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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와 만난 야곱 가족(창46:28-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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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회
댓글 0건 조회 4,676회 작성일 07-01-14 13:33

본문

오늘 본문은 드디어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아마 이것은 우리나라 남북이산 가족 상봉 이상으로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죽은 줄만 알고 있던 라헬의 소생인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었으니 꿈만 같은 일이었습니다. 17세때 헤어져(37:2) 무려 22년만에 애굽과의 국경지대인 고센에서 만나 목을 끌어 안고 울었다고 했습니다. 요셉이 이주 온 가족들을 고센 땅에 머물게 하려 했던 것은 첫째 땅이 비옥하여 유목 민족인 그들에게는 목축업을 적합했기 때문에 더 큰 이유가 있었다면 그들만의 고유한 민족성 보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을 영원한 정착지로 생각하지 않았고 야곱과 요셉은 회복해야 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환경이나 생활에 어떤 변화가 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항상 염두(念頭)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왜 요셉은 형들에게 바로를 만나면 그들의 직업이 애굽인들이 싫어하는 “목축업”이라고 대답하라고 일렀을까요? (34절) 그것도 역시 언젠가는 애굽을 떠나겠다는 간접적 의미를 암시(暗示)한 것입니다. 야곱도 바로를 만나 나이를 묻는 왕에게 “나그네 인생 130년이니이다”(47:9) 이라고 대답한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자기 조상들처럼 애굽땅에 영원히 정착할 의사가 조금도 없다는 의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여호와 신앙의 뿌리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1. 감격적인 부자(父子)의 상봉
드디어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만났습니다.(46:28-30) 야곱은 얼마나 기쁘고 꿈만 같았으면 “네가 지금까지 살아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가하도다”라고 했겠습니까? 그것이 자식을 기리던 부모의 마음이겠지요. 우리도 마귀에게 미혹받지 않고 신앙생활 잘하다가 마지막 날 주님 앞에 가면 주님이 얼마나 좋아하시겠습니까? 산 가시에 찔리며 잃어버렸고 양 한 마리를 어끼에 매고 오시는 목자의 모습(눅15:4-5)(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집을 나갔던 탕자가 돌아올 때 벗은 발로 달려갔던 아버지처럼 그렇게 맞으러 나오실 예수님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찌릿합니다.
본문에서 야곱이 요셉을 만난 것은 단순한 상봉의 감격만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깊은 신앙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야곱은  요셉을 잃고 슬픔과 쓰라린 아픔속에 살고 있던 자신과 동생을 팔고 양심의 가책속에서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자식들의 숨통이 확 트여지는 장면인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스라엘 공동체가 다시 회복되는 장면입니다. 유다가 죄악된 삶을 청산하고 지도자로 나서고 있습니다(28). 죽을 줄만 알았던 요셉이 살아있었습니다. 형제들 사이의 관계가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야곱가족(교회)이 회복하는 것을 보면서 야곱은 최고의 기쁨으로 감격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도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고 교회의 영광과 능력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왜 불신자들의 비난을 받고, 형제끼리 반목해야 합니까? 야곱가족처럼 우리 교회들이 감격적인 신앙회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바로를 만난 형들(47:1-6)
파슨스의 사회심리에 보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능 중 소유의 본능도 강하지만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본능도 못지않게 강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간혹 선의의 거짓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 요셉을 보면 자신의 신분과 걸맞지 않게 왕을 만나면 형들의 직업을 목축업이라고 사실 그대로 말하라고 했습니다. 당시 애굽에서는 우리나라 이조때 백정을 천시했던 것 이상으로 유목민들을 그렇게 취급했는데 요셉 자신을 위해서라도 오히려 감추게 했어야 했는데 왜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습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한다면 자기까지 무시당하고 애굽 백성들이 얕잡아 볼 수 있었지 않겠습니까? 그 이유에 대하여는 조금 전에 잠간 언급했지만 요셉은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지가 그만큼 확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애굽의 우상 문화에 내심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여호와 유일신 신앙에 대한 신앙적 긍지가 대단했던 것입니다. 더불어 천성적으로 위장을 한다거나 선의의 거짓말조차 하지 못했던 옳곧은 인격자였음도 다시 한번 증명되는 부분입니다. 요셉은 한편 헝들은 총리인 요셉을 믿고 무의도식하는 방랑자들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히 알리려는 깊은 뜻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요셉은 왕의 재산을 손에 쥐고 있는 권력의 2인자였지만 형들에게 전혀 특혜를 주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을 주해하며 Calvin은 “요셉은 왕명이 허락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가족에게 혜택을 주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청렴결백한 인물이며 권력을 이용하려는 자가 아니리 오히려 권력이 있기에 더 조심하고 맡은 바 사명에 충실했던 신앙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바로를 만난 야곱(7-12)
요셉은 왕에게 정착지를 허락 받은 후 자기 아버지를 인사시킵니다. 형들이 바로 앞에서 목축업자라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야곱을 만난 것을 보면 그가 요셉의 가족들에게 얼마나 좋은 호감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바로를 만났을 때 어떠했습니까?(7)
야곱은 바로에게 축복했습니다. 기근이 들어 잠간 신세를 지려고 온 야곱의 말처럼 한낱 나그네인데 어찌 대제국의 왕이며 더욱이 우상을 섬기는 나라인데 감히 손을 들고 축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선민의식이 얼마나 당당했는가를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자신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감추려 합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성경을 들고 다니는 것이 부끄러워 가방에 넣거나 심지어 신문지에 싸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자기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좀 어려운 사람 앞에서는 예수 예자도 나타내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을 보세요. 그는 목축업자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신권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신통한 것은 왕이 인정하고 받아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요셉에게서도 신에게 은람인 것을 느꼈지만 (41:38) 야곱에게서도 그러한 영적 권위가 풍겨나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에게도 누가 보나 예수 믿는 사람인 인상이 비추어져야 합니다. 그때 바로왕은 야곱의 나이를  궁금해 했습니다.(47:8) 야곱은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이라고 하며.... 그 동안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연단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거짓된 본성을 고칠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이 있으시지만 생활을 통한 시련 이상 사람을 다듬고 겸손하게 하는 방법은 없다고 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온유함 이상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지금 바로 앞에 서 있는 야곱은 더 이상 늙은 노인이 아닙니다. 건드리기만 하면 예언과 축복의 말씀이 쏟아져 나올 정도로 성령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고난의 세월을 통해 하나님은 야곱을 성숙한 크리스챤으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야곱은 약게  믿다가 엄청나게 먼길을 돌아왔고 또 많은 비용을 지불했던 것입니다. 또 야곱의 그 대답속에는 자신을 결코 인생을 무의미하게 살지 않았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고 나에게는 천국이라는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순례자임을 주지시키고 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미국을 가던, 소련을 가던, 동남아를 가던 어디에서고 여호와 신앙이 가슴복판에 분명히 있어야 하고 신앙의 유산만은 침해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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