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을 불러 부탁한 야곱(창47: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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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일가는 하나님이 목적하신대로 고센 땅에 거하면서 신앙적 변질도 막을 수 있었고 산업도 얻고 번성하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흉년이나 아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으신 뜻에 의한 것이었습니다.(45:7) 왜 하나님은 요셉에게 그러한 혹독한 고통을 겪게 하시면서까지 그렇게 하셨을까요? 당시 가나안 땅에는 아모리 사람들이 주종 민족이 되어 소수 부족인 야곱 일가(一家)가 오히려 그들의 죄악에 감염되고 순수한 여호와 신앙을 고수 할 수 없음을 아셨기에 애굽에 피난시켜 유예기간을 갖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 400년 동안 애굽에서 70명이 60만이 되는 큰 민족을 이루었고(약10,000배) 대 민족이 되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바로 왕에게 나그네라고 말했듯이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야 할 민족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뜻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고센에서 17년을 살았고 147세가 되어 죽을 날이 가까우매 요셉을 불러 조부 아브라함과 부모(이삭과 리브가)님이 묻힌 가나안 땅(선영)으로 매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 지내 줄 것을 부탁했던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아들 요셉이 최고 실권자인 국무총리였기에 얼마든지 성대한 장례를 치룰 수 있었고 귀족의 무덤에 묻히거나 피라미드도 만들어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소망은 죽어서라도 약속의 땅에 돌아가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다 야곱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멀리서 약속의 땅을 사모하며 바라보았던 것처럼 우리 믿음의 후손들은 영원한 약속의 땅(하나님 나라)을 멀리서 바라보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나그네들인 것입니다.(히11:13)
1. 고센 땅에 주저앉은 야곱 일가(一家. one's relations)
47절에 보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몇 년간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습니까?(17년간) 왜 돌아가지 않았을까요? 그들이 그곳에 온 이유는 흉년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흉년은 몇 년 만에 끝났습니까?(7년)
그런데 성경에는 돌아가지 않은 이유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임박한 야곱의 유언에 의하면 항상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을 품고 살았음을 알 수 있고 또 후손들도 언젠가는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아버지의 뜻 깊은 암시가 배어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흉년이 벌써 끝났는데도 그때까지 돌아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1)한마디로 가나안 땅보다 그곳이 살기가 좋았기 때문이었겠지요.
가나안 땅도 약속만 되어 있지 다른 민족들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으니 그곳에 있으나 이곳에 머무나 어쩌든 떠돌이 인생일 뿐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2) 제가 이사를 자주 해 보니 한번 이사가 하기가 좀 힘든 것 아닙니다. 더욱이 애굽에 와서 엄청난 번창을 했습니다. 그러니 이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웬만하면 이곳에서 버티어 보자는 안일 무사한 심정 때문이었으리라는 추측도 해 볼만 합니다.
(3)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흉년이 끝났어도 하나님의 별도의 지시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애굽으로 옮겨 올 때도 브엘세바에서 예배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이동했었습니다.
그러한 형편이었으므로 야곱은 그러한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지내다보니 어언 1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후손들이 들어가게 해 줄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곳으로 돌아가게 될 것은 필연(必然)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의 약속이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야곱의 신앙이었던 것처럼 저 천성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어야 할 것입니다.
2. 야곱의 유언
야곱은 요셉의 손을 자신의 허벅지(환도뼈) 아래 넣게 하고 부탁했습니다. 24:2절에도 보면 아브라함도 이삭의 아내감을 구하려 늙은 종을 하란에 심부름 보내면서 허벅지 아래 손을 넣고 맹세하게 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당시 사람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이 조상의 허리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앞으로 오고 올 모든 후손들 앞에서 엄숙하게 맹세를 지키겠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면전에서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헤어지거나 더욱이 그 사람이 죽으면 전혀 모른체 해 버리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야곱은 인생의 경륜이 깊었던 나이였는지라 자기가 죽고 난 후에도 형들과 그의 가족들을 잘 돌보아 주라고 부탁했을 것입니다.
형들이 요셉에게 저지른 잘못이 아버지로서 마음이 항상 개운치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가 죽고 나면 행여나 보복이 있을까 염려가 마음 구석에 있었을 것입니다. 환도뼈 밑에 손을 넣고 맹세하게 한 것은 그런 깊은 이유도 있었으리라 봅니다. 보통 사람들은 죽음에 임박했을 때 대부분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죽는 것이 무서워 벌벌 떱니다.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자기 생각만 합니다. 죽으면서까지도 억울해 합니다. 조금 믿음이 있다는 사람은 죽으면서 회개를 합니다. 자기만을 위해서 살았다는 것, 남을 위해서 한 일이 없다는 것, 더욱이 하나님 앞에 알게 모르게 지은 죄와 불충했던 일들을 회개합니다. 그러나 야곱을 보십시오. 자손들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것을 무언 중 강력히 주지시켜 주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시신이 조상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고 실제로 산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신앙의 지도자들은 평상시 가르침과 실제 생활이 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남에게 좋은 내용을 가르쳐 주고 실제로 자신은 엉뚱한 방향으로 산다면 거기에서 오는 불신은 전체가 부정되고 맙니다. 그리스도인은 생활로 자신의 신앙을 증명해야 합니다.
야곱처럼 죽으면서까지라도 자신의 신앙을 증명해야 합니다.
3. 유언을 받은 요셉(30-31)
야곱은 신실하게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요셉에게 유언하면서 엄숙하게 부탁했습니다. “내가 조상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매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야곱)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많은 일을 해야 하겠지만 그 중에 꼭 빼놓아서는 안 될 일이 죽을 준비인 것을 믿습니다. 톨스토이는 “사람들이 겨울이 오기 전에 월동 준비는 하면서 왜 죽을 준비는 하지 않은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눕게 됩니다. 죽습니다. 살았을 때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살아야겠지만 죽음 준비도 잘 합시다. 요셉은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맹세했습니다. 청개구리처럼 맹세 해 놓고도 지키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더욱이 세례 받을 때, 임직할 때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맹세합니다. 그러나 그때의 맹세했던 내용 비슷하게만 살아도 좋겠는데 완전히 청개구리처럼 엉뚱하게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셉은 그가 맹세 하였던 대로 행하였습니다. 효도란 부모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부모님의 가르침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효자 신자는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신자입니다. 야곱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하나님께 엄숙히 예배 드렸습니다. 마치 멀리 있는 신하가 왕궁을 향하여 임금께 절하고 죽음에 임하듯이 그러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인도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후손들을 부탁했을 것입니다. 또 자신의 영혼을 부탁했을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기도했던 그 모습 같지 않습니까? 이 놀라운 신앙은 요셉에게도 전수되어 50:22-25절에서 요셉은 자기의 해골을 가나안 땅에 갈 때 매고 갈 것을 맹세시켰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약속의 종교입니다. 우리에게도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고 거룩한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 자손들에게도 그 세계를 바라보도록 맹세시켜야 하겠습니다.
1. 고센 땅에 주저앉은 야곱 일가(一家. one's relations)
47절에 보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몇 년간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습니까?(17년간) 왜 돌아가지 않았을까요? 그들이 그곳에 온 이유는 흉년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흉년은 몇 년 만에 끝났습니까?(7년)
그런데 성경에는 돌아가지 않은 이유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임박한 야곱의 유언에 의하면 항상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을 품고 살았음을 알 수 있고 또 후손들도 언젠가는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아버지의 뜻 깊은 암시가 배어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흉년이 벌써 끝났는데도 그때까지 돌아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1)한마디로 가나안 땅보다 그곳이 살기가 좋았기 때문이었겠지요.
가나안 땅도 약속만 되어 있지 다른 민족들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으니 그곳에 있으나 이곳에 머무나 어쩌든 떠돌이 인생일 뿐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2) 제가 이사를 자주 해 보니 한번 이사가 하기가 좀 힘든 것 아닙니다. 더욱이 애굽에 와서 엄청난 번창을 했습니다. 그러니 이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웬만하면 이곳에서 버티어 보자는 안일 무사한 심정 때문이었으리라는 추측도 해 볼만 합니다.
(3)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흉년이 끝났어도 하나님의 별도의 지시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애굽으로 옮겨 올 때도 브엘세바에서 예배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이동했었습니다.
그러한 형편이었으므로 야곱은 그러한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지내다보니 어언 1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후손들이 들어가게 해 줄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곳으로 돌아가게 될 것은 필연(必然)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의 약속이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야곱의 신앙이었던 것처럼 저 천성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어야 할 것입니다.
2. 야곱의 유언
야곱은 요셉의 손을 자신의 허벅지(환도뼈) 아래 넣게 하고 부탁했습니다. 24:2절에도 보면 아브라함도 이삭의 아내감을 구하려 늙은 종을 하란에 심부름 보내면서 허벅지 아래 손을 넣고 맹세하게 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당시 사람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이 조상의 허리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앞으로 오고 올 모든 후손들 앞에서 엄숙하게 맹세를 지키겠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면전에서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헤어지거나 더욱이 그 사람이 죽으면 전혀 모른체 해 버리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야곱은 인생의 경륜이 깊었던 나이였는지라 자기가 죽고 난 후에도 형들과 그의 가족들을 잘 돌보아 주라고 부탁했을 것입니다.
형들이 요셉에게 저지른 잘못이 아버지로서 마음이 항상 개운치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가 죽고 나면 행여나 보복이 있을까 염려가 마음 구석에 있었을 것입니다. 환도뼈 밑에 손을 넣고 맹세하게 한 것은 그런 깊은 이유도 있었으리라 봅니다. 보통 사람들은 죽음에 임박했을 때 대부분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죽는 것이 무서워 벌벌 떱니다.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자기 생각만 합니다. 죽으면서까지도 억울해 합니다. 조금 믿음이 있다는 사람은 죽으면서 회개를 합니다. 자기만을 위해서 살았다는 것, 남을 위해서 한 일이 없다는 것, 더욱이 하나님 앞에 알게 모르게 지은 죄와 불충했던 일들을 회개합니다. 그러나 야곱을 보십시오. 자손들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것을 무언 중 강력히 주지시켜 주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시신이 조상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고 실제로 산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신앙의 지도자들은 평상시 가르침과 실제 생활이 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남에게 좋은 내용을 가르쳐 주고 실제로 자신은 엉뚱한 방향으로 산다면 거기에서 오는 불신은 전체가 부정되고 맙니다. 그리스도인은 생활로 자신의 신앙을 증명해야 합니다.
야곱처럼 죽으면서까지라도 자신의 신앙을 증명해야 합니다.
3. 유언을 받은 요셉(30-31)
야곱은 신실하게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요셉에게 유언하면서 엄숙하게 부탁했습니다. “내가 조상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매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야곱)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많은 일을 해야 하겠지만 그 중에 꼭 빼놓아서는 안 될 일이 죽을 준비인 것을 믿습니다. 톨스토이는 “사람들이 겨울이 오기 전에 월동 준비는 하면서 왜 죽을 준비는 하지 않은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눕게 됩니다. 죽습니다. 살았을 때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살아야겠지만 죽음 준비도 잘 합시다. 요셉은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맹세했습니다. 청개구리처럼 맹세 해 놓고도 지키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더욱이 세례 받을 때, 임직할 때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맹세합니다. 그러나 그때의 맹세했던 내용 비슷하게만 살아도 좋겠는데 완전히 청개구리처럼 엉뚱하게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셉은 그가 맹세 하였던 대로 행하였습니다. 효도란 부모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부모님의 가르침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효자 신자는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신자입니다. 야곱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하나님께 엄숙히 예배 드렸습니다. 마치 멀리 있는 신하가 왕궁을 향하여 임금께 절하고 죽음에 임하듯이 그러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인도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후손들을 부탁했을 것입니다. 또 자신의 영혼을 부탁했을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기도했던 그 모습 같지 않습니까? 이 놀라운 신앙은 요셉에게도 전수되어 50:22-25절에서 요셉은 자기의 해골을 가나안 땅에 갈 때 매고 갈 것을 맹세시켰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약속의 종교입니다. 우리에게도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고 거룩한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 자손들에게도 그 세계를 바라보도록 맹세시켜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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