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출2:2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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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래서 끊임없이 순환된다”(성주괴공:成柱壞空)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한분 하나님만은 영원하십니다. 역사는 물 흐르듯 변합니다. 그래서 애굽의 왕도 수없이 바뀌었고 이스라엘 민족은 창대해 졌습니다. 당시 애굽의 왕이 Aahmes Ⅰ세, 혹은 Ramess Ⅱ라고도 하는데 어쩌튼 혹독하게 잔인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1:15절참조)) 사람은 자기가 장악할 수 없으면 경계하고 적으로 생각하여 적개심을 노출시킵니다. 그래서 애굽의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혹독한 노역을 시켰으니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달달볶았고(1:11) 나중에는 남자 아이들이 출생되면 죽이라는 명령까지 했던 것입니다.
1. 이스라엘 민족의 기도
그 왕은 죽었으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전히 고역(苦役)으로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참고 견디는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더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애굽에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더더욱 죽기 위한 발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님께 부르짖을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탄식하며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환난날에 부르짖으라 그리하면 내가 응답하겠고” (시50:15)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비참한 상태에서 부르짖는 그들의 기도는 하늘에 상달(上達)되었고 하나님은 그 고통의 소리를 들으시고 이전에 조상들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眷念: 보살펴 생각함: favour) 하셨다고 했습니다. 본문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안할 때는 기도하지 않았거나 형식적인 기도를 했었다는 것입니다. 환난날에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환난날만 기도하라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은채 좌절하지 말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라”(살전5:17)고 했습니다. 감사의 기도부터 중보기도, 보호를 구하는 기도, 도움을 바라는 기도를 끊임없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악을 대항하기 보다는 거기에 항복하고 악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친일파가 생겼던 것입니다. 인간의 무관심, 망각, 연기 이런 것은 바로 인간의 책임입니다. 크리스챤은 어려움이 있을 때 도우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2.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
사실 하나님은 벌써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이미 80년전에 모세를 바로의 궁정에 보내어 40년간 애굽의 학술을 다 배워 말과 행동에 능한 사람이 되었고 (행7:22) 어머니를 통해 신앙정신도 심어 주었습니다. 그 후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게 하여 이스라엘 지도자로 민족적인 사명의식과 소양을 기르게 하셨습니다. 고적한 삶을 통해 청년의 혈기를 제어하며 지상에서 온유한자로(민12:3) 변화 시켰고 강한 인내심을 갖도록 충분히 훈련 시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인간적인 요소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백성의 속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즉흥적이고 우발적으로 행하시지 않습니다. 사전에 준비하시고 역사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은 호렙산 가시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여기 떨기나무는 학명이 아키시아 닐로티카(Acacia nilotica)라는 키가 2-3m 정도 큰 관목으로 밑둥에서부터 줄기가 많이 뻗어 나온 엉성한 가시나무 종류입니다. 모세가 볼 때 그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나무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했을 것입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 광경이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부르실 때도 그랬지 않겠습니까?(행9:5) 하나님은 쓰시고저 하는 사람을 개별적으로 지명하여 부르십니다.(사43:1-3) 우리에게 충동을 주시거나 호기심을 유발하여 하나님께 접근하게 하십니다. 가까이간 모세를 하나님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 그때 “모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쓰시고자 하실 때 모세처럼, 이사야처럼 항상 “내가 여기 있나이다” 대답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들은 체 마는 체 하거나, 피해 버리거나,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눈치만 살핍니다. 어떤 어려운 일도 하나님께서 시키시면 공짜가 없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상을 바라기 전에 입은 은혜에 감사하여 자원하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명하셨습니다.(5) 왜 하나님은 하필이면 가시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나셨을까요? 그것은 사악한 세상을 뜻하거나, 고난을 뜻한 것인지 모릅니다. 여하튼 하나님이 계신 곳은 어디든 거룩한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신성하고 거룩한 곳입니다. 신자는 자체가 성령의 전이지만(고전6:19) 더욱이 교회에서 큰소리치거나 불미스런 언사나 행동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동은 귀신 역사인 것입니다.
※거기서 신발을 벗으라고 하신 이유는
(1) 인간의 죄 성을 벗으라는 것입니다. 신발은 어디나 다니기 때문에 더러운 것의 상징입니다.
(2) 자기를 벗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겸손히 하나님의 인도에 따르라는 뜻입니다.
(3)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바른 자세, 예의가 필요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바른 자세, 예의가 필요합니다.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과 이스라엘 민족과의 관계를 확실히 알려주셨고 그 민족을 사랑하심과 하실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보내어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시겠다고 모세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목적 없이 부르시지 않습니다. 소명(召命)은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방편입니다. 당사자에게는 생의 변화요(4:1-3)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능력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3. 아멘하지 않은 모세(11-12)
모세가 얼마나 겸손했던가는 6절 하단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도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성경을 함부로 내던지고 가볍게 취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상시 하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만큼 하나님 말씀 앞에 마음가짐이 달라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11절에 보면 모세는 내가 누군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해 낼 수 있겠느냐고 겸손하게 거절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보다 더 자격있는 사람을 시키라는 사양같고 겸손함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어련히 알아서 모세를 부르셨겠느냐?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할 일을 지명 받았을 때 나보다 더 능력있는 사람을 시키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거절이요, 아니면 나 아니면 안 될 것이라는 교만의 역(逆) 표현이기도 한 것입니다. 내 사정, 내 능력, 내 형편은 자기가 계산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맡기시면 “아멘” 하는 믿음이 곧 순종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모세는 물론 겸손한 마음이었지만 “아멘” 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맡겨 주셨으면 결코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경우가 많습니다. 네가 회장해, 반장해 하고 적극 밀어주는 것 처럼 해 놓고는 협조는 못할망정 뒤에서 허물이나 들추고 흔들어 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최고로 야비한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함께 책임지십니다. 사명을 완수하게 확실하게 밀어주시고 또 완수하게 하십니다. 12절에 모세에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운 사명을 맡겨주시면 마치 내가 그것은 전적으로 해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해 낸 후에 생색을 내거나 공적을 주장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시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의미가 있으며 우리를 앞에 내세워 사용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맡겨주실 때는 우리는 내가 가장 적격자로 인정받은 것을 감사하며 항상 “아멘”으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과가 어떻게 될 것까지 말씀하시며 내가 너를 보낸 증거를 분명히 보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2절) 하나님은 확실하게 우리를 보장해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 이스라엘 민족의 기도
그 왕은 죽었으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전히 고역(苦役)으로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참고 견디는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더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애굽에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더더욱 죽기 위한 발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님께 부르짖을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탄식하며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환난날에 부르짖으라 그리하면 내가 응답하겠고” (시50:15)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비참한 상태에서 부르짖는 그들의 기도는 하늘에 상달(上達)되었고 하나님은 그 고통의 소리를 들으시고 이전에 조상들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眷念: 보살펴 생각함: favour) 하셨다고 했습니다. 본문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안할 때는 기도하지 않았거나 형식적인 기도를 했었다는 것입니다. 환난날에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환난날만 기도하라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은채 좌절하지 말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라”(살전5:17)고 했습니다. 감사의 기도부터 중보기도, 보호를 구하는 기도, 도움을 바라는 기도를 끊임없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악을 대항하기 보다는 거기에 항복하고 악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친일파가 생겼던 것입니다. 인간의 무관심, 망각, 연기 이런 것은 바로 인간의 책임입니다. 크리스챤은 어려움이 있을 때 도우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2.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
사실 하나님은 벌써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이미 80년전에 모세를 바로의 궁정에 보내어 40년간 애굽의 학술을 다 배워 말과 행동에 능한 사람이 되었고 (행7:22) 어머니를 통해 신앙정신도 심어 주었습니다. 그 후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게 하여 이스라엘 지도자로 민족적인 사명의식과 소양을 기르게 하셨습니다. 고적한 삶을 통해 청년의 혈기를 제어하며 지상에서 온유한자로(민12:3) 변화 시켰고 강한 인내심을 갖도록 충분히 훈련 시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인간적인 요소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백성의 속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즉흥적이고 우발적으로 행하시지 않습니다. 사전에 준비하시고 역사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은 호렙산 가시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여기 떨기나무는 학명이 아키시아 닐로티카(Acacia nilotica)라는 키가 2-3m 정도 큰 관목으로 밑둥에서부터 줄기가 많이 뻗어 나온 엉성한 가시나무 종류입니다. 모세가 볼 때 그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나무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했을 것입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 광경이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부르실 때도 그랬지 않겠습니까?(행9:5) 하나님은 쓰시고저 하는 사람을 개별적으로 지명하여 부르십니다.(사43:1-3) 우리에게 충동을 주시거나 호기심을 유발하여 하나님께 접근하게 하십니다. 가까이간 모세를 하나님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 그때 “모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쓰시고자 하실 때 모세처럼, 이사야처럼 항상 “내가 여기 있나이다” 대답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들은 체 마는 체 하거나, 피해 버리거나,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눈치만 살핍니다. 어떤 어려운 일도 하나님께서 시키시면 공짜가 없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상을 바라기 전에 입은 은혜에 감사하여 자원하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명하셨습니다.(5) 왜 하나님은 하필이면 가시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나셨을까요? 그것은 사악한 세상을 뜻하거나, 고난을 뜻한 것인지 모릅니다. 여하튼 하나님이 계신 곳은 어디든 거룩한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신성하고 거룩한 곳입니다. 신자는 자체가 성령의 전이지만(고전6:19) 더욱이 교회에서 큰소리치거나 불미스런 언사나 행동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동은 귀신 역사인 것입니다.
※거기서 신발을 벗으라고 하신 이유는
(1) 인간의 죄 성을 벗으라는 것입니다. 신발은 어디나 다니기 때문에 더러운 것의 상징입니다.
(2) 자기를 벗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겸손히 하나님의 인도에 따르라는 뜻입니다.
(3)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바른 자세, 예의가 필요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바른 자세, 예의가 필요합니다.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과 이스라엘 민족과의 관계를 확실히 알려주셨고 그 민족을 사랑하심과 하실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보내어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시겠다고 모세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목적 없이 부르시지 않습니다. 소명(召命)은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방편입니다. 당사자에게는 생의 변화요(4:1-3)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능력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3. 아멘하지 않은 모세(11-12)
모세가 얼마나 겸손했던가는 6절 하단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도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성경을 함부로 내던지고 가볍게 취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상시 하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만큼 하나님 말씀 앞에 마음가짐이 달라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11절에 보면 모세는 내가 누군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해 낼 수 있겠느냐고 겸손하게 거절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보다 더 자격있는 사람을 시키라는 사양같고 겸손함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어련히 알아서 모세를 부르셨겠느냐?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할 일을 지명 받았을 때 나보다 더 능력있는 사람을 시키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거절이요, 아니면 나 아니면 안 될 것이라는 교만의 역(逆) 표현이기도 한 것입니다. 내 사정, 내 능력, 내 형편은 자기가 계산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맡기시면 “아멘” 하는 믿음이 곧 순종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모세는 물론 겸손한 마음이었지만 “아멘” 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맡겨 주셨으면 결코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경우가 많습니다. 네가 회장해, 반장해 하고 적극 밀어주는 것 처럼 해 놓고는 협조는 못할망정 뒤에서 허물이나 들추고 흔들어 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최고로 야비한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함께 책임지십니다. 사명을 완수하게 확실하게 밀어주시고 또 완수하게 하십니다. 12절에 모세에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운 사명을 맡겨주시면 마치 내가 그것은 전적으로 해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해 낸 후에 생색을 내거나 공적을 주장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시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의미가 있으며 우리를 앞에 내세워 사용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맡겨주실 때는 우리는 내가 가장 적격자로 인정받은 것을 감사하며 항상 “아멘”으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과가 어떻게 될 것까지 말씀하시며 내가 너를 보낸 증거를 분명히 보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2절) 하나님은 확실하게 우리를 보장해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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