을까요? 그 기분 상상 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①인생길에는 마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준비하신 평화와 사랑의 그늘과 쉼이 있는 엘림도 있습니다.
②마라에서 엘림은 멀지 않았습니다
고난의 고개가 힘듭니까? 얼마 안 가서 내리막길이 있습니다. 터널을 지나면 더 밝고 더 시원하고 상쾌한 산하(山河)가 앞에 있습니다. 힘드십니까? 바로 앞에 있는 행복의 동산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③하나님은 엘림을 준비 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마라를 통과 한 후 엘림에 도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기적만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영원한 엘림인 하나님나라를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그곳만이 영원한 엘림 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엘림을 향해 낙심하지 말고 믿음의 행군을 계속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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