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유언(창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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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죽을 날이 임박했을 때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했습니다.(왕상 2:1-3) 그것은 인생이 어떻게 해야 형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비결이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깨닫고 체험한 사실이기에 사랑하는 솔로몬에게 그 비법을 전수하므로 자기처럼 고생하지 않고 더 행복하고 값진 인생을 살게 하고 싶은 부정(父情)에서 나온 가르침이었던 것입니다. 신앙 생활에서는 특히 이점이 중요합니다. 신앙의 길은 보통의 인생 길과 다르기 때문에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실천해 본 사람의 한마디 한마디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몇 십년씩 벌어주는 축복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의 유언도 그런 의미에서 값진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내용을 보면 축복한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저주에 가깝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삶을 거울삼아 후손들은 절대로 그러한 잘못된 전철을 밟지 않기를 경고하는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에서 베어 나온 당부였던 것입니다. 야곱의 자녀관계를 다시 한 번 살펴보면 큰 부인 레아에게서 ①르우벤 ②시므온 ③레위 ④유다외 아홉째인 잇사갈과 열째인 스불론을 낳았고 라헬의 여종 빌하에게서 다섯째, 여섯째인 단과 납달 리가 태어났습니다. 그 뒤 레아의 여종 실바에게서 7, 8번째 갓과 아셀을 낳았고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에게서 11, 12번째로 요셉과 베냐민이 태어났습니다.
1. 저주와 형벌의 대상이 되지 말 것을 예언함(3-7)
여기 예언의 내용은 레아의 소생 르우벤과 시므온, 레위에 관한 것입니다. 야곱은 먼저 장자 르우벤에 대한 기대감과 더불어 그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르우벤은 어렸을 때 얼마나 똑똑하고 유능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도망지 하란땅에서 르우벤을 낳고 얼마나 든든하고 기뻐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르우벤의 성격은 “물이 끓는 것 같았다”고 비유한 점을 보면 매사에 신중치 못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했던 것 같습니다. 상당히 우유부단 했기에 요셉이 도단에서 팔려갈 때도 확실히 형 노릇을 못했던 점(37:29-30절 참조)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르우벤이 서모인 빌하와 어떻게 통간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왜 아무런 책벌도 받지 않고 넘어갔는지 모릅니다. 아마 빌하의 유혹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고 또 장성해지자 정욕을 억제치 못하여 범했을 가능성도 있었다고 봅니다. 꼭 의도적 범죄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평가 해 준다고 해도 야곱은 결코 그저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죄는 언제나 따라 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예언 가운데는 네가 목숨만 부지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반열에서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는 자기 진단을 촉구했다고 봅니다. 네가 똑똑하다고 앞서려 했다가는 오히려 버림받을 것이니 평범하게 살도록 하라고 당부한 것은 그 자체가 아버지로서 르우벤을 사랑한 축복의 내용이었다고 봅니다. 곧 너는 근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르우벤은 한 순간의 실수로 자신의 모든 능력과 인간관계와 신뢰성과 자신에게 주어진 장자의 축복권까지 모두 날려 버렸던 것입니다. 이어서 야곱은 죄 짓는 일에 의기투합했던 형제 시므온과 레위에게도 도매 급으로 저주 같은 축복을 예언했습니다. 34장에 보면 그들은 레아가 낳은 같은 배 동생 디나가 세겜에서 치욕을 당한 사건으로 세겜에서 엄청난 살상극을 저질렀던 주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요셉을 팔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여하튼 죄짓는 일 만큼은 박자가 착착 맞았던 것 같습니다. “잔해하는 기계”란 가위나 작두 같은 양날이 잘 맞는 사이란 뜻이라고 봅니다. 죄 짓는 일에는 의견일치가 되면 안 됩니다. 부부간이나, 친구사이도 뜻이 맞는 것은 좋지만 나쁜 일에 동조하고 합세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혈기로 잘 뛰지도 못하는 소의 힘줄을 끊은 자들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지나친 보복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야곱과 레아 사이에서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고 열등감속에 자랐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쉽게 의기투합이 되지 않았겠는가? 추측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출한 아이들끼리 만나면 죄 짓는 집단을 이루기 쉽습니다. 야곱은 이들에게 어떤 축복을 내렸습니까? 그것은 사실상 저주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떨어져 흩어져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것이 그를 위하여 피차간에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므온 지파를 계속 작게 만드셨습니다. 출애굽 후 가나안에 들어갈 때 인구조사를 보면 다른 지파보다 15,000명이나 줄어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는 유다지파에 거의 편일 될 정도로 작아져 버립니다.
왜 그렇게 된 것입니까? 그들은 작아져야만 살 수 있습니다. 열등의식 때문에 커지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은 공룡처럼 커지면 그 순간 쓰러지고 맙니다. 교회도 은혜 가운데 성장해야지 억지로 열등 의식 속에 인간적인 의지로 성장하면 그때가 더욱 위험합니다. 레위 족속은 말 그대로 온 지파 가운데 흩어졌습니다. 이것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으로 다른 지파를 섬기도록 흩으셨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살 수 있는 길도 교회 안에서 밖으로 은혜를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 안에만 있으면 반드시 썩게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핍박으로 흩어버리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의 유언도 그런 의미에서 값진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내용을 보면 축복한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저주에 가깝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삶을 거울삼아 후손들은 절대로 그러한 잘못된 전철을 밟지 않기를 경고하는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에서 베어 나온 당부였던 것입니다. 야곱의 자녀관계를 다시 한 번 살펴보면 큰 부인 레아에게서 ①르우벤 ②시므온 ③레위 ④유다외 아홉째인 잇사갈과 열째인 스불론을 낳았고 라헬의 여종 빌하에게서 다섯째, 여섯째인 단과 납달 리가 태어났습니다. 그 뒤 레아의 여종 실바에게서 7, 8번째 갓과 아셀을 낳았고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에게서 11, 12번째로 요셉과 베냐민이 태어났습니다.
1. 저주와 형벌의 대상이 되지 말 것을 예언함(3-7)
여기 예언의 내용은 레아의 소생 르우벤과 시므온, 레위에 관한 것입니다. 야곱은 먼저 장자 르우벤에 대한 기대감과 더불어 그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르우벤은 어렸을 때 얼마나 똑똑하고 유능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도망지 하란땅에서 르우벤을 낳고 얼마나 든든하고 기뻐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르우벤의 성격은 “물이 끓는 것 같았다”고 비유한 점을 보면 매사에 신중치 못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했던 것 같습니다. 상당히 우유부단 했기에 요셉이 도단에서 팔려갈 때도 확실히 형 노릇을 못했던 점(37:29-30절 참조)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르우벤이 서모인 빌하와 어떻게 통간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왜 아무런 책벌도 받지 않고 넘어갔는지 모릅니다. 아마 빌하의 유혹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고 또 장성해지자 정욕을 억제치 못하여 범했을 가능성도 있었다고 봅니다. 꼭 의도적 범죄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평가 해 준다고 해도 야곱은 결코 그저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죄는 언제나 따라 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예언 가운데는 네가 목숨만 부지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반열에서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는 자기 진단을 촉구했다고 봅니다. 네가 똑똑하다고 앞서려 했다가는 오히려 버림받을 것이니 평범하게 살도록 하라고 당부한 것은 그 자체가 아버지로서 르우벤을 사랑한 축복의 내용이었다고 봅니다. 곧 너는 근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르우벤은 한 순간의 실수로 자신의 모든 능력과 인간관계와 신뢰성과 자신에게 주어진 장자의 축복권까지 모두 날려 버렸던 것입니다. 이어서 야곱은 죄 짓는 일에 의기투합했던 형제 시므온과 레위에게도 도매 급으로 저주 같은 축복을 예언했습니다. 34장에 보면 그들은 레아가 낳은 같은 배 동생 디나가 세겜에서 치욕을 당한 사건으로 세겜에서 엄청난 살상극을 저질렀던 주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요셉을 팔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여하튼 죄짓는 일 만큼은 박자가 착착 맞았던 것 같습니다. “잔해하는 기계”란 가위나 작두 같은 양날이 잘 맞는 사이란 뜻이라고 봅니다. 죄 짓는 일에는 의견일치가 되면 안 됩니다. 부부간이나, 친구사이도 뜻이 맞는 것은 좋지만 나쁜 일에 동조하고 합세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혈기로 잘 뛰지도 못하는 소의 힘줄을 끊은 자들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지나친 보복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야곱과 레아 사이에서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고 열등감속에 자랐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쉽게 의기투합이 되지 않았겠는가? 추측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출한 아이들끼리 만나면 죄 짓는 집단을 이루기 쉽습니다. 야곱은 이들에게 어떤 축복을 내렸습니까? 그것은 사실상 저주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떨어져 흩어져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것이 그를 위하여 피차간에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므온 지파를 계속 작게 만드셨습니다. 출애굽 후 가나안에 들어갈 때 인구조사를 보면 다른 지파보다 15,000명이나 줄어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는 유다지파에 거의 편일 될 정도로 작아져 버립니다.
왜 그렇게 된 것입니까? 그들은 작아져야만 살 수 있습니다. 열등의식 때문에 커지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은 공룡처럼 커지면 그 순간 쓰러지고 맙니다. 교회도 은혜 가운데 성장해야지 억지로 열등 의식 속에 인간적인 의지로 성장하면 그때가 더욱 위험합니다. 레위 족속은 말 그대로 온 지파 가운데 흩어졌습니다. 이것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으로 다른 지파를 섬기도록 흩으셨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살 수 있는 길도 교회 안에서 밖으로 은혜를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 안에만 있으면 반드시 썩게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핍박으로 흩어버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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