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들을 시험한 요셉(창44: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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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들을 시험한 요셉(창44:1-34)
요셉은 형들이 변화된 것은 믿었으나 한번 더 얼마나 희생정신이 있는지 시험해 보았습니다.
자기를 판 형들이 베냐민과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고 싶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요셉이 대인(大人)이라고 하지만 단순히 형들과 악수하면서 과거는 다 잊어버리자는 식으로 화해 할 수 없었습니다. 믿음이 깊은 사람일수록 경솔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술 한 잔 나누며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악수하고 난 후 단 몇 분도 못 가서 또 다시 싸우는 그런 화해는 하나 마나인 것입니다. 여기서 형들은 곧 구약의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간단한 방법으로 화해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진정으로 죄를 뉘우치지 않은 그들에게 영혼을 맡긴다는 것은 도둑에게 생명을 맡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디모데에게 집사의 직분도 함부로 주어서는 안 된다고 일러주었지 않습니까?(딤전3:10) 특히 목회자가 될 사람은 선한 증거를 가진 자라야 합니다. 요한사도는 거짓 선지가 많다고 경계하였습니다(요일4:1). 그래서 요셉은 믿음이 깊은 만큼 더욱 철저히 형들을 시험하고 회개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때 자신의 가슴은 더 아팠을 것입니다.
1. 베냐민의 쌀자루에 은장을 넣음
이것은 요셉의 치밀한 작전이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베냐민의 자루에 넣었겠습니까? 여러분도 충분히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베냐민은 야곱이 그렇게도 사랑했던 라헬의 소생이었고 요셉과는 둘 뿐이 동복(同腹)형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형들은 요셉 자신을 미워했던 것처럼 혹 아버지의 유산이 베냐민에게 넘어가지 않을까 욕심내어 은근히 베냐민이 잘못되는 것을 구수하게 여기지 않을까 시험해 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베냐민을 인질로 붙잡아 두겠다고 하면 형들의 반응이 어떠할 것인가를 살펴보려는 깊은 속셈이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베냐민을 남겨 둔 채 그들끼리 떠나간다면 그들은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셉은 그들의 양심을 떠 보는데는 그 방법이 적절하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요셉은 베냐민의 자루에 돈과 은잔을 몰래 넣어 그들을 떠나게 한 뒤 청지기들을 시켜 그것을 훔쳐 갔다고 추궁하였습니다. 그때 그들은 천부당만부당하다고 펄쩍 뛰었습니다.
그리고 뉘게서 발견되면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모두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맹세했습니다.(8절) 요셉은 그러면 좋다 발견되는 사람은 종을 삼겠고 나머지 사람은 죄를 묻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누구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왔겠습니까? 물론 베냐민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생각 해 본 것을 왜 하필 은잔으로 시험했을까요? 은잔은 값으로는 별것 아니지만 요셉이 가지고 점치는데 사용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5). 애굽 사람들은 은잔에 기름을 담아 물위에 띄어서 기름이 퍼지는 상채를 보아 점을 쳤다고 합니다. 설마 요셉이 그런 점을 쳤겠습니까마는 청지기들은 그만큼 요셉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가져갔다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곧 은잔은 주인의 인격과 같은 것인데 주인의 인격을 무시하고 선을 악으로 갚았다는데 깊은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은잔의 값어치가 문제가 아니라 감히 총리의 물건을 훔쳤다는 것은 그만큼 총리의 체면과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것입니다.
2. 형들의 반응
은잔이 베냐민의 자루 속에서 발견되기 전까지는 그렇게 당당했던 형들이 은잔이 발견된 후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예전 같으면 저 녀석은 항상 사고뭉치라고 공격했을지 모릅니다. 어쩔 수 없다고 베냐민을포기하고 자기네끼리 길을 떠났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형들은 베냐민의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며 옷을 찢고 가나안으로 가지 않고 요셉의 집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베냐민을 탓하지도 않았습니다. 원래 야곱의 가정은 그래도 하나님을 경외해 왔기 때문에 율법적 의식은 있어서 도적질을 하지 않을 만큼 신앙교육은 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도 외삼촌 라반의 양을 한 마리도 훔치지 않았다고 했고(31:38-39) 그 후 요셉도 보디발 집에서 정직하게 산 것을 보면 그래도 신앙의 가정은 뭔가 달라도 조금은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형들도 베냐민이 고의적으로 그랬으리라는 것을 믿지 않은 것 같고 공동책임의 식을 느끼는 것을 보고 요셉은 흐뭇함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정색을 하면서 감히 요셉은 우습게 여겼다고 다그쳤습니다. 요셉은 그 정도도 모를 줄 알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명철을 얕잡아 본 것이요, 인격을 무시한 괘씨함 행위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3. 베냐민 대신 인질을 자청한 유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떠한 변명도 통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억울해도 속을 뒤집어 보일 수 없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렇다고 감히 이것은 누군가의 음모라고 대들 수 있는 형편도 못되지 않습니까? 그때 셋째 형 유다가 모든 경위를 다시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베냐민은 아버지와 떨어질 수 없을 만큼 아버지가 사랑하시기 때문에 베냐민을 못 데리고 가면 아버지가 죽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22) 베냐민과 함께 오지 아니하면 다시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습니다(23). “재해가 베냐민에게 미치면 나의(아버지)의 흰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할 것이라”(29)고 했습니다. 유다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맹세했던 내용을 요셉에게 강력히 설명하면서(32)절 자신이 베냐민 대신 종이 되겠으니 베냐민과 다른 형제들은 제발 돌려보내 달라고 강청했습니다. 거듭 제발 우리 아버지에게 재해가 미치지 않게 해 달라고 사정 사정 했습니다(34).
우리는 이 탄원에서 유다가 베냐민에 대하여 아우, 소년, 말째아우, 그이, 아이등 표현으로 22회나 언급하면서 베냐민과 관련시켜 아버지의 형편을 애절한 모습으로 실감 있게 설명하면서 극진한 효성을 보일 때 요셉의 마음은 흐뭇하면서도 한편으로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을 것입니다. 여기서 유다의 변론은 자기 생명을 담보로 하므로 오늘 세상 변호사와 다릅니다. 세상 변호사는 삯군과 같으나 유다는 우리 주님과 같은 성격의 변론입니다. 아버지와 사랑하는 동생을 위한 자기희생을 자초하는 의로운 변론입니다. 주님도 우리의 담보이셨습니다(갈3:13-14). 유다의 중재는 우리 주님의 중재를 암시합니다. 히7:14에서는 “우리 주님께서 유다를 쫓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란 표현도 있습니다. 유다의 기도는 기도의 완전한 표본이요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진실한 감정입니다. 요셉은 여기에서 지금까지 참고 고생한 보람을 느꼈을 것입니다. 변화된 형들의 진정을 파악할 수 있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다시 한번 감사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이 변화된 것은 믿었으나 한번 더 얼마나 희생정신이 있는지 시험해 보았습니다.
자기를 판 형들이 베냐민과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고 싶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요셉이 대인(大人)이라고 하지만 단순히 형들과 악수하면서 과거는 다 잊어버리자는 식으로 화해 할 수 없었습니다. 믿음이 깊은 사람일수록 경솔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술 한 잔 나누며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악수하고 난 후 단 몇 분도 못 가서 또 다시 싸우는 그런 화해는 하나 마나인 것입니다. 여기서 형들은 곧 구약의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간단한 방법으로 화해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진정으로 죄를 뉘우치지 않은 그들에게 영혼을 맡긴다는 것은 도둑에게 생명을 맡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디모데에게 집사의 직분도 함부로 주어서는 안 된다고 일러주었지 않습니까?(딤전3:10) 특히 목회자가 될 사람은 선한 증거를 가진 자라야 합니다. 요한사도는 거짓 선지가 많다고 경계하였습니다(요일4:1). 그래서 요셉은 믿음이 깊은 만큼 더욱 철저히 형들을 시험하고 회개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때 자신의 가슴은 더 아팠을 것입니다.
1. 베냐민의 쌀자루에 은장을 넣음
이것은 요셉의 치밀한 작전이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베냐민의 자루에 넣었겠습니까? 여러분도 충분히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베냐민은 야곱이 그렇게도 사랑했던 라헬의 소생이었고 요셉과는 둘 뿐이 동복(同腹)형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형들은 요셉 자신을 미워했던 것처럼 혹 아버지의 유산이 베냐민에게 넘어가지 않을까 욕심내어 은근히 베냐민이 잘못되는 것을 구수하게 여기지 않을까 시험해 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베냐민을 인질로 붙잡아 두겠다고 하면 형들의 반응이 어떠할 것인가를 살펴보려는 깊은 속셈이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베냐민을 남겨 둔 채 그들끼리 떠나간다면 그들은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셉은 그들의 양심을 떠 보는데는 그 방법이 적절하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요셉은 베냐민의 자루에 돈과 은잔을 몰래 넣어 그들을 떠나게 한 뒤 청지기들을 시켜 그것을 훔쳐 갔다고 추궁하였습니다. 그때 그들은 천부당만부당하다고 펄쩍 뛰었습니다.
그리고 뉘게서 발견되면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모두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맹세했습니다.(8절) 요셉은 그러면 좋다 발견되는 사람은 종을 삼겠고 나머지 사람은 죄를 묻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누구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왔겠습니까? 물론 베냐민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생각 해 본 것을 왜 하필 은잔으로 시험했을까요? 은잔은 값으로는 별것 아니지만 요셉이 가지고 점치는데 사용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5). 애굽 사람들은 은잔에 기름을 담아 물위에 띄어서 기름이 퍼지는 상채를 보아 점을 쳤다고 합니다. 설마 요셉이 그런 점을 쳤겠습니까마는 청지기들은 그만큼 요셉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가져갔다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곧 은잔은 주인의 인격과 같은 것인데 주인의 인격을 무시하고 선을 악으로 갚았다는데 깊은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은잔의 값어치가 문제가 아니라 감히 총리의 물건을 훔쳤다는 것은 그만큼 총리의 체면과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것입니다.
2. 형들의 반응
은잔이 베냐민의 자루 속에서 발견되기 전까지는 그렇게 당당했던 형들이 은잔이 발견된 후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예전 같으면 저 녀석은 항상 사고뭉치라고 공격했을지 모릅니다. 어쩔 수 없다고 베냐민을포기하고 자기네끼리 길을 떠났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형들은 베냐민의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며 옷을 찢고 가나안으로 가지 않고 요셉의 집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베냐민을 탓하지도 않았습니다. 원래 야곱의 가정은 그래도 하나님을 경외해 왔기 때문에 율법적 의식은 있어서 도적질을 하지 않을 만큼 신앙교육은 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도 외삼촌 라반의 양을 한 마리도 훔치지 않았다고 했고(31:38-39) 그 후 요셉도 보디발 집에서 정직하게 산 것을 보면 그래도 신앙의 가정은 뭔가 달라도 조금은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형들도 베냐민이 고의적으로 그랬으리라는 것을 믿지 않은 것 같고 공동책임의 식을 느끼는 것을 보고 요셉은 흐뭇함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정색을 하면서 감히 요셉은 우습게 여겼다고 다그쳤습니다. 요셉은 그 정도도 모를 줄 알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명철을 얕잡아 본 것이요, 인격을 무시한 괘씨함 행위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3. 베냐민 대신 인질을 자청한 유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떠한 변명도 통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억울해도 속을 뒤집어 보일 수 없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렇다고 감히 이것은 누군가의 음모라고 대들 수 있는 형편도 못되지 않습니까? 그때 셋째 형 유다가 모든 경위를 다시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베냐민은 아버지와 떨어질 수 없을 만큼 아버지가 사랑하시기 때문에 베냐민을 못 데리고 가면 아버지가 죽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22) 베냐민과 함께 오지 아니하면 다시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습니다(23). “재해가 베냐민에게 미치면 나의(아버지)의 흰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할 것이라”(29)고 했습니다. 유다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맹세했던 내용을 요셉에게 강력히 설명하면서(32)절 자신이 베냐민 대신 종이 되겠으니 베냐민과 다른 형제들은 제발 돌려보내 달라고 강청했습니다. 거듭 제발 우리 아버지에게 재해가 미치지 않게 해 달라고 사정 사정 했습니다(34).
우리는 이 탄원에서 유다가 베냐민에 대하여 아우, 소년, 말째아우, 그이, 아이등 표현으로 22회나 언급하면서 베냐민과 관련시켜 아버지의 형편을 애절한 모습으로 실감 있게 설명하면서 극진한 효성을 보일 때 요셉의 마음은 흐뭇하면서도 한편으로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을 것입니다. 여기서 유다의 변론은 자기 생명을 담보로 하므로 오늘 세상 변호사와 다릅니다. 세상 변호사는 삯군과 같으나 유다는 우리 주님과 같은 성격의 변론입니다. 아버지와 사랑하는 동생을 위한 자기희생을 자초하는 의로운 변론입니다. 주님도 우리의 담보이셨습니다(갈3:13-14). 유다의 중재는 우리 주님의 중재를 암시합니다. 히7:14에서는 “우리 주님께서 유다를 쫓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란 표현도 있습니다. 유다의 기도는 기도의 완전한 표본이요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진실한 감정입니다. 요셉은 여기에서 지금까지 참고 고생한 보람을 느꼈을 것입니다. 변화된 형들의 진정을 파악할 수 있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다시 한번 감사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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